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하면 끝나지 않는다!"

영화 속의 노년(38) - <아 유 레디?>

등록 2002.07.12 16:36수정 2002.07.15 15:08
0
원고료로 응원
테마파크 안 사파리에서 화가 난 곰의 습격으로 한 바탕 소동이 벌어지고, 여섯 명의 사람이 '아유레디'라는 이름이 붙은 공간으로 몸을 피한다. 폐허가 된 건물에서 이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먼지로 덮여 있는 명패 하나. "당신이 잃어버린 것은 무엇입니까. 당신이 잃어버린 것을 찾아 드립니다. … 그러나 영원히 찾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환상의 정글 세계에 갇힌 여섯 명은 다 다르고, 또 골고루 모였다. 할아버지, 어린 아이, 젊은 여자, 젊은 남자, 고등학생 두 명. 이 모든 것은 악몽이다. 깨어나면 아무 것도 아닌 악몽이라고 믿고 싶지만 예상하지 못한 사건들이 계속 벌어지고 이들은 목숨을 건 채 달리고 또 달리며 도망칠 뿐이다.


할아버지가 가장 먼저 여기서 빠져나갈 길을 알아차린다. 월남전에서 소대원을 모두 잃은 그날의 기억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한 할아버지, 자신에게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여긴다. '아유레디' 건물이 철거되는 굉음과 함께, 빛바랜 부대원들의 사진 속으로 들어가 할아버지는 다시 한번 고스란히 그 전쟁을 겪는다.

고등학교 시절 첫사랑에게 모욕을 당하고 칼로 손목을 그은 아픈 기억을 가진 성형외과 의사 강재. 뼈아픈 가난을 완전히 지우고 냉정하고 타산적으로 살아가지만 늘 악몽에 시달린다.

그런 그가 드디어 기억과 마주선다. 아닌 것처럼 살았지만 과거의 자신에게서 결코 벗어나지 못했던 것을 인정하고, 그 상처 모두가 결국 자신인 것을 받아들인다. 소대원들의 죽음에 대해 '단 한발짝을 물러섰을 뿐이었는데'라고 후회하던 할아버지의 말은, 늘 지우고 싶은 기억이었기에 마주하지 않고 한 걸음 물러서곤 했던 자신의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남동생을 낳은 날 세상을 떠난 엄마. 아들을 얻기 위해 아내를 포기한 아빠도, 스스로 죽음을 받아들인 엄마도 이해할 수 없었다. 동생도 가족도 남자도 모조리 미운 동물 행동학 연구원인 주희. 마음의 문은 닫아 버렸으나 악몽은 사라지지 않는다.

정신없이 몰아치는 위험을 겪으면서 문득 자기 안의 엄마와 마주하게 되고, 엄마는 눈물과 함께 입을 연다. 아들이어서가 아니라 자식이어서 내 목숨 대신 아기를 구하는 거라고. 네가 나였더라도 그렇게 했을 거라고.


모범생과 양아치인 두 고등학생 준구와 현우는 사사건건 으르렁대지만 절대절명의 위기에서 잡은 손을 놓지 않고 친구임을 확인하고, 보육원 원장의 성(姓)이 아닌 진짜 아빠의 성(姓)을 물려받고 싶은 찬희는 맹찬희가 아닌 유찬희로 불리고는 활짝 웃는다.

여섯 명 중에서 할아버지가 가장 먼저 그 위기에서 벗어난 것은, 아마도 긴 세월 자기를 못살게 굴며 괴롭히는 기억의 정체를 확실히 알고 인정해서가 아니었을까. 누구나 지워버리고 싶은 기억이 있다. 빠져나가고 싶은 악몽이 있다. 그러나 그것 역시 지금의 나를 이루는 한 뼈대임이 분명하다.


잃어버린 것들 중에는 결코 다시 찾고 싶지 않은 것도 있다. 그러나 악몽도 역시 내 꿈 안에서의 일이며, 그것은 이미 내 것이었기에 온전히 간직해야 하는 것일까. 잃어버린 것과 다시는 찾고 싶지 않은 것들의 경계는 과연 어디일까. 마음 속의 전쟁을 오래도록 끝내지 못한 할아버지는 그래서 이야기한 것일까. "피하면 결코 끝나지 않아!"

그렇다면 인생에 악몽으로 남은 기억과 마주할 일이다. 마주함으로써 떠나보낼 일이다. 영화는 계속 마주할 '준비가 되었느냐'고 묻지만, 완전한 준비란 없다. 지금 여기서 정직하게 나와 마주설 뿐. 그런데 그것처럼 어려운 일이 있을까. 용기있는 사람만이 악몽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

(아 유 레디? R U Ready? / 감독 윤상호 / 출연 김정학, 김보경, 이종수, 윤석환)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아버지 금목걸이 실수로 버렸는데..." 청소업체 직원들이 한 일 "아버지 금목걸이 실수로 버렸는데..." 청소업체 직원들이 한 일
  2. 2 "부영, 통 큰 기부로 이미지 마케팅... 뒤에선 서민 등쳐먹나" "부영, 통 큰 기부로 이미지 마케팅... 뒤에선 서민 등쳐먹나"
  3. 3 깜짝 등장한 김성태 측근, '대북송금' 위증 논란 깜짝 등장한 김성태 측근, '대북송금' 위증 논란
  4. 4 탐욕스러운 기업이 만든 비극... 괴물을 낳은 엄마 탐욕스러운 기업이 만든 비극... 괴물을 낳은 엄마
  5. 5 윤석열 정부에 저항하는 공직자들 윤석열 정부에 저항하는 공직자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