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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다섯에 홍씨와 결혼, 서울생활

[[김삼웅의 인물열전] 다시 찾는 다산 정약용 평전 / 6회] 서울살이를 하면서, 당대의 학인들과 만나 학문을 논하고 넓고 깊은 세상을 만나게 되었다

등록 2020.09.05 16:54수정 2020.09.05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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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의 묘소 남양주시 조안면 '여유당' 뒤편 산 아래에 위치하고 있다. 다산은 '자찬묘지명'을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대개 묘지명은 가까운 친지가 쓰는 법인데, 다산은 스스로 묘지명을 썼다. 자신의 삶에 대해 잘 모르면서 왈가왈부하는 사람이 없도록 하려는 의도를 엿볼 수 있다. ⓒ 박태상

 
조선시대 악습 중의 하나는 조혼제였다. 평균수명이 그만큼 짧았고 농삿일에 노동력이 필요하기도 했겠지만, 10대  초중반의 나이에 혼인은 악습이었다. 정약용은 열다섯 살인 1776년 2월 22일 서울 중심의 회현에 사는 풍산 홍씨 홍화보의 딸과 혼인하였다. 부인이 한 살위였다.

정약용은 양평에서 배를 타고 장가들로 서울로 가면서 배안에서 시를 지었다. 앞으로 (인용한 시문의 원문은 모두 한문)

 아침햇살 뱉은 산 맑고도 멀고
 봄 바람 스친 물 일렁거리네
 옅푸른 풀 그림자 물 위에 뜨고
 노오란 버들가지 하늘거리네
 차츰차츰 서울이 가까워지니
 울창한 삼각산 높이 솟았네.

처가 역시 대대로 명문세족이었다. 장인 홍화보는 문무를 겸한 인물인데 무과로 급제하여 승지 벼슬을 지냈다. 지략과 용맹이 있었고 병법에도 따를 사람이 없었다. 특히 지네 모양의 오공진(蜈蚣陣)법과 북두칠성 모양의 칠성진법에 조예가 깊었다. 성품이 강직하고 결기가 있어 바른 말을 잘해서 당시의 세도가 홍국영에게 찍혀, 딸이 결혼하던 해 평안도 운산으로 유배를 당하였다.

주위에서 홍국영에게 뇌물을 보내 유배를 면하라고 권했으나 홍보화는 끝내 듣지 않았다. 유배형을 당하더라도 소인배에게 허리 굽히지 않겠다는 결기였다.

사위는 유배를 떠나는 장인의 기개를 시로 읊어 위로하였다.

 이별 길에 가을빛 깊어가고
 작별의 자리 노랫소리 호방하네
 빙산같은 권세야 모를 일이라
 풍파 만나 부서질 줄 어찌 알리오. (주석 3)



결혼 첫 해에 장인이 귀양가는 비극을 겪지만, 정약용의 서울 생활은 그의 생애에 큰 의미가 따른다. 우선 시골 마재 마을에서 벗어나 서울 생활은 안목과 식견을 넓히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그때는 아버지가 다시 벼슬길에 올라 호조좌랑으로 서울에서 지내고 있었다. 정약용은 신혼의 셋집에서 아버지의 거소와 처가를 왕래하며 새로운 세상과 만나게 되었다.

정약용이 결혼한 홍씨부인과는 자식 6남 3녀를 낳아 4남 2녀를 먼저 보내고, 폐족의 위기를 함께 겪고, 귀양으로 별리의 세월 18년을 보내고, 한때 남편이 귀양지에서 지은 외도로 속을 썩이기도 하며, 해배되어 남편의 고향에서 18년을 더 함께 살다가 하필이면 결혼 60년이 되는 회혼일에 사별하였다. 이와 같은 사연을 가진 부부도 세상에는 흔치 않을 터이다.

정약용은 서울에서 사는 여성과 결혼을 계기로 서울살이를 하면서, 당대의 학인들과 만나 학문을 논하고 넓고 깊은 세상을 만나게 되었다. 뒷날 「자찬묘지명」에 쓴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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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이 직접 지은 자찬묘지명. 정조와 그의 친밀한 관계를 드러내는 대목이다. 밑줄은 필자가 친 것이다. 다산 유적지 소재. ⓒ 김종성

 
15세에 결혼을 하자 마침 아버지께서 다시 벼슬을 하여 호조좌랑이 되셨으므로 서울에서 셋집을 얻어 살게 되었다. 이때 서울에는 이가환 공이 문학으로써 일세에 이름을 떨치고 있었고, 자형인 이승훈도 또한 몸을 가다듬고 학문에 힘쓰고 있었는데, 모두가 성호 이익 선생의 학문을 이어받아 펼쳐나가고 있었다. 그래서 약용도 성호 선생이 남기신 글들을 얻어 보게 되자 흔연히 학문을 해야 되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여기서 인용한 「자찬묘지명」은 정약용이 해배되어 61세 되는 회갑의 해에(1822) 고향에서 쓴 글이다. 스스로 지은 자신의 '묘지명'으로 숨김도 거짓도, 미화도 비하도 없는 내용이다. 역사상 자서전ㆍ회고록 등이 수없이 많지만 정약용의 「자찬묘지명」처럼 담백하면서도 사실적인 것도 찾기 어렵다. 그의 생애를 가장 잘 보여주고 있는 기록물이다.

정약용의 파란곡절의 생애에서 이 시기가 가장 행복한 때가 되었을 것이다. 본가와 외가에 이어 처가에 이르기까지 명문가로서 손색이 없는 상류 가문이었다.

"성씨를 따지고 가문을 따지는 신분 사회의 질서가 강건했던 시대, 다산은 기본적으로 그런 조건에서는 유리한 입장에 있었음이 분명했다. 친가ㆍ외가ㆍ처가가 모두 명문의 집안이었으니 말이다. 15세인 1776년 2월 15일 관례를 치르고, 16일 상경하여 복사꽃이 활짝  핀 2월 22일 혼례를 올리고 서울 생활을 시작했다." (주석 4)


주석
3> 최익한, 『실학파와 정다산』, 498쪽, 청년사, 1989. 
4> 박석무, 『다산 정약용 평전』, 92쪽, 민음사, 2014.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다시 찾는 다산 정약용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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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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