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발 엄마 좀 들들 볶지 마세요!"

책 속의 노년(32) :〈나의 아름다운 정원〉

등록 2002.07.17 09:45수정 2002.07.22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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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에 다니는 동구는 인왕산 아래 동네에서 할머니와 엄마, 아버지, 여동생 영주와 함께 살고 있다. 엄마를 못잡아 먹어 안달인 할머니, 언제나 할머니 편만 들며 엄마에게 손찌검도 서슴지 않는 아버지. 두 사람이 무척 싫고 무섭지만 힘없고 어린 동구는 어떻게 할 수가 없다.

a 나의 아름다운 정원

나의 아름다운 정원

그렇지만 음식 솜씨 좋고 살림꾼인데다가 할머니의 구박과 아버지의 매질도 묵묵히 참아내는 세상에서 제일 예쁘고 불쌍한 엄마가 있고, 여섯 살 차이가 나는데도 자기보다 훨씬 똑똑하고 예쁜 동생 영주가 있어서 행복하다.


동구는 집안의 4대 독자지만, 3학년이 되도록 한글을 제대로 읽지도 못하고 쓰지도 못하며 흥분하면 말부터 막히는 신세여서 할머니에게 점점 더 미운 털이 박힌다. 동구가 지능은 정상인데 읽고 쓰는데 어려움을 겪는 난독증(難讀症)이 있다는 것을 알고, 정성을 기울여 지도해주시는 박영은 선생님을 만난 것은 3학년 때. 동구의 인생은 온통 아름다움과 부드러움으로 넘쳐난다.

그러나 박영은 선생님의 사랑과 정성 속에서 지내는 꿈같은 나날이 언제까지나 이어질 수는 없는 일. 학년이 바뀌어 선생님과 헤어지는 아픔을 겪고, 거기다가 80년 5월 고향인 광주에 다니러 간 선생님은 아무 소식 없이 돌아오지 않으신다. 그 해 가을 그렇게 아끼던 동생 영주마저 어이없는 사고로 동구의 곁을 떠난다.

할머니는 영주의 사고를 모두 엄마 탓으로 돌려 또 다시 엄마 가슴에 못을 박고, 견디지 못한 엄마는 그만 정신병원에 입원을 하게 된다. 서걱거리는 가슴으로 남은 할머니, 아버지, 동구. 가족은 이제 영영 되돌릴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고민하는 동구. 결국 할머니에게 손을 내민다. 늘 고향 마을로 가고 싶어하던 할머니에게 함께 가겠다고 한 것. 그래야 엄마가 집으로 돌아올 수가 있으니까.

말도 되지 않는 트집과 구박으로 시간을 보내는 할머니. 자식 둘을 돌도 되기 전에 떠나 보내고 외아들 하나 믿고 기르며 살아온 할머니는 며느리인 엄마가 사사건건 마음에 차지 않고 미웠을 수도 있겠다. 갈등하는 고부 사이에서 속이 답답한 아버지. 문제 해결 방법을 찾기는 커녕 집안이 조용한 게 최고라 여겨 그저 아내의 입만 다물게 한다. 때리면서까지 말이다.

할머니와 아버지. 그 반대편에 서있는 엄마. 그 사이에서 자기 속마음을 말이나 글로 다 담아내지 못하는 동구의 가슴은 이래 저래 멍들었고, 가슴 아픈 동구에게 그래서 동네 어귀에 있는 삼층 집 정원은 꿈의 정원이다.


오래된 바위와 잘 다져진 흙들이 벽돌과 시멘트를 대신하고 있고, 잔디 대신 낙엽들이 땅을 덮고 있는 그 곳. 살아 있는 나뭇잎들과 한때 살았던 나뭇잎들이 함께 향긋한 공기를 만들어내는 곳. 서로의 깃털과 몸매를 비교하지 않는 새들이 스스로 아름다운 곳. 동구의 아름다운 정원이다.

사랑하는 엄마와 함께 살면서 언제 오실지 모르는 박영은 선생님을 기다리고 싶지만 할머니의 귀향에 동행하기로 한 동구. 가족이 흩어지지 않는 유일한 길이라 생각해서이다. 그러나 열한 살 아이 혼자 지기에는 너무 무거운 짐이 아닐까.


"할머니, 제발 엄마 좀 들들 볶지 마세요!"라고 단 한 번도 소리 내어 말해 보지 못한 동구. 동구가 꿈꾸어 온 가정은 살아 있는 나뭇잎들과 한때 살았던 나뭇잎들이 함께 향긋한 공기를 만들어내는 삼층 집 정원처럼, 먼저 살아온 할머니와 이어서 살고 있는 엄마의 향기가 어우러지는 곳이 아니었을까.

서로의 깃털과 몸매를 비교하지 않는 새들이 스스로 아름다운 삼층 집 정원처럼, 할머니와 엄마가 서로 가진 것을 드러내 다투지 않고 각자 가진 것으로 채우는 그런 가정이 아니었을까.

이제 아름다운 정원을 떠나는 동구. 어린 동구의 짐이 너무 무거워 가슴이 아프다. 그러나 첫 장편소설을 끝까지 짜임새 있게 끌고 나간 솜씨 있는 작가는 뜻밖에도 어린 동구에게 기대어 문제를 풀어나간다. 할머니도, 아버지도 다 힘들고 아프다는 것을 이해하고 그들의 상처를 받아들이는 동구. 자기중심적인 할머니와 불로소득으로 해결책을 구하는 아버지에게 지나치게 관대한 것은 아닐까.

자기 책임을 철저히 방기해 버린 성인들의 문제를 아이가 완전하게 해결해 주는 그 틈새에서, 동구는 또 다시 멍든 가슴을 끌어 안아야 할지도 모른다. 아름다운 정원은 서로 다투지 않는 나무와 꽃과 새가 함께 만들어 내는 것, 결코 혼자서는 만들어 낼 수 없다.

(나의 아름다운 정원, 심윤경 장편소설, 한겨레신문사,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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