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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을 잊은 우리는 별이 빛나는 밤에 라디오를 가슴에 품고 음악을 들었다. 볼펜을 꾹꾹 늘러가며 노래 가사를 받아쓰고, 가슴 졸이며 녹음을 하고, 마음에 오래오래 담아 두었다. 요즘은 클릭과 스킵을 하면서 음악을 빠르게 구하고 듣는다. 많은 사람들이 음악은 다 쓰면 버리는 소모품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음악을 쉽게 소비한다. 한때는 소녀였고 지금도 소녀라고 믿고 싶은 우리는 [올드걸의 음악다방]에서 음악에 얽힌 이야기를 한다. 이 이야기를 듣고 누군가는 마음 깊숙한 곳에 소장했던 노래를 꺼내 듣고, 누군가는 새로 알게 된 노래를 즐겼으면 좋겠다. - 기자말


ⓒ 반지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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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나는 서른 이후의 삶은 없다고 생각했다. 교사, 종군기자, 치과의사 등등 시시때때로 장래희망을 바꾸면서도 서른이 되면 삶이 끝나는 줄 알았다. 지금의 청년들이 재수, 대학, 어학연수, 인턴쉽, 대학원 등을 거쳐 서른이 되어야 겨우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것을 고려하면 꿈을 이루자마자 인생이 끝난다는 터무니없는 소리이다. '요절이 인간다움을 결정하는 것'이라고 단언했던 나는 조금은 위험했던 중학생이었다.

잘 읽히지도 않는데다, 겨우겨우 몇 장을 읽어도 이해도 통 되지 않던 '데미안'을 옆구리에 끼고 다닐 정도로 나는 데미안에 푹 빠져 있었다. 왜냐구? 싱클레어는 소설의 마지막까지 살아남았지만 데미안은 죽었으니까….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한다. 알은 새의 세계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세계를 깨트리지 않으면 안 된다. 새는 신을 향해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프락삭스다."

이 구절에 감동받고 (감동받은 이유는 묻지 말기 바란다. 제발!) 신비로운 소년 데미안에 반해버렸다. 자신의 이름처럼 이상야릇한 시구를 남기고 27살에 하늘나라로 가버린 시인 이상은 또 어떻고? 반항기 가득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던 제임스딘, 천재 음악가 모짜르트 등등 그들의 삶이 가치 있고 아름답다고 동경했다.

ⓒ 반지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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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 크림슨의 'Epitaph'(묘비명). 라디오 심야 방송인지 친구가 알려주었는지 정확한 기억은 나지 않는다. 나는 '묘비명'이라는 제목을 듣자마자 심장박동이 빨라졌다. 심마니들이 산삼을 발견했을 때의 흥분이 바로 이런 거야, 그랬다.

'요절'에 이어 묘비명이라는 단어에 매혹되는 순간이었다. 노래는 처절하고 비장했다. confusion, epitaph, tomorrow. 가사는 띄엄띄엄 들렸지만 흥분은 금방 식어 버렸고 가슴이 아려오더니 눈물이 톡하고 떨어졌다. 가사를 전혀 몰라도, 가사가 들리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이 노래는 멜로디 자체에서 슬픔이 진하게 배어 나온다. 이 후 나는 내 묘비명에 새길 문장 짓기에 몰두하기도 했다.

지금의 나는 그 당시 우리 부모보다 나이가 더 많다. 부모의 나이가 40대 중반이라는 것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서른이 되기 전에 죽는 것이 사람의 인생이라고 오해했던 철부지 중학생은 장래희망을 몇 번이나 바꾸면서 아직도 살고 있다. 우리 부모가 중학생 딸의 생각을 알았더라면 어땠을까? 우리 아이 또래의 사건, 사고 소식만 들어도 가슴이 덜컥 내려 않는 나는 이제야 부모의 심정을 알 것 같다. 어리석었던 내 생각을 부모에게 들키지 않은 것은 천만다행이다. 수백 명의 아이들의 목숨을 앗아간 세월호 참사에 내 가슴이 찢어진다.

2014년 다시 듣는 이 노래는 1982년보다 더 가슴이 아프다. '아무도 법을 지키지 않을 때 지식이란 죽음과도 같은 것, 모든 인간들의 운명은 바보들의 손에 쥐어져 있다'는 노래 가사처럼 세상이 되어버린 것 같다.

나 하나쯤이야 괜찮다고 하면서 규칙과 법을 지키지 않으면 또 다른 세월호가 침몰한다. 노래에서 킹크림슨은 자신의 묘비명을 혼란(confusion)이라고 했다. 어쩌면 우리 모두의 묘비명이 될 수도 있다. 두렵다. 그렇게 되지 않도록, 내일 울지 않으려면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태그:#EPITAPH, #킹 크림슨, #7080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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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로 세상과 소통하고 싶은 주부입니다. 교육, 문화, 책이야기에 관심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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