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어탕이 놓인 그날 저녁

<내 추억 속의 그 이름 18> 방아풀

등록 2002.10.17 14:25수정 2002.10.17 18:37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a 마치 꽃향유처럼 자주색으로 피어난 방아풀 꽃

마치 꽃향유처럼 자주색으로 피어난 방아풀 꽃 ⓒ 우리꽃자생화

"우와~ 뱀장어다아~"
"어디~ 어디~"
"근데 뱀장어 색깔이..."
"으으악! 무~물배암이다."


우리 마을을 한 손으로 보듬고 흘러내리는 시냇가에는 피래미, 송사리, 버들붕어, 잉어, 모래무지, 미꾸라지, 메기, 뱀장어를 비롯한 여러 가지 물고기들이 많았다. 그 많은 물고기들 중에 우리들이 '좆쟁이' 라고 부르는, 그런 이름을 가진 물고기가 피래미였다. 그리고 그 재미난 이름을 가진 피래미 외 붕어와 비슷한 물고기들은 모두 송애라고 불렀다. 그 중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물고기는 미꾸라지였다.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우리들은 대나무 소쿠리와 여기 저기 찌그러진 양철로 된 그 바께스를 들고 시냇가로 나섰다. 들판처럼 누렇게 살이 오른 미꾸라지를 잡기 위해서였다. 미꾸라지는 마을 앞의 시냇가에는 별로 없었다. 늘 우리 마을을 바라보고 있는 비음산 쪽, 그러니까 누우런 벼가 익어가고 있는 들판을 가르며 진종일 흘러내리는 그 들판 사이의 시냇가에 많았다.

그 시냇가에 갈 때는 몹시 조심해야만 했다. 그 시냇가의 중심은 우리들 키보다 훨씬 깊었다. 또 소문에 의하면 사람 몇이 발을 헛디뎌 그 시냇물에 빠져죽기도 했다고 했다. 하지만 시냇가의 한켠으로는, 그러니까 메뚜기와 방아깨비가 투둑투둑 튀고 있는 들판이 있는 쪽은 그리 깊지 않았다. 우리들이 정갱이까지 바지를 걷어올리고 철퍼덕, 소리를 내며 들어가면 옷이 조금 젖을 정도였다.

미꾸라지는 주로 물풀이 듬성듬성 솟아있는 둑가의 그늘진 물 속에 많았다. 우리는 미꾸라지를 잡기 위해 그 물풀 사이로 마치 정지된 듯이 흐르는 그 시냇물, 그 시냇물이 흘러내리는 방향으로 소쿠리를 받치고 발로 물풀을 다다닥 밟았다.

이내 흙탕물이 일면서 소쿠리 쪽으로 흘러간다. 그러면 우리는 바삐 소쿠리 앞까지 발로 다다닥 밟은 뒤 이내 소투리를 치켜든다. 이내 물이 주르륵 빠져나가는 소리와 동시에 소쿠리 속에는 물풀과 자갈 몇 개 사이로 누렇게 살찐 미꾸라지와 송사리가 파다닥거리고 있다.

그런데 그날은 달랐다. 자갈과 모래 약간과 함께 파다닥거리고 있어야 할 미꾸라지와 송사리는 한 마리도 보이지 않고, 그 징그러운 물뱀 한 마리가 길쭉하게 갈라진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소쿠리 속에서 뱀장어처럼 꿈틀거리고 있지 않는가. 순간 머리끝에서 마치 감전이라도 된 것처럼 전기가 찌르르 흘렀다. 모두들 소쿠리를 내던진 채 기겁을 하며 물 밖으로 튀어나와 둑가에 올랐다. 휴~

미꾸라지를 잡다 보면 가끔 물뱀이 올라오는 일이 있었다. 물뱀은 언뜻 보기에는 꼭 뱀장어 같았다. 하지만 한번 물뱀을 건져 올리고 나면 그날 미꾸라지 잡이는 끝이었다. 너무나 징그럽고 소름이 끼쳐서 다시는 물가로 가고 싶지가 않았다. 오죽 했으면 그 뱀이 건져져 올려진 그 소쿠리를 가지러 물 속에 들어가지도 않고 지게 작대기로 건져 올렸겠는가 말이다.


그래, 그 미꾸라지. 해마다 가을이 오면 벼처럼 누렇게 살찐 그 미꾸라지로 끓인 추어탕이 생각난다. 그리고 추어탕, 하면 그 추어탕 속에 반드시 들어가야 하는 재료도 생각난다. 방아풀이다. 이 방아풀은 언뜻 보면 마치 박하잎처럼 보인다. 또 잎사귀를 깨물어 보면 마치 박하처럼 싸한 맛이 나는 것이 특징이다. 그래서 처음에 우리는 이 방아풀을 박하라고 부르기도 했다.

a 박하처럼 싸한 향기가 좋은 방아풀

박하처럼 싸한 향기가 좋은 방아풀 ⓒ 우리꽃자생화

우리 마을 곳곳에는 방아풀이 많았다. 그리고 해마다 이맘때쯤이면 들판 곳곳에 방아풀이 꽃향유처럼 생긴 꽃대에 꽃향유같은 자주색 꽃을 피웠다. 방아풀... 방아풀은 노화방지와 만성위병, 암예방에 특히 좋은 풀로 알려져 있다. 또 수명을 연장시켜준다고 해서 연명초라고 부르기도 한다지. 연명초... 그래, 이 연명초란 이름 속에는 전설이 얽혀 있다.


