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처럼 찬란하게 빛나는 꿈

<내 추억 속의 그 이름 28> 천자봉

등록 2002.11.25 18:20수정 2002.11.26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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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시루봉

시루봉 ⓒ 경상남도

쾅! 우르르르~ 꽈꽝! 우르르르~
"언가(형님)야! 저기 머슨 소리고? 대포소리 아이가?"
"맞다."
"근데 와 저래 자꾸 대포로 쏘아쌓노? 오데서 전쟁이 나뿟나?"
"그기 아이고, 저거는 상남훈련소에서 군인들이 봉림산을 바라보며 포사격 연습하는 기다 아이가. 니도 '무적해병'이라고 쓴 저 글씨가 보이제?"
"하모(응) 언가야! 근데 언가 니는 저기 븨나. 하늘에서 자꾸만 하얀 별똥이 떨어지는 저기."
"나도 지금 보고 있다."


내가 태어나 자란 고향 창원에는 산들이 몹시 많았다. 마치 창원의 사방팔방에 사천왕처럼 떡하니 버티고 서서 창원을 지키고 있는 그 산들은 대부분 500~800고지가 대부분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남해안에 점점이 떠 있는, 그런 섬만한 자잘한 산들도 무척 많았다. 그 자잘한 산들을 바라보면 마치 큰 거북이 몇 마리가 남면 들에서 헤엄을 치다가 가끔 등을 내보이는 그런 모습 같았다.

그 중에서도 우리 마을 앞에 반듯하게 드러누워 있는 산이 마당뫼였다. 마당뫼는 말 그대로 마을 앞에 있는 들마당처럼 평평한 그런 산이었다. 마당뫼는 마을쪽에서 바라보면 5~10년 남짓한 소나무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하지만 가운데는 노오란 잔디가 깔린 넓직한 마당이 있었다. 우리 마을 들판처럼 반듯한 그 마당에는 우리가 "뫼뜽"이라 부르는 묘지들이 제법 많이 있었다.

그 뒤, 그러니까 마당뫼의 반듯한 공간을 들러싼 그 빼곡한 소나무숲을 지나 남쪽으로 더 들어가면 군데군데 가시덤불을 비롯한 무수한 잡초들이 엉긴 넓직한 밭들이 있었다. 그 밭들에는 주로 우리들 식탁에 오르는 무, 배추, 고추, 파, 상치, 가지, 물외(오이), 감자, 고구마, 호박, 참깨, 들깨 등등이 주로 심어져 있었다.

그 밭둑 근처, 그러니까 유일하게 뽕나무를 심어둔 그 밭둑 옆에 제법 넓직하고 평평한 고인돌이 하나, 하늘을 바라보며 배꼽을 다 드러낸 채 드러누워 있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아도 왜 그 밭에 뽕나무를 심었는지는 모르겠다. 당시 우리 마을에서는 뽕잎을 먹고 사는 그 누에를 치는 집이 한 군데도 없었기 때문이다.


"니, 이 납작한 돌삐(돌덩이) 밑에 뭐가 있는지 아나?"
"그 거로 내가 우째 알끼고."
"야이, 문디야! 내 말 똑똑히 듣거라이. 이 돌삐 밑에는 사람 시체가 들어있다 카더라."
"뭐라카노? 그기 참말이가?"
"아마도 이 돌삐 밑에 묻힌 사람이 옛날에 우리 마을 추장일끼라."
"그라모 이 돌삐가 무덤이라 말이가?"
"그렇다카이. 나도 선생님한테서 배웠다 아이가."

그 고인돌은 우리들의 방석이자 안방이었다. 고인돌은 마을 아이들이 소를 풀어놓고 소풀을 베다가 심심하면 몰려들어 구슬치기도 하고, 땅뺏기도 하다가 털썩 주저앉아 쉬는 곳이었다. 또 어떤 때는 큰 대자로 드러누워 푸르른 하늘을 떠다니며 갖가지 형상으로 변하는 그 하얀 뭉게구름을 바라보며 뭉게구름 같이 하얀 그런 꿈을 꾸는 곳이기도 했다.

