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험실 인간

등록 2002.05.20 06:20수정 2002.05.20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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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속한 현실에 순진한 이상이라!

20년 동안 건강 식품을 만드는 데 심혈을 기울여 온 사람을 나는 알고 있다.


그 20년 전에 대학에 들어간 그의 딸은 거의 매일 주머니 안에 버스 토큰 두 개밖에는 없었다. 그녀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였나, 월세를 살던 망원동에는 물난리가 나서 그들은 짐보따리를 들고 백주에 피신을 해야 했다던가.

그 무렵부터 그는 실험실 인간, 사람들을 무병장수케 할 수 있는 식품을 싼값에 보급하겠다고 연구에 연구를 매진해 온 변함 없는 사람이었다. 그동안 그가 개발한 식품은 줄잡아 10여 가지, 그 가운데 가장 탁월한 것은 해조밀이라는, 미역과 다시마 등을 주원료로 삼아 여기에 그만이 아는 비법을 집어넣은 신비의 명약이었다.

과장이 아니라, 서울서 객지 생활 18년에, 아침밥 수시로 거르기 10여년에, 알콜에 전 내 몸을 그나마 이만큼 지켜준 것은 바로 이 해조밀이라는 묘약이었으니, 나는 이 원대한 포부를 가진 실험실 인간의 혜택을 가장 확실하게 입어 온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정녕 위대한 이상을 가진 실험실 인간이기는 하였으되 훌륭한 사업가는 되지 못하였으니, 지난 20년 동안 그가 이룩한 것이라고는 경기도 파주에 그의 친구가 경영하던 공장을 헐값에 빌려 쓰게 된 것과, 필시 3000만원이나 될까 하는 전세금이 전부일 부를 축적한 것과, 아직도 완전하게 표준화되지 못한 10여 가지 건강식품을 개발한 것 등이 전부였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인스턴트 식품 사먹지 말라고, 식품회사에서 만들어내는 온갖 입에 들어가는 것들이 얼마나 사람들 건강에 해로운지 아느냐고, 자기는 돈 버는 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인류를 건강하게 오래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진짜 목표라고…

지금 기업들은 원가의 스무 배 서른 배가 넘는 가격을 책정해 놓고 폭리만 취하고 있는데 그게 어디 양심 가진 사람들이 할 일이냐고, 그러나 자기는 박리다매를 추구한다고, 숱한 사람들이 자기가 만든 식품을 절실하게 필요로 할 것이므로 원가에 조금만 덧붙이는 방식으로도 금방 사업을 불릴 수 있다고, 지난 10여년 동안 그는 그렇게 나를 만날 때마다 자기의 이상을 힘주어 주장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의 주장이 그의 진심의 소산임을 알았으므로, 또 실제로 그가 만든 해조밀을 섭취함으로써 그나마 삶의 규칙성을 지탱해 올 수 있었으므로, 마지막으로 그는 나와 아주 밀접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어른이었으므로, 나는 언제나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자 했고 그의 사업이 융성하기를 기대해 마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그를 알게 된 10여년 동안 당장 내일 아침 해만 뜨면 엄청나게 신장되어 있을 것 같던 그의 사업은 제자리 걸음이나 별다름이 없었다.

아니, 그의 사업은 일종의 게걸음 상태를 면치 못했다. 앞으로 나아가지지는 못하고 시세와 사람들의 관심사를 따라 계속 또다른 식품을 개발해야 했으므로 정녕 그것은 게의 걸음에 가까운 그런 행보였던 것이다.

그는 사업가가 아니라 실험실 인간이었다. 이 실험실의 이상가는 오늘도 사람들 몸에 전혀 해(害)가 안 되고 오로지 이(利)만 될 것을 만들기 위해 불철주야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고 있으되, 그의 사업은 오로지 게걸음을 하고 있을 뿐이요, 그의 사업의 혜택을 입어온 이들은 정녕 소수, 운명처럼 그와 육친적 관계를 맺어온 사람들에 지나지 않는다.

그가 나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이 그의 실험실처럼 투명하고 무균적인 곳이라면, 인류의 무병장수를 위해 틀림없는 물건을 만들겠다는 그의 이상은 틀림없이 오래 전에 실현되고 말았으리라는 것을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오랫동안 그를 접하여 그가 얼마나 사심없는 사람인가를 나는 알고 있으므로 이 말에는 어떤 과장도 없다.

그러나 우리의 세상은 그렇지 못하다. 인류를 위한 이상가는 적고, 당장 눈앞의 돈과 권력에 혈안이 된 부정한 사람들이 많다. 이 욕망의 정치와 경제사업에는 선인과 악인의 원초적 구별도 없다. 누구나 기회만 있고 여지만 있으면 배덕을 행한다.

최근에 나는 신문을 잘 사지 않는다. 일주일에 두 번이나 신문을 읽고 있는지? 그러나 불과 5년 전만 해도 나는 매일 세 가지, 네 가지의 신문을 사던 정치적 인간이었다. 나는 이처럼 내 자신이 비정치적 인간이 된 것에 놀라는 한편으로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얼마 전 우리의 실험실 인간은 새로운 건강이론을 수용하여 이를 스스로 실천에 옮기는 한편으로 그에 입각한 새로운 식품의 개발에 들어갔다. 그는 그것으로 나를 비롯한 소수의 사람들에게 또다른 특혜를 베풀어 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불타는 인류애는 끝내 실현되지 못할 것만 같고 그를 둘러싼 가난도 쉽게 사라질 것 같지 않다.

그러나 그는 물질이 사람을 행복하게 해줄 수는 없다는 강인한 신념의 소유자이다. 심신이 건강해야 정말 행복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문학을 하는 나도 나의 재능을 비본질적이고 쓸데 없는 데 발휘해서는 안되고 바로 자기의 그 원대한 진리를 설파하는데 바쳐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그것이 한 획, 한 점 틀림없는 그의 진심의 소산임을 알고 있으므로 나는 고개를 수없이 끄덕이면서도 마음 한 편에서 일어나는 쓸쓸한 심정을 냉연하게 자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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