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웠던 3박4일의 필리핀 여행

<참된 세상 꿈꾸기> 필리핀에 가게 된 까닭

등록 2002.05.30 09:56수정 2002.05.30 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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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토요일(25일) 필리핀에 갔다가 엊그제(28일, 화) 밤에 집에 돌아왔습니다. 어제는 하루종일 몸도 피곤하고 정신도 흐리멍덩하고 해서 거의 누워서 지냈고, 오늘 아침에서야 겨우 정신을 가다듬을 수 있었습니다.


소속처가 확실한 명색 소설가인 덕에 내게도 외국 여행을 할 수 있는 기회는 많이 있습니다. 특히 <한국소설가협회>의 경우 해마다 한 번씩 회원 작가들로부터 참가 신청을 받아서 '국제 문학교류', 또는 '해외 문학기행'이라는 이름의 행사를 합니다. 문예진흥원으로부터 적게나마 보조를 받기 때문에 비용이 비교적 저렴하다 싶은데, 협회 사무국에서 미리 모든 회원 작가들에게 보내 주는 '세부 여행 일정표'를 보면 무척 짜임새가 있고, '문학기행'이라는 말과 잘 부합하리라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그렇지만 나로서는 거의 매년 그림의 떡일 뿐이었습니다. 비용 문제도 그렇고, 시간 문제도 그렇고…. 지난해는 서북아시아와 바이칼호 쪽으로 문학기행을 했던 소설가협회가 올해는 6월 20일부터 7월 5일까지 14박15일 동안의 아프리카(남아공·케냐) 문학기행 계획을 세우고 회원 작가들로부터 참가 신청을 받고 있는데, 그 긴 시간에다가 일인당 395만원의 비용 문제가 워낙 부담스러워서 나는 올해도 역시 아예 일찌감치 포기를 한 상태입니다.

1997년 '한·호 작가 세미나'라는 이름의 행사에 참여하여 6박7일 동안 호주를 여행할 수 있었던 것은 80여 만원의 비용 부담이 별로 크지 않았던 덕이지요. 그리고 1996년 <가톨릭문인협회>에서 실시했던 '마카오 성지 순례'에도 참가할 수 있었는데, 홍콩과 신천 등지를 함께 돌아보는 3박4일의 여행비용이 45만원이었지요. 지금이야 그런 여행 상품이 다시 없겠지만, 만약 또 그런 기회가 오게 되면 이번에는 마카오의 김대건 신부 유적에 대한 궁금증이 크신 어머니를 꼭 모시고 가고 싶습니다. 가능하면 가족 모두….

이번에 필리핀을 가게 된 것은 그 연유가 좀더 재미있지 싶습니다. 어떤 단체 행사에 끼어서 간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한 여행인 데다가 최근에 사귄 한 친지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한 것이었으니까요.

나는 지난해 가을부터 태안천주교회의 예비자 교리반 교사로도 봉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주일과 목요일 오전의 수녀님들 반에 참석할 수 없는 직장인들을 위한 목요일 저녁반을 담당하게 되었지요.


금년 예수부활대축일 직전의 영세를 목표로 6개월간의 예비자 교리 강의를 진행하던 지난 1월 초, 뒤늦게 내 교리반에 등록을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한국전력공사 협력업체인 <휴먼이노택>의 사원이라는 청년이었지요. 이름은 백남종(33). 그가 교육 과정 절반이 지나고 있는 한 중간에 내 교리반에 등록을 하게 된 것은 신부님의 배려에 의한 것이었고, 신부님의 배려는 그 친구의 특별한 사정 때문이었습니다.

2년 전 필리핀에서 근무할 때 사귄 필리핀 아가씨와 곧 결혼을 하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결혼을 하려면 우선 천주교 신자가 되어야 하는데, 그것은 필리핀 아가씨 쪽의 가장 강력하고도 중요한 요구 조건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여자 쪽의 요구를 순순히 받아들여 천주교 신자가 되기로 결심했노라고 했습니다. 그전부터 막연하게나마 종교에 대한 호기심을 갖고 있었는데, 이 기회에 천주교 신자가 되기로 작정했다며, 앞으로 신앙의 진수를 알게 되고 참 신앙인으로 착실히 살게 되면, 아내에게 깊이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될 지도 모른다는 말도 그는 했습니다.

나는 그런 말을 하는 그가 미덥게 느껴졌습니다. 목요일 저녁마다 빠지지 않고 교리반에 출석해서 열심히 교리 강의를 듣는 그의 태도에서 진지성과 성실성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가 광주 출신이라는 사실에서 처음부터 큰 호감을 가졌습니다. '광주'라는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쨍하는―특이한 감정을 갖게 되는 것은 나의 '숙명'일지도 모르며, 내가 하늘 우러러 깊이 감사하는 사항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나는 처음엔 그가 광주에서 결혼식을 하게 될 줄로 알았습니다. 5월 26일이 결혼식 날이라는 말을 들을 때는 대뜸 '광주의 오월'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는데, 그 순간 내 입에서 "나두 그 결혼식에 참석을 허야겄구먼!"이라는 말이 절로 나왔습니다.

