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秋夕) 아이러니

등록 2001.10.02 16:03수정 2001.10.02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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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이라 하여 내 성장지인 대전으로 내려오는데 기차 창 밖으로 보이는 안성 들판이 풍요롭다. 두 주 전만해도 들판이 저렇게 누렇지는 않았는데 어느새 저렇게 다른 빛깔 옷으로 갈아입었는지. 세월은 정녕 무상하다.


입장의 포도밭도 빛깔이 달라지기는 마찬가지, 푸른 잎새 사이로 알 굵은 거봉을 감추고 있던 포도밭 풍경이 만조(滿潮) 때를 지나 이제 완연한 썰물의 바다같다. 차면 기우는 것은 역시 만물의 진리인가 보다.

대전에 내려오고 밤이 오고 빈방에 들어누우니 옛날 추석이 생각 난다. 공주 봉황동 샘골에 한가위가 오면 아이들은 떼지어 아랫동네 윗동네 오르내리며 명절 놀이를 했다. 그 어렸을 적 어머니를 도와 함께 빚던 송편에는 단촐한 정겨움이 묻어 있었다.

그후 나이를 먹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아내를 데리고 추석 보내러 대전에 내려오면 벌써 몸과 마음이 파김치가 되었다. 때가 되면 본능에 사로잡힌 개미떼처럼 고향 찾아가는 사람들의 일부가 되어 교통지옥을 뚫고 내려오기는 오는데 정작 마음 속에는 보름달이 뜨지 않았다.

대학 간다고 서울 올라간 지 10년, 나는 가족을 잃어버리고 가족의 관념만을 갖고 살았던 것이었다. 음식 만들고 상 차리는 일에 시달리는 아내 보기 안쓰럽고 도와주는 시늉만 내는 일도 힘들었다. 다른 집안 사람인 아내와 부모님이 리듬을 맞추는 일도 여간 에너지가 소모되는 일이 아니다. 그 모든 일 구김살 없이 처리하고 올라가기에는 '휴가'가 너무 짧았다.

어느덧 나는 서른 하고도 일곱살, 한 점 두 점 나이를 먹어가니 추석이 어린 날 추석 같지가 않다. 안성의 평야와 입장의 포도밭은 내년이면 다시 밀물처럼 푸르러지겠지만 나의 추석은 결코 푸르러지지 못할 것이다.


한줌 기쁨을 누리기 위해 슬픈 짐승들처럼 고향 향해 무리지어 내려갔다 올라가는 동이족(東夷族)들, 그 습성이 가엾다. 명절을 누리기에는 한반도의 오늘은 너무나 구차스럽다. 이것은 물질 아니라 정신의 문제이다. 관습에 숨이 차고 오고가는 시간에 짓눌리는 명절이 명절 같지 않다.

사람들 가슴 속에 쌓인 응어리들 풀리는, 명절다운 명절은 아마도 내 세대에는 찾아오지 않으리라. 우리에게는 놀이를 향해 할당된 시간이 없으므로. 없을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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