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교회'라는 이름이 품은 재미있는 역사

[백운동천을 따라 서촌을 걷다 ⑤]

등록 2016.01.13 21:11수정 2016.02.03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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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교교회> 약도(청계천 상류의 복개 전 물길이해를 위해 지도는 1946년 미군정청이 제작한 것을 사용하였다)
<종교교회> 약도(청계천 상류의 복개 전 물길이해를 위해 지도는 1946년 미군정청이 제작한 것을 사용하였다)유영호

 종로구 도렴동에 위치한 <종교교회>
종로구 도렴동에 위치한 <종교교회>유영호

이곳의 독특한 건물 이름은 앞서 본 <용비어천家>에 그치지 않는다. 바로 건너편에 <종교교회>라는 또 하나의 범상치 않은 이름의 교회가 있다.

'교회'이름 앞에 '종교'가 붙었다. 그 의미를 모르는 사람들은 약간 우스꽝스러울 수도 있지만 이렇게 이름 지어진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결론적으로 여기서 종교의 '교'자는 우리가 흔히 쓰는 '종교'라는 말의 '교화할 교(敎)'가 아니라 '다리 교(橋)'이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이름을 쓰게 되었는지 그 사연을 알게 되면 참 재미있다.


먼저 이곳 네거리는 백운동천과 사직동천이 만나는 곳이다. 두 개의 물줄기가 합쳐지면서 자연적으로 삼거리가 만들어졌고, 광화문 앞 세종대로로 이어지는 또 다른 길이 이곳에 연결되어 네거리가 된 것이다.

어쨌든 이곳은 물길이 지나가는 곳으로 이 물길을 건너기 위해 다리가 하나 있었는데 이 다리의 이름은 <종침교(琮琛橋)>이다.

 <종침교>의 유래와 사진을 담은 1924년 7월 22일자 동아일보 기사.
<종침교>의 유래와 사진을 담은 1924년 7월 22일자 동아일보 기사.유영호

종침교라는 이름이 만들어진 사연은 다음과 같다. 조선 성종대에 연산군 생모인 윤씨의 폐위를 논하는 어전회의가 있었는데, 당시 이를 앞두고 형제였던 충정공 허종(許琮)과 문정공 허침(許琛)은 걱정이 앞섰다. 당시 왕비 윤씨는 세자의 생모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민 끝에 사직동에 사는 누이를 찾아가 조언을 구했다. 궐내의 분위기를 전해 들은 누이는 당시 연산군이 세자로 책봉되어 있는 상황에서 그의 생모를 폐하는 논의에 참가했다가는 훗날 세자가 왕으로 즉위하게 되면 화를 피하기 어려울 것이니 무슨 꾀를 내어 회의에 참가하지 말라고 이른다.

이러한 누이의 조언에 따라 결국 허종, 허침 두 형제는 대궐로 가는 길목에 있던 이 다리를 지나다가 일부러 말에서 떨어져 다쳤다. 그리고 이 핑계로 어전회의에 불참할 수 있었는데 이로써 훗날 연산군이 왕위에 오른 뒤 자신의 생모 폐비 윤씨의 복위 문제로 일어난 소위 <갑자사회>(1504) 때 위기를 면하게 되었다.


이런 일을 겪고 그 뒤로 이 다리의 이름은 백성들 사이에서 허종, 허침 두 형제의 이름을 따와 <종침교(琮沈橋)>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이 갈리는 순간이었던 갑자사화에서 역사문제를 떠나 이들 오누이-형제들의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한다는 사실에 무척 즐겁다. 동시에 수백 년 전의 조선시대가 우리의 현실과 떨어져 있지 않다는 것을 다시금 느끼게 된다.

 도성전도(1834)에 나타난 <종침교>
도성전도(1834)에 나타난 <종침교>유영호

어쨌든 이 다리는 이런 일을 겪고 종침교로 불렀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사람들은 이것을 줄여 일명 '종교(琮橋)'라 불렀고, 훗날 대한제국 시기 이곳에 교회를 세우면서 그 이름을 다리이름에서 빌려와 <종교교회>라 정한 것이다.


물론 이곳 종교교회는 자신의 명칭에서 다리 명칭에 쓰이던 '옥홀 종(琮)'자를 흔히 종교(宗敎)라고 할 때 쓰는 '마루 종(宗)'로 바꿔 쓰고 있다. 교회이다 보니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종교교회 홈페이지에 의하면 이렇게 바꾼 이유는 '창조의 기원이 되는 하나님을 섬기며 하늘과 땅, 너와 나를 이어주는 다리가 되기를 기원'한다는 의미라고 한다. 이 역시 멋진 변형과 재해석이라고 생각한다. 이 교회와 신도들에게는 충분히 의미있는 명칭이다.

하지만 이곳에 있었던 '종교(琮橋)'가 '종교(宗敎)'로 쓰여졌다고 해서 역사가 바뀌는 것은 아니다. 참고로 이곳 종교교회는 1900년 설립된 오랜 역사를 갖고 있는 교회다. 1895년 윤치호의 요청으로 조선에 파송된 리드 목사로부터 시작된 조선의 남감리교는 1898년 여선교사 캠벨을 파견하였다.

조선에 온 캠벨은 지금 종교교회가 있는 네거리 일대의 고간동(현 내자동)에 <배화학당>을 설립하고, 그 뒤 1900년 종교교회와 자교교회의 모태가 되는 '루이스워커 기념 예배당'을 배화학당에 설립하였다. 그러니 결국 현재의 종교교회(도렴동)와 배화여고(필운동), 자교교회(창성동)는 모두 선교사 캠벨에 의해 비슷한 시기에 세워진 형제자매인 셈이다.

 1910년 종로구 도렴동에 벽돌로 지어진 종교교회(종교교회 홈페이지)
1910년 종로구 도렴동에 벽돌로 지어진 종교교회(종교교회 홈페이지)종교교회

한편, 시기적으로 제일 먼저 1910년 종교교회가 현재의 도렴동에 교회건물을 짓고, 다음으로 1912년 자교교회는 현재의 경복궁 서쪽 영추문 앞 창성동에 교회를 지은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동생들을 모두 새로운 터전으로 이전시킨 배화여고는 1916년 현재의 사직단 뒤편 필운동으로 이전하였다. 이로써 셋은 이제 각각의 독립된 공간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이 모두가 경복궁역을 기준으로 걸어서 10분 내외의 주변에 몰려 있다.

#종교교회 #종침교 #백운동천 #서촌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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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도성 걸어서 한바퀴』(2015), 『서촌을 걷는다』(2018) 등 서울역사에 관한 저술 및 서울관련 기사들을 《한겨레신문》에 약 2년간 연재하였다. 한편 남북의 자유왕래를 꿈꾸며 서울 뿐만 아니라 평양에 관하여서도 연구 중이다.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이런 제목 어때요?>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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