"광주라는 이름만 들어두 가슴이 쨍허는 것을 느끼는 사람인디, 그런 내가 여태까지 망월동 참배를 뭇허구 있어. 그걸 늘 부끄럽구 죄스럽게 생각허구 있었는디, 아주 잘 됐구먼 그려. 이 기회에 광주에 가면 망월동 참배두 헐 수 있을 테니께…. 내가 12인 승 승합차를 가지구 있으니께, 우리 어머니 모시구 온 가족이 광주루 장거리 나들이를 한번 허야겄구먼 그려."
광주엘 갈 기대로 나는 벌써부터 가슴이 부푸는 기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결혼식을 광주에서는 하지 않고 필리핀에서만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친구가 그런 얘기를 처음에는 확실하게 하지를 않았습니다. 내가 망월동 얘기도 하면서 광주행 계획을 처음 말할 때는 미소를 지으며 "그래 주신다면 저로서는 그저 고맙고 영광이지요."라는 말만 했지요.

그러다가 그 친구가 필리핀에서만 결혼식을 하기로 했다는 말을 했을 때, 나는 의아한 느낌이 없지 않았습니다. 국내도 아닌 필리핀에서의 일인데, 왜 신부 쪽 동네에서만 결혼식을 하고 신랑 쪽 동네에서는 하지 않는 것일까? 상황에 따라서는 (특히 종교와 관련해서는) 결혼식을 두 번 할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러나 나는 그 의문에 집착하지 않았습니다. 그것보다는 필리핀에 갈 계획 쪽에 골몰할 수밖에 없었지요. 나는 진심으로 그 친구의 결혼식을 보러 필리핀엘 가고 싶었습니다. 신랑자리가 천주교 신자가 되기를 원한 신부 쪽의 종교 관련 사정을 생각하자니, 천주교 신자는 한 사람도 없는 신랑 쪽 집안 사정을 내가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신랑과 함께 온 친지들 중에 천주교 신자가 한 사람이라도 있어야, 즉 혼인미사 중에 같이 기도하는 사람이 하나라도 있어야 신부 쪽 사람들 보기에도 모양이 조금은 좋으리라는 생각이었지요.

그 친구가 오래 전부터 거래해 왔다는 광주의 한 여행사와 협의를 하고 함께 갈 일행 수를 따져서 내게 제시해 준 금액은 35만원 선이었습니다. 나는 비교적 저렴한 비용과 3박4일이라는 길지 않은 시간이 마음에 들었고, 가족과 함께 가고 싶은 마음도 들었습니다. 언걸 먹은 죄로 몇 년 동안 1억4천여만원의 빚을 갚으며 고생했던 세월도 이제는 끝이 나서 내 통장에는 조금씩 예금도 늘어가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2백만 원 정도만 쓰면 어머니 모시고 온 가족이 처음으로 해외 나들이를 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지요.

지난 3월부터 거의 주일마다 오후에 어머니를 모시고 동생네 가족과 함께 가족 나들이를 해온 터였습니다. 지난해 가을 대장암 수술을 받으시고 건강이 회복되시고 있는 어머니께서 특히 가족 나들이를 좋아하셨습니다. 나는 어머니가 살아 계시는 동안에는 좋은 계절의 좋은 날에는 동생 가족과 함께 어머니를 모시고 내 12인승 승합차를 가지고 가족 나들이를 계속할 마음이었습니다. 그런 차제에 드디어 해외 가족 나들이까지 하게 된다면 금상첨화일 터였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지난해 대장암 수술로 대장의 절반을 잃어 아직도 설사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리고 초등학교 교사로서 올해 1학년 부장을 맡은 아내는 사흘씩이나 교실을 비울 수 없는 상황이고, 올해 중3인 딸아이도 사흘의 수업 결손을 부담스러워했습니다. 부모에게 사교육비 부담을 전혀 주지 않고도 공부를 잘해 주고 있는 딸아이의 그런 걱정을 무시할 수가 없더군요. 그래서 결국은 올해 초등학교 6학년인 아들녀석만 동행을 하기로 했지요.

신랑 백남종 씨는 내가 아들과 함께 필리핀에 가기로 한 결심을 확실하게 말해 주자 더없이 기쁘고 고마운 표정이었습니다. 그는 지난 4월에 또 한번 필리핀을 다녀왔는데, 가지고 간 영세 때 찍은 사진들을 신부자리에게 보여 주며 내 얘기를 했답니다. "바로 이 분이 내게 천주교 교리를 가르쳐 주신 분인데, 이번에 우리 결혼식에 오시기로 했다"는 말을 하니 신부 될 아가씨가 아주 좋아하더라는 말을 하면서 그는 흐뭇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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