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을 그리워했던 시대의 거장, 이응노를 그리다

'고암, 추상의 울림전'을 다녀와서

등록 2008.02.14 10:45수정 2008.02.14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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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시대의 거장 이응노(1904∼1989), 대전 이응노 미술관에서는 그의 60~70년 작품을 모은 '고암, 추상의 울림전(2007.11월9~2008.2.13)'전시회가 열렸다.

시대의 거장 이응노(1904∼1989), 대전 이응노 미술관에서는 그의 60~70년 작품을 모은 '고암, 추상의 울림전(2007.11월9~2008.2.13)'전시회가 열렸다. ⓒ 곽진성


이응노(1904∼1989)는 '문자추상'이라는 독특한 예술세계로 잘 알려진 우리 미술계의 거장이다. 그런 이응노의 <고암, 추상의 울림전>(2007.11.9~2008.2.13)이 대전 이응노 미술관에서 열렸다.

이응노라는 당대의 미술 거장을 만난다는 설렘, 필자에게 있어 <고암, 추상의 울림전>은 봤어도 진작에 봤어야 할 전시회였다. 하지만 필자가 그의 작품을 보게 된 것은 전시회가 거의 막바지에 이를 때였다. 그것도 부랴부랴 시간을 내서 이루어진 일이었다.


물론 개인적 사정이 있었지만 하마터면 예술 거장의 전시회를 보지 못할 뻔했다는 사실, 두고두고 후회할 일이 하나 생길 뻔했다. 그래도 늦게라도 <고암, 추상의 울림전>에 가게 된 것은 다행스런 일이다. 마음 한구석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았다고나 할까? 날씨가 춥긴 했지만, 작품 전시회를 본다는 설렘에 비하면 날씨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a  작고 아담한 이응노미술관, 왠지 모를 정감이 간다

작고 아담한 이응노미술관, 왠지 모를 정감이 간다 ⓒ 곽진성


개인적으로 이응노 미술관에 다녀오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렇기에 처음에는 미술관 자체가 무척 낯설것이란 생각을 했다. 하지만 도착해서 본 미술관은 낯섬 대신 왠지 모를 정겨움이 들었다. 마치 오래전에 알고있던 어떤 무엇인 마냥,

대전광역시 서구 만년동에 위치한 이응노 미술관은 대전 시립미술관과 사이좋게 자리잡고 있었다. 하지만 시립미술관과 모양새는 많이 달랐다. 시립미술관이 크고 웅장한데 비해 이응노 미술관은 작고 아담했다. 시각차이가 분명한데, 크고 웅장한 건축보다 작고 아담한 이응노 미술관이 눈에 선명히 들어온 것은 왜였일까?

어쩌면 이응노 미술관의 그 자그만함이, 그 아담함이, 모진 풍파를 견뎌냈던 이응노 화백의 삶과 닮았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a  <고암, 추상의 울림전> 전시회 안내 펼침막.

<고암, 추상의 울림전> 전시회 안내 펼침막. ⓒ 곽진성


필자가 <고암, 추상의 울림전>에 간 날은 12일이었다. 앞에도 이야기했지만 날씨가 무척 쌀쌀했다. 일기예보에서도 오늘은 정말 추운 날씨라고 겁을 잔뜩 줬었다. 그런 모진 한파를 뚫고 도착해서인지 미술관 안에 도착해서도 오들오들 몸이 떨리고 있었다.


추위는 쉬 가시지 않았다. 사무를 보는 아가씨에게 표를 끊을 때에는 추위에 입이 얼어 말이 버벅거렸다. 아가씨는 약간 웃음, 나는 약간 민망한 기분에 표를 끊고 전시회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눈앞에 펼쳐지는 것은 조금은 아득하고 따뜻한 그런 느낌, 전시회 내부의 정경이 아름답게 펼쳐져 보인다.

a  <고암, 추상의 울림전> 전시회, 속 고암 이응노의 작품들.

<고암, 추상의 울림전> 전시회, 속 고암 이응노의 작품들. ⓒ 곽진성




그 아늑한 공간 곳곳에 따뜻하고 아늑한 느낌의 이응노의 '구성'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한지에 수묵, 혹은 채색을 한 그의 작품들은 따뜻했다. 좀전의 겨울은 마치 오래전 일인 마냥 잊혀지고, 봄날의 따뜻함이, 가을날의 여유로움이 전시회 안에 가득했다. 나는 그런 전시회장을 조금 천천히, 그리고 여유롭게 걸었다. 아득한 미술관을 걷는 느낌은 꿈결처럼 행복했다.

