헐려버린 최남선 옛집, 무얼 남겼나

[문화유산답사 52] 옛집 관리인 유모씨, 인터뷰 내용 와전돼

등록 2003.01.26 17:54수정 2003.01.28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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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4일(금)자 <연합뉴스>에 의해 "최남선 선생 고택 유품 '싹쓸이'"라는 기사가 나간 이후 25일(토)자 <동아일보>와 <세계일보>, <국민일보>, <한국일보> 등의 타언론사에서 이와 비슷한 내용의 기사를 보도한 바 있다.

특히 위 언론들은 최남선 옛집에서 55년째 거주하고 있는 유모씨(우이동·60세)를 인터뷰하고 그 내용을 싣고 있다. 그러나 기자가 직접 유씨와 전화 통화를 한 결과 몇몇 사실과 다른 부분이 있어 지적하고자 한다.


먼저 유씨는 <오마이뉴스>에 의해 최남선 관련 유품들이 훼손되고 있다는 보도가 나간 이후 <연합뉴스>나 <한국일보> 등과 전화 통화를 한 적은 있으나, 애초의 뜻이 다소 와전된 것 같다는 견해를 밝혀왔다.

유씨는 자신이 "육당이 춘원 이광수 등 일부 인사와 교환한 편지, 프랑스인이 육당에게 보낸 편지, 출판계약 영수증, 옛 신문과 일본 황실 사진첩 등을 마루와 마당에 쌓아 놓았는데 이번 주부터 대학생과 폐품수집가, 고서적동호회 회원 등 수십 명이 몰려와 모두 뒤져 가져가 버렸다"고 말한 것처럼 보도된 데 대해, "수십 명이 몰려와 가져간 적은 없는 것 같다"며 인터뷰 내용 중의 '일본 황실 사진첩' 등에 대해서도 "55년간 함께 살면서 육당 자손들하고 찍은 사진을 담아놓은 앨범이 있다고 한 적은 있는데 그게 와전된 모양"이라고 말했다. 또한 유씨는 "나는 중요해 보이는 유품들은 없었던 것 같다고 한 것 같은데 기사가 왜 그렇게 나왔는지는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실제로 기자가 지난 19일 현장을 찾았을 당시 유씨는 유품들의 정확한 내용이나 의미 등은 전혀 모르고 있던 상태였으며, "가끔 찾아오는 이들이 있긴 하지만 아무도 관심이 없더라"라고 말한 바 있다.

한편 한 언론은 더 나아가 "얼마 전에는 또 상당수 자료들을 트럭에 싣고 간 사람들도 있었다"고 유씨를 인터뷰한 것으로 전하고 있으나, 유씨는 "자료들을 싣고 가는 트럭은 본 적이 없는 것 같다"라고 기자와의 전화 통화를 통해 밝혀주었다.

또한 위 언론사의 인터뷰 내용 속에 나오는 '프랑스 언론인이 육당에게 보낸 편지'는 유씨가 모르고 있었다는 것을 앞서 말한 바 있으며, 실제로 기자가 현장을 찾았을 때도 볼 수 없었던 것이다. 다만 프랑스에서 발행한 신문이 보이기는 했으나, 한 사학자는 이에 대해 "러시아에서 발행한 것 같기도 하다"고 말하기도 했다....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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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꾼'들이 몰려드는 우이동

a 영욕이 교차하는 삶을 살다간 친일 문인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 1890∼1957). 교과서에서는 주로 조선 광문회를 조직하고 민족고전을 정리하는 등 애국적인 면만을 부각시키고 있지만, 일제 말기 청년들을 전쟁터로 내몰기 위해 참전 연설을 하고 조선사편수회에 들어 식민 사관을 퍼뜨리는 데 앞장선 인물이 바로 최남선이다.

영욕이 교차하는 삶을 살다간 친일 문인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 1890∼1957). 교과서에서는 주로 조선 광문회를 조직하고 민족고전을 정리하는 등 애국적인 면만을 부각시키고 있지만, 일제 말기 청년들을 전쟁터로 내몰기 위해 참전 연설을 하고 조선사편수회에 들어 식민 사관을 퍼뜨리는 데 앞장선 인물이 바로 최남선이다. ⓒ 권기봉

서울 강북구 우이동의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 옛집 철거와 관련, 이른바 '꾼'들이 몰려들어 문화재를 훼손하고 있다는 지적이 각종 언론매체를 통해 보도되고 있다.


지난 23일(목) 본 기자는 <오마이뉴스(www.ohmynews.com)>에 "집 헐리기 전, 자료라도 수습하라"는 기사를 송고했는데, 당시 현장을 직접 답사했던 기자는 "최남선 옛집의 서울시문화재 지정 대상에서 제외된 것과는 별도로, 여타 자료들은 미리미리 챙겨두어야 향후 연구에라도 도움이 될 것이다"라는 것을 전제로 기사를 올린 바 있다.

관련
기사
- 집 헐리기 전, 자료라도 수습하라


그런데 이 기사가 나간 지 채 3일도 안 된 지금, 정체를 알 수 없는 이른바 '꾼'들이 최남선 옛집을 찾아와 문화재를 훼손하고 있다는 지적이 있었다. 최남선 옛집을 찾은 이들 중에는 학술적인 연구를 목적으로 자료수집을 위해 찾은 경우도 있겠으나, 일부 개인적인 목적으로 옛집을 찾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물론 사적인 목적으로 문화재를 절취하거나 훼손하는 것은 우려할 만한 일임이 분명하지만, 어떻게 이런 사태까지 오게 되었는지를 생각하면 씁쓸함이 더해갈 뿐이다.

이제 생활문화사에도 관심을 가질 때가 되었다

a 최남선은 조선총독 사이토의 도움으로 《동명(東明)》이라는 22면의 타블로이드판 주간지를 만들어 독립 의지를 약화시키는 데 일조하게 된다. 사진은 최남선이 운영하던 동명사(東明社)에서 '월간(月刊) 괴기(怪奇)' 창간호를 찍으면서 받은 거래 영수증이다. 앞면에서 구좌번호와 날짜, 금액, 거래인 등을 확인할 수 있다.

최남선은 조선총독 사이토의 도움으로 《동명(東明)》이라는 22면의 타블로이드판 주간지를 만들어 독립 의지를 약화시키는 데 일조하게 된다. 사진은 최남선이 운영하던 동명사(東明社)에서 '월간(月刊) 괴기(怪奇)' 창간호를 찍으면서 받은 거래 영수증이다. 앞면에서 구좌번호와 날짜, 금액, 거래인 등을 확인할 수 있다. ⓒ 권기봉

특히 이런 일이 벌어진 것과 관련, 문화재를 바라보는 시각에 상당한 간극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다. 이미 국보로 지정된 '용감수경(龍龕手鏡)' 등 고서(古書) 4만여 권과 각종 최남선의 유품들은 1960년대 중반 최남선의 후손들에 의해 고려대에 기증된 바 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이런 사태가 벌어진 것은 "생활문화사(生活文化史)적인 측면에서 이른바 '값어치 없는' 유품들을 소홀히 다루었기 때문이 아닐까"하는 점이다.

실제로 기자가 우이동 현장을 찾았을 때 최남선이 운영하던 동명사(東明社) 관련 