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비가 물고온 호박씨 싹 트는 꿈

<내 추억 속의 그 이름 27> 이엉과 금빛 초가집

등록 2002.11.20 17:07수정 2002.11.20 2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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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양동민속마을에 있는 물봉동산의 초가

양동민속마을에 있는 물봉동산의 초가 ⓒ 경주시

"우와! 니 인자 클났다."
"와?"
"아까 너거 집에 불이 나가꼬 지금 너거 집 지붕을 말키(모두) 다 뜯어내고 있다카이."
"일마 이거, 또 팔푼이 같은 소리하고 있네. 야, 일마야! 그기 불이 나서 지붕을 뜯어내는 기 아이고 지붕을 새로 올릴라꼬 그란다 아이가."
"불이 안 났는데 와 멀쩡한 지붕을 뜯는데?"
"일마 일거 인자 보이(보니까), 영 툭구 겉은 넘이네. 얄마야, 니는 옷에 때가 묻어도 갈아 입지도 않고 그냥 다니나? 집도 1년이 지나모 옷처럼 때가 묻고 구멍이 난다 아이가. 그래서 새옷으로 갈아 입혀야 된다 말이다. 인자 머슨 말인지 알 것나? 야 일마야."


추수가 끝나고 콩과 참깨, 들깨, 고구마까지 모두 수확하고 나면 우리 마을에서는 벼를 베낸 논을 새롭게 갈아 엎어 보리파종을 한다.

보리파종은 지난 여름 내내 곳간에 재워둔 거름을 지게로 져내 잘 갈아엎은 그 논에 뿌리는 일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거름을 뿌린 그 논바닥에 일정한 간격으로 골을 파낸 뒤 그 골 속에 보리씨를 마치 비료를 뿌리듯이 그렇게 뿌렸다. 우리 마을의 겨울나기는 그렇게 해야 대충 다 끝이 나는 것이었다.

그 보리파종이 끝나고 나면 우리 마을에는 이내 매서운 찬바람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맘 때가 되어야 우리 마을 어르신들은 비로소 지글지글 끓는 온돌방에 밤낮으로 두 다리를 쭈욱 뻗고 쉴 수가 있었다.

하지만 우리 마을 어르신들은 겨울이 되어도 쉬는 날이 별로 없었다. 그렇다고 평소처럼 논에 나가는 것은 아니었다. 마을 할아버지들은 주로 양지 바른 담벼락에 앉아서 담배를 피워물고 올해는 누구네가 가장 농사를 잘 지었고, 누구네는 홍수 때 산비탈이 무너져 내려 농사를 망쳤다는 등, 주로 우리 마을과 관계된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시시콜콜하게 했다.

"허어~ 산수골 그 댁 딸도 내년에는 시집을 보내야 되것더만."
"이 영감쟁이가 갑자기 허파에 바람이 들었나? 아침부터 각중에 그 집 딸네미 이야기는 와 자꾸 해쌓노?"
"그기 아이고 내 지난 번 상남장에 갔다가 큰 실수로 할 뿐 안했더나."
"와? 또 장터에서 막걸리 한잔 까빡 취했더나?"
"그기 아이라 한창 쌀뜨물 겉은 막걸리를 마시고 있는데, 갑자기 누가 낼로 부르는기라. 그래서 나는 그 선술집 색시줄 알고, 손이나 슬그머니 한번 잡아볼라꼬 다가갔다 아이가."
"그래서?"


"아, 그렇잖아도 내가 요새 눈이 침침해가꼬 사람 분간을 잘 못한다카는 거는 너거들도 다 잘 알제?"
"서론이 너무 길다, 그래가꼬?"
"내가 슬그머니 그 색시 옆으로 다가가니까 그날따라 가슴이 유난히 볼록 튀어나온 것이 그 큰 엉덩이를 요리조리 비비 꼬고 있는 기라. 옳커니 싶어서 내가 슬그머니 손을 안 내밀었더나."
"그래서?"
"그때 그 색시가 뭐라 캤는 줄 아나? 할배요? 우리 옴마가요, 할배 보고 모레쯤 이엉 좀 이어달라 캅디더. 내 울매나 놀랬든지 엉겁결에 말까지 더듬으며 그냥 알았다 카고 뒤도 안 돌아보고 왔뿟다 아이가."

그랬다. 해마다 11월 말이 다가오면 우리 마을은 갑자기 벼수확을 할 때처럼 바빠진다. 마을 어머니들은 대부분 소죽을 끓이는 가마솥에 누우런 메주콩을 삶아 짚을 깐 마루에 앉아 메주를 만들었고, 마을 아버지들은 앞마당에다가 마치 타작을 할 때처럼 짚단을 수북히 꺼내놓고 이엉을 엮으며 새끼를 꼬았다.


그리고 마을에서 가장 용머리를 잘 꼰다는, 새치골에 사는 "점바"란 이름을 가진 아저씨를 특별히 모셔오기도 했다. 점바 아저씨는 초가지붕의 맨 위에 올라가는 그 용머리라고 하는 이엉을 용비늘처럼 촘촘하게 정말 잘 엮었다.