그 시루떡처럼 납짝한 고인돌이 드러누워 있는 마당뫼, 그 마당뫼의 고인돌 위에 올라서서 사방팔방을 바라보면 온통 눈앞을 가로막는 것이 산이었다. 동으로는 봉림산, 비음산, 대암산이 있었고, 남으로는 대암산에 이어 불모산, 웅산, 웅산과 안민고개를 끼고 병풍처럼 둘러쳐진 장복산, 봉암갯벌 건너 팔용산, 북으로는 봉림산을 건너 천주산... 그리고 마산에는 천주산과 맞붙은 두척산, 두척산과 만날고개를 낀 대곡산 등...


a 천자봉

천자봉 ⓒ 경상남도

그 산들 중 창원에서 가장 높은 산이 불모산(801)과 웅산(703)이었다. 밤과 으름과 다래 등이 유난히 많았던 불모산은 하룻밤새 곰들이 지었다는 그 유명한 성주사 곰절이 있는 산이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불모산 정상에는 아무도 올라갈 수가 없었다. 정확한 기억은 나지 않지만 우리들이 초등학교 2~3학년 때부턴가 그 불모산에 무슨 기지(우리들은 당시 미사일 기지라고 불렀다)가 들어서기 시작했던 것이었다.

우리 마을에는 땡겨울이 되어도 눈대신 비가 내렸다. 하지만 그 기지가 있는 불모산 꼭대기와 시루바위, 천자봉이 우뚝 솟은 그 웅산 꼭대기에는 마치 히말라야 산맥처럼 늘 하얀 눈이 덮여 있었다.

하지만 재수가 좋으면 우리 마을에도 오랜만에 함박눈이 펑펑펑 쏟아지는 그런 날도 있었다. 그러나 이내 다 녹아 없어졌다. 하지만 불모산과 시루바위와 천자봉에는 늘 하얀 눈이 쌓여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그러나 불모산은 이제 더 이상 신비스런 곳이 아니었다. 또한 날이 갈수록 그 기지가 불모산 정상 부위를 거의 다 차지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 이후부터 우리는 불모산보다 시루바위와 천자봉을 더 좋아했다. 그리고 겨울방학이 다가오면 그 시루바위와 천자봉을 향해 가오리연을 날리며 천자처럼 세상을 호령하는 그런 큰 꿈을 꾸었다.

당시 우리는 시루바위를 천자봉이라고 불렀다. 진해 쪽에서 바라보면 시루바위와 천자봉이 정확하게 구분이 된다. 하지만 창원에서 바라보면 시루바위와 천자봉이 늘 겹쳐져 보였기 때문에 우리는 시루바위를 곧 천자봉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당시에는 시루바위라는 그런 말조차 들어본 적이 없었다. 아이들 뿐만 아니라 어른들도 모두 시루바위를 천자봉이라고 불렀으니까.

a 떡시루 같이 생겼다 하여 시루라는 이름이 붙여진 시루봉

떡시루 같이 생겼다 하여 시루라는 이름이 붙여진 시루봉 ⓒ 경상남도

나 또한 최근에서야 천자봉을 떡시루처럼 생겼다 하여 시루바위라고 부른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그리고 또 당시 우리가 천자봉이라고 불렀던 그 봉우리는 시루바위를 품고 있는 웅산 줄기에 따로 솟아나 시루바위와 쌍벽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그 사실을 알고 난 이후부터 시루바위를 바라보면 웬지 기분이 찜찜하고 서운하기만 했다. 마치 어린날 천자봉에 송두리째 맡겨둔 우리들의 그 찬란하게 빛나는 하얀 꿈이 시루바위를 타고 시루떡처럼 모두 날아가버린 듯한 그런 생각이 자꾸만 들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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