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랬다 아이가, 이 문디 머스마야"

<내 추억 속의 그 이름 16> 도깨비바늘

등록 2002.10.10 14:53수정 2002.10.15 1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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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도깨비 바늘

도깨비 바늘 ⓒ 우리꽃 자생화

"이야~ 저기 저 도둑놈 좀 봐라. 도둑놈이 벌건 대낮에 잘도 돌아다니네"
"오~오데? 도둑놈이 오데 있다카노"
"저어기 저기~ 도둑놈 좀 잡아라카이"
"흥~ 아~들이 자꾸 장난 치모 잡아간다카이"
"이히히히~ 니 바지 가랑이 좀 보라카이. 도둑놈이 떼지어 붙어있다 아이가"
"이 뭐꼬?"
"이히히히~ 이히히히히~"
"에이! 오늘 재수 옴 올랐네"


우리 마을 앞에는 도랑이라고 부르기에는 서운할 것 같은, 제법 넓은 시내가 펼쳐져 있었다. 그러니까 이 시내가 우리 마을과 들판의 경계를 이루고 있었다. 비음산 계곡에서 늘 흘러내리는 그 시냇가에 내려가면 거울처럼 맑은 물 속에 우리가 '물고동'이라 부르는 다슬기와 피라미떼들이 은빛 몸을 비틀며 놀고 있었다.

그래, 그 시냇가... 눈이 시리도록 푸르른 가을날 오후가 되면 가을햇살을 물고 윤슬을 반짝반짝 빛내던 그 시냇가... 한동안 넋을 잃고 가을햇살이 오색찬란하게 부서지고 있는 그 시냇물을 오래 바라보다가 문득 눈을 돌리면 눈앞에서는 노오란 별들이 벼알갱이처럼 우수수 쏟아져 내렸다.

우리 마을과 들판 사이를 배암처럼 휘어지며 흘러내리는 그 시냇가 양쪽에는 45도 정도 비스듬히 드러누운 널찍한 둑이 있었다. 양쪽으로 비스듬히 드러누운 그 둑은 우리 마을 아이들의 좋은 놀이터였다. 또한 장마가 지면 우리 마을의 홍수를 막아주는, 우리 마을에서 없어서는 안될 소중한 둑이었다.

가을날 오후, 우리들은 학교에서 돌아오면 누구나 그 둑으로 소를 먹이러 가고, 소풀을 베러가야만 했다. 그리고 그 둑에는 온갖 야생초들이 다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당시 그 야생초들의 이름을 모두 알 수는 없었다. 그래서 어떤 날은 자연 책을 들고 나와 일일이 확인해보기도 했다. 그리고 확인되지 않은 야생초들은 모두 '이름 모를 들풀'과 '이름 모를 들꽃'으로 불렀다.

a 도깨비바늘과 노오란 꽃

도깨비바늘과 노오란 꽃 ⓒ 우리꽃 자생화

그 당시 가장 우리를 괴롭힌 들풀이 바로 우리가 '도둑놈'이라 부르는 '도깨비바늘'이었다. 그 도둑놈은 두 종류였다. 하나는 실거머리처럼 생겨 입가에 뾰쪽뾰쪽한 바늘가시가 달린 제법 큰 '소도둑놈'이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표준어로 '털도깨비바늘'로 불리는, 마치 날파리같이 조그마한 것이 줄기에 다닥다닥 붙은 '바늘도둑놈'이었다.


"이크!"
"와 그라노? 독새(독사)한테 물리기라도 했나?"
"아~아이다. 오늘은 소캉 지게캉 다 잊어뿔라고 그라는갑다"
"뭐라카노?"
"이 봐라, 소도둑놈 바늘도둑놈이 내 옷에 새까맣게 붙었다 아이가"
"괜찮다. 나중에 그 도둑놈들 뗄 때 내가 도와주께"

a 강아지풀

강아지풀 ⓒ 우리꽃 자생화

그랬다. 그 둑에는 우리가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오요요요~ 오요요요~' 하며 가지고 노는 강아지풀과 슬쩍 묶어놓고 휘파람을 불고 있으면 가까이 다가오다 걸려 넘어지는 수크령을 비롯한 온갖 야생초들이 지천으로 널려 있었다.