문득 주위를 둘러보았다. 뒤늦게 안 사실이지만 전시회장 안에는 필자 외에 다른 관람객은 보이지 않았다. 분명 전시회 막바지이기 때문이라는 이유도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이응노의 작품을 같이 감상할 사람을 찾지 못했다는 것, 그것은 조금 아쉬운 마음도 든다. 그래도 작품을 더 몰입해서 볼 수 있는 계기가 됐다는 것에 작은 위안을 삼았다.

a  <고암, 추상의 울림전> 전시회, 속 고암 이응노의 작품들.

<고암, 추상의 울림전> 전시회, 속 고암 이응노의 작품들. ⓒ 곽진성


이번 전시회에는 이응노 화백의 60~70년대 작품을 전시하고 있었다. 60~70년대 이응노 화백은 동백림 사건에 연루되어 옥중에서 두번이나 큰 곤욕을 치렀다. 이 시기 작가 본인은 생명의 위협을 느껴 아내와 함께 프랑스로 귀화를 해야 했다.

사랑하던 조국을 떠나야 했던 이응노의 아픔은 컸을 것이다. 하지만 비단 그의 아픔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미술 거장을 독재라는 이름하에 잃어버린 대한민국의 아픔이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예술혼은 어두운 세상의 풍파속에서도 꺼지지 않고, 큰 불꽃이 되어 세상 높게 피어올랐다.

나는 17세 때까지 고향의 자연속에서 자랐다. 나는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허나 그곳에는 아무도 나를 도와주기를 원하는 사람이 없었다. 오히려 내가 그림을 그리는 것을 방해 하려고 했다. 나는 혼자 몰래 가벼운 마음으로 항상 그림을 그렸다. 땅 위에, 벽 위에, 눈 위에, 그리고 검게 탄 나의 피부에 손가락이나 나뭇가지 또는 돌을 가지고서…그렇게 가깝게 느껴지는 머나먼 과거, 지금도 또한 나의 손가락이 붓을 쥘 때 나의 눈은 거기에 고정된다. 지금도 그 때처럼, 항상 그림을 그리는 일, 그것만이 변함없는 나의 행복이다.
                                                   고암 이응노, <신작 무화를 발표하면서>

미술 거장의 그림을 제대로 평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그의 삶과 그의 글을 통해, 이응노의 예술세계가 참 깊고 아름다웠다는 사실만은 자신있게 평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불꽃같은 정열이 있었기에 이응노를 거장으로 올려세운 '문자추상'과 '구성적 추상'이라는 독창적 예술세계를 개척해낼 수 있었을테니 말이다.

이 상징의 의식세계는 전통으로부터의 발견임은 물론이며 고암이라는 '조형적 텍스처'를 통하여 새롭게 탄생되어 있는 것이다.                  (고암, 추상의 울림전 팜플렛 중에서)

'문자추상'은 동양의 서예적 기법을 바탕으로 제작되었지만 간결한 획, 넓은 여백의 구조는 결코 동양의 그것이 아니었다. '구성적추상'은 한자의 서체를 변형시켰지만, 결국 한자의 테두리를 벗어나 훨훨 날아오른다. 그렇기에 늦었지만 이응노의 '고암, 추상의 울림전'을 본 것은 필자에게 특별한 기억으로 남을 것 같다.

a  <고암, 추상의 울림전> 전시회 정경

<고암, 추상의 울림전> 전시회 정경 ⓒ 곽진성


프랑스의 센 강을, 한강이라 불렀다는 이응노와 그의 아내, 그 하나의 사실만으로도 얼마나 고국에 대한 그리움이 깊었을까 생각해 본다. 그 그리움에 굴하지 않고, 하나하나의 그리움을 예술로 승화시킨 거장의 힘은 그렇기에 얼마나 위대한가. 전시회의 끝에서 정열에 가득찼을 이응노의 작업 모습을 상상해본다. 그리고 한편으로 그가 간직해야 했을 모든 아픔도, 감히 상상해본다.

그렇게, 그렇게, 이응노에게 아픔은 글자가 되고, 문자가 되어, 거장의 예술이 빚어졌나 보다.
#고암 이응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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