그 점바 아저씨는 곰보였다. 마치 얼굴에 우박이 떨어져 무수한 홈이 패인 것처럼 보이는 심한 곰보였다. 그래서 당시 우리들은 점바 아저씨가 곰보이기 때문에 곰보처럼 그렇게 용머리를 촘촘하게 잘 엮는다고 생각했다.

우리 마을에서 이엉을 엮을 때에는 보통 마을 어르신들 대여섯 명이 지붕을 새롭게 단장할 그 집 앞마당에 모였다. 그리고 짚단을 깔고 퍼지러 앉아 마른 손에 침을 퇘 퇘 뱉아가면서 이엉을 엮었다.

이엉을 엮을 때도 자세히 바라보면 서로 하는 일이 달랐다. 어떤 어르신은 종일 새끼만 꼬았고, 어떤 어르신은 종일 이엉만 엮었고, 우리끼리 있을 때는 곰보 아저씨라 불렀던 그 점바 아저씨는 종일 용마루만 엮었다.

그리고 그 다음 날이 되면, 우리가 학교에 가려고 마악 세수를 할 때부터 쥐빛으로 물든 헌 초가지붕을 걷어내는 일이 시작되었다. 초가지붕을 새롭게 단장하는 일은 몹시 복잡했다. 먼저 어르신들 서너 명이 초가지붕 위에 올라가 헌 초가지붕을 낫으로 사정없이 지붕 아래로 걷어냈다.

그때 마당 아래로 우수수 떨어지는 것은 쥐빛 짚풀더미와 썩은 짚풀더미뿐만이 아니었다. 허옇게 살찐 굼뱅이도 짚풀더미와 함께 우수수 떨어졌다.

"옛날에는 잘 썩은 이 짚풀도 만병통치약이라꼬 고아 먹었다 카더라."
"하긴 사람이 안 묵는 기 오데 있노? 그저 몸에 좋다카모 방구(바위)도 깨싸(깨내) 묵는 기 사람 아이가. 이 세상에서 제일 독한 기 사람일끼라."
"아, 개똥도 약에 쓸라카모 없다카더마는... 허옇게 살찐 이 굼뱅이 이기 인자 와 나오노. 올 봄에 저거 할배 몸보신 해 줄라꼬 그렇게 찾아댕기도 없더마는... 간이 안 좋아 죽은 저거 할배가 한이 쌓여 굼뱅이가 되어 뿟는갑다."

그리고 이내 지붕 위에는 거무스럼하게 썩은 짚풀이 군데군데 붙어있는 버얼건 황토지붕이 드러났다. 그리고 그 바알간 황토 지붕 위에 새롭게 엮은 이엉들이 지붕에 걸쳐진 그 아슬아슬한 사다리를 타고 수없이 올라갔다. 그리고 얼마 후 용마루가 올라가고 나면, 마지막으로 새끼줄을 가로 세로로 일정하고 단단하게 묶었다. 초가지붕 이는 것은 그걸로 끝이었다.

또 어떤 집은 초가지붕을 걷어내지 않고 그 위에 바로 새로운 이엉을 올려 노오란 초가지붕을 새롭게 이기도 했다. 보통 초가지붕을 아예 통째로 들어내는 일은 드물었다. 당시 어르신들 말에 따르면 4~5년에 한번 꼴로 초가지붕을 통째로 걷어낸다고 했다.

또 간혹 여름에 비가 새거나 태풍이 불어 지붕에 무슨 문제가 생기면 그렇게 깡그리 걷어내고 새로 깐다고 했다. 그렇지 않으면 대부분 보온이나 지붕의 손상을 막기 위해서라도 일부러 지난 해 엮었던 그 초가지붕 위에 새로운 이엉을 얹는다고 했다.

그해, 11월에는 제일 처음 새로운 금빛 지붕을 이은 집이 우리 집이었다. 앞산가새(앞산 비탈)에 올라가 마을을 바라보면 가장 먼저 눈이 띄는 집... 그 노랗게 빛나는 그 집... 금방이라도 도깨비가 방망이를 들고나와 "금 나와라 뚝딱! 은 나와라 뚝딱!" 할 것만 같은 그 집이 바로 우리 집이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면 우리 집 주변에서 마치 거지처럼 초라하게 엎드려 있던 60여 호 우리 마을 곳곳의 쥐빛 지붕도 이내 금빛으로 변해 갔다. 그리고 또 며칠이 지나 문득 바라보면 우리 마을은 어느새 황금빛 속에 물들어 있었다.

금빛으로 노랗게 빛나는 초가지붕. 그렇게 금방 이은 노오란 초가지붕을 바라보면 어느새 마음이 뜨뜻해지면서 해가 저무는 데도 배가 고픈 줄을 몰랐다.

또 금방이라도 호박넝쿨이 담벽을 타고 거미처럼 기어올라가 이내 보름달 같은 호박을 주렁주렁 매달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날 밤 나는 그 노랗게 빛나는 초가지붕 아래 누워서 금빛 찬란한 꿈을 꾸었다. 흥부의 제비가 물고온 호박씨가 싹트는 그 빛나는 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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