새깃털 같은 하얀 꽃잎 속에 노오란 원색 금가루를 뽐내는 구절초, 마치 보리처럼 생긴 꽃대에 보랏빛 작은 꽃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꽃향유, 은빛과 보랏빛 긴 꽃을 가을햇살에 빛내고 있는 억새, 지렁이처럼 쑤욱 솟은 가느다란 대롱이에 마치 보랏빛 오이를 매단 것 같은 오이풀과 자주가는오이풀, 그리고 산국, 쑥부쟁이 등등...

그 둑에는 헤아릴 수조차 없을 정도로 많은 종류의 야생초가 있었다. 그런데 그중에 유난히 많은 것이 그 도둑놈이었다. 말 그대로 그 도둑놈은 우리들이 좀더 좋은 소풀을 베기 위해 둑을 마구 휘젓고 다니다보면 어느새 바지 가랑이에 새까맣게 들러붙어 있었다.

그래. 말 그대로 도둑놈은 도둑놈이었다. 도둑놈은 한번 옷에 붙으면 절대로 그냥 떨어지는 법이 없었다. 일일이 손으로 떼내야 했다. 그리고 급히 떼려고 마구 흝어내리다가 그 도둑놈의 뾰쪽한 가시에 찔려 손에 피가 나기도 했다.

하지만 그 도둑놈이 없는 둑은 우리들의 둑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도둑놈이 없는 가을은 우리들의 가을이 아니었다. 우리는 누구나 가을, 하면 그 도둑놈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 둑에 나갈 때면 누구나 군복을 까맣게 물들인 아버지의 그 헐렁한 바지를 입어야만 했다.

아이 두 명은 느끈하게 들어가고도 남을 그 헐렁한 바지를 끈으로 질껑 동여매면 바지가 허리에 이중 삼중으로 감겼다. 그리고 엉덩이까지 내려오는 긴 지게끈이 달린 그 지게를 지고 소를 앞장 세워 둑으로 나갔다. 그 헐렁한 바지는 보기보다는 일하기에 편했다. 또 그 바지를 입으면 도둑놈은 더 이상 도둑질을 하지 못했다.

a 털도깨비 바늘

털도깨비 바늘 ⓒ 우리꽃 자생화

그래, 그날은 제법 가슴이 볼록 튀어나온 마을 '가시나' 서넛이 가을꽃을 꺾으러 그 둑에 나왔었다. 소풀을 베면서 가만히 살펴보니 그 가시나, 그러니까 늘 내 짝꿍이 되었던 그 가시나도 나와 있었다. 그 가시나가 그날 꺾고 있는 것은 주로 하얀 구절초와 보랏빛 억새였다.

갑자기 용심(짓궂은 마음)이 싸하게 일었다. 더구나 그날따라 빨간 스웨터를 입은 그 가시나의 가슴이 유난히 볼룩하게 나와 햇살에 반사되고 있었다. 또 잔털이 많은 스웨터는 도둑놈이 아주 잘 붙는 옷이었다. 그리고 스웨터에 도둑놈이 한번 붙었다 하면 좀처럼 떼내기가 어려웠다.

나는 소풀을 베는 척하면서 소도둑놈과 바늘도둑놈을 낫으로 한 묶음 베어들고 그 가시나가 있는 곳으로 살금살금 다가갔다. 그 가시나는 보랏빛 억새를 꺾기 위해 낑낑거리고 있는 중이었다.

그때 나는 그 가시나의 등 뒤에서 살며시 일어나 그 도둑놈을 그 가시나의 스웨터에 쓰윽 문질렀다. 그 가시나의 작고 도톰한 입술처럼, 그렇게 빠알간 그 스웨터에 말이다.

"도둑년 잡아라~ 꽃도둑년"
"옴마야~"
"이히히히히히~"
"...놀랬다 아이가, 이 문디 머스마야"
"옴마야~ 뒷집에 돼지 부랄 삶더라~ 좀 주더나~ 좀 주던데~ 지린내만 나더라~"
"휴우~"
"니 많이 놀랬나?"
"그래, 이 문디 머스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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