어느 가을날 오후, 고승이 탁발을 하기 위해 오솔길을 내려가고 있었다. 그런데 어디선가 풀벌레 소리 같은 이상한 신음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고승은 황급히 그 신음소리가 나는 곳으로 달려갔다. 저 편 길가에 웬 낯선 사람이 하나 쓰러져 마악 숨이 넘어가고 있었다. 고승은 그 사람이 쓰러져 있는 곳에 지천으로 깔려있는 풀을 찧어 먹였다. 이윽고 그 사람이 한숨을 길게 한번 쉬더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일어났다.

추어탕을 먹을 때 반드시 빠지지 않는 재료가 바로 이 방아풀과 산초가루다. 나 또한 이 방아풀과 산초가루가 없는 추어탕을 먹는다는 것은 생각조차 하기 싫다. 그래. 내가 서울에 살 때였다. 계절로는 꼭 이맘때였었지 아마. 하루는 추어탕이 하도 먹고 싶어서 추어탕 집을 찾았다.

"이 집 추어탕은 어떻게 만들죠?"
"왜 그러시죠?"
"혹시~ 미꾸라지를 통째로 삶아내는 것은 아니시겠죠?"
"그럼요. 우리는 남도식으로 해요"

그 집 주인이 빙그시 웃었다. 내가 알고 있는 추어탕은 미꾸라지 살을 곱게 갈아 여러 가지 야채와 함께 끓여내는 그런 탕이었다. 그런데 추어탕이 나오자마자 한가지 문제가 생기고 말았다. 산초와 풋고추, 마늘 빻은 것과 함께 반드시 나와야 할 방아풀이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그리고 방아풀이 있어야 할 그릇에는 송송 쓴 깻잎만 수북히 들어 있었다.

"방아풀은 없나요?"
"네?"
방아풀요?"
"???"

하긴, 남도지역에서만 자라는 방아풀을 서울 사람들이 어찌 알겠는가. 방아풀 대신 깻잎을 넣어 먹은 그날의 그 추어탕, 그 깻잎 추어탕은 그동안 내가 먹어왔던 그 추어탕이 아니라 마치 깻잎탕을 먹는 것만 같았다. 그날 나는 깨달았다. 재료 한가지가 음식맛을 그렇게 달라지게 할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방아풀의 그 위대한 맛의 힘을 알았다.

"니캉~ 내캉~ 니캉~ 내캉~"
"니 그 가시나가 그러캐도 좋나?"
"아이다! 나는 그 가시나가 별론데~ 그 가시나가 낼로(나를) 디기(많이)좋아한다 아이가"
"별로라 카는 거 보이(보니까), 니도 그 가시나가 그리 싫지는 않는가베"
"아이다~ 아이라카이~"
"니캉~ 그 가시나~ 니캉~ 그 가시나~"

우리들은 미꾸라지를 바께스 가득 잡으면 누구나 들판과 둑에 지천으로 널린 방아풀과 호박잎을 뜯었다. 그리고 마치 개선장군처럼 집으로 돌아오면 어머니께서는 '그래, 욕봤제'라고 하시며 등을 토닥여 주셨다.

a 잘 끓인 추어탕

잘 끓인 추어탕 ⓒ 남도본가맛

당시 어머니께서 추어탕을 만드는 방식은 좀 독특했다. 우선 잡아온 미꾸라지를 세숫대야에 물을 부어 담아놓은 뒤 약간 잿빛이 도는 왕소금을 뿌리고 1~2시간 정도 두었다.

그런 뒤 물을 따라내고 다시 왕소금을 뿌린 뒤 호박잎으로 박박 문질렀다. 그 다음에는 솥에 물을 붓고 푹 삶은 뒤 미꾸라지를 채에 넣고 걸렀다. 그러면 미꾸라지 살만 가루가 되어 빠졌다. 그리고 여러 가지 야채와 함께 그 미꾸라지 살을 넣고 푹 삶으면 그만이었다.

마루에 놓인 밥상에서 노을이 발갛게 지는 그날 저녁... 향긋한 추어탕과 송송 쓴 풋고추와 붉은 고추, 그리고 잘 빻은 향긋한 산초와 박하향을 풍기는 그 방아풀이 놓인 그날 저녁은 임금님도 부럽지 않았다. 수염이 꺼칠한 아버지께서도 그 날만큼은 소주를 드시지 않고, 우유처럼 하얀 그 막걸리를 몇 사발씩 드셨다. 그리고 밥을 만 그 추어탕 국물을 후루룩 드시면서 '어, 시원하다~' 라는 말을 남기셨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얼굴 창백한 계산원을 보고 손님이 한 행동 얼굴 창백한 계산원을 보고 손님이 한 행동
  2. 2 일타 강사처럼 학교 수업 했더니... 뜻밖의 결과 일타 강사처럼 학교 수업 했더니... 뜻밖의 결과
  3. 3 유럽인들의 인증샷 "한국의 '금지된 라면' 우리가 먹어봤다" 유럽인들의 인증샷 "한국의 '금지된 라면' 우리가 먹어봤다"
  4. 4 꼭 이렇게 주차해야겠어요? 꼭 이렇게 주차해야겠어요?
  5. 5 알고도 대책 없는 윤 정부... 한국에 유례 없는 위기 온다 알고도 대책 없는 윤 정부... 한국에 유례 없는 위기 온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