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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살 때 시 짓고 아홉에 엄마와 사별

[[김삼웅의 인물열전] 다시 찾는 다산 정약용 평전 / 5회] 정약용은 자질이 뛰어나고 대단히 총명했다

등록 2020.09.04 17:12수정 2020.09.04 2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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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의 생가는 공사로 인해 담장 너머로만 볼 수 있었다. 다산 정약용의 생가는 공사로 인해 담장 너머로만 볼 수 있었다. ⓒ 유영수

 
천재는 타고난 것인가 생육된 것인가, 선천적이냐 후천적이냐는 해묵은 논쟁거리 중의 하나다.

막상 '발명의 천재'라는 에디슨은 "1%의 인스피레이션과 99%의 노력"을 들었다. 독일의 정치가 비스마르크의 말이다.

"천재란 한 덩어리의 대리석이다. 여기에 노력ㆍ정신이라는 칼끝을 가하면 무엇이든지 된다. 이것으로 신의 상을 만들든지 물그릇을 만들든지 하는 것은 노력ㆍ정신이라는 칼끝의 흔적에 불과하다."

조선왕조는 주자학(성리학)을 정학(正學)이라 하여 교조적으로 신봉하면서 통치이념으로 삼았다. 조금이라도 주자(朱子)의 어문(語文)이 다르면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아 죽이거나 파문하였다. (그 뿌리가 오늘 민주화나 남북화해의 주장을 '용공좌파'로 몰아치는 극우세력으로 이어진다.)

윤휴(尹鑴)는 "천하의 이치를 어찌 주자만 알고 나는 모르겠는가. 주자는 나의 학설을 인정하지 않아도 공자ㆍ맹자가 살아온다면 내 학설이 승리할 것이다"라 주장하다가 사문난적으로 몰렸다. 박세당(朴世堂)은 『사변록(思辨錄)』에서 주자를 비판하고, 공자ㆍ맹자의 사상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했다가 사문난적으로 몰리고 책이 몰수되었다.

정약용이 태어나기 이전의 일이지만, 당시 조선의 지식인 사회는 여전히 '사문난적'의 주술에 갇힌 시대였다. 일제강점기의 '후데이 센징(불령선인)'이나 해방 후 한국의 '빨갱이' 언술과 다르지 않았다. 천재가 태어나기도, 성장하기도 어려운 풍토였다.

정약용의 가문은 남인계의 시파(時派)에 속했다. 장헌세자(사도세자)를 보호하려는 계파였다. 아버지 정재원은 일찍이 출사하다가 영조의 둘째 아들인 장헌세자가 서인 노론의 벽파(僻派)에 의해 참혹하게 살해되자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때마침 아들(정약용)이 출는 타고난 것인가 생육된 것인가, 선천적이냐 후천적이냐는 해묵은 논쟁거리 중의 하나다.  


아이는 자질이 뛰어나고 대단히 총명했다. 다섯 살 때부터 아버지로부터 『천자문』을 배웠다. 하나를 가르치면 둘 셋을 알았다. 성장기에 학식 높은 아버지의 '귀농'은 어린 그에게는 축복이었다. 뒷날 정약용이 아버지에 대해 쓴 글이나, 그의 스승격이었던 번암 채제공(蔡濟恭)의 정재원 일대기인 「통훈대부진주목사정공묘갈명」에 따르면 정재원은 아들들을 훌륭히 키워 낼 인품과 능력을 갖춘 학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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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의 동상 책을 읽고 있는 다산의 모습에서 잘 알 수 있듯이 정약용은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등 평생에 500권이 넘는 방대한 저서를 집필했다. ⓒ 박태상

 
정약용이 여섯 살 때 아버지가 다시 벼슬길에 나가게 되었다. 정약용은 아버지가 경기도 연천현감으로 부임하자 따라가서 각종 경전을 읽고 타지 생활을 처음으로 겪게 되었다. 그가 일곱 살 때에 지었다는 산(山)이라는 제목의 오언시다.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렸네(小山蔽大山)
 멀고 가까움의 지세가 다른 탓이지(遠近地不同).

일곱 살 소년의 작품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만큼 뛰어나다는 평이 따랐다. 아버지는 아이가 수리학에 능통할 소질이 있다고 크게 기뻐하였다. 과연 그는 분수와 산수 등 수리학에도 뛰어나고 과학적 사고까지 탁월해서 뒷날 기중기ㆍ거중기 등을 제작했으며 수원 화성을 축조하는 설계를 하고 한강의 배다리 역사(役事)에 이르기까지 공학적 역량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당시 유학자로는 보기 드문 일이다.

아홉 살 때에 정약용은 견디기 어려운 아픔을 치룬다. 어머니의 죽음이었다. 조선후기 예학과 시가로 이름 높은 윤선도의 후예인 어머니는 지혜롭고 자상하였다. 정약용의 모습은 커갈수록 조선 회화사의 걸작이라는 자화상을 남긴 외증조부 윤두서의 모습과 닮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자신은 외탁이었다고 술회하기도 했다.

정약용은 일곱 살에 마마를 앓았다. 다행히 심하지는 않았으나 그 때문에 오른쪽 눈썹 위에 흔적이 남아, 눈썹이 모두 3개가 되었다. '삼미자(三眉子)'란 호는 이에 따른 것이다. 어머니를 잃은 아픔을 견디면서 옛 경전과 각종 사서를 읽고 글을 지었다. 1년 동안에 쓴 글이 자신의 키만큼 쌓였다고 하며, 이렇게 지은 글을 「삼미집(三眉集)」으로 묶었다. 고금에 보기 드문 일이다. 뒷날 500여 권의 책을 쓸 정도의 국량은 이렇게 예비되었다.

그는 성장하면서 친ㆍ외가의 내력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자부심을 갖고, 뒷날 「제가승초략(題家承抄略)」에서, 가풍을 네 가지로 들었다. 한 연구자의 부연이다.

첫째는 '삼감(謹)이다. 그의 가문은 국가의 위난을 맞아 순국하는 충절을 보이지는 못했지만 비리를 저지르거나 세력을 추종하는 일이 없었다. 둘째는 '서툴음(拙) 이다. 그의 선조들은 권력을 차지하거나 경쟁하는 일에 민첩하게 나서는 것이 아니라 멀리서 염려하며 한 발 물러서서 속을 굳게 지켰다. 셋째는 '착함(善)'이다. 그의 집안 사람들은 독기가 없으며 원망이나 보복을 하지 않았다. 넷째는 '신실함(諒)'이다. 그의 친족들은 허황한 말을 함이 없고 믿음직하며 진실하였다.

이처럼 정약용은 자신의 집안이 강직한 의리를 내세워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지시도 아니요. 권세와 이익을 탐하여 교활하고 민첩하게 행동하는 소인배도 아니며, 언제나 조심하고 선량하며 외유내강의 지조를 지키는 학자 집안으로서 성실한 가풍을 지켜왔음을 강조하였다. (주석 2)


주석
2> 금장태, 『실천적 이론가 정약용』, 24~25쪽, 이끌리오, 2005.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다시 찾는 다산 정약용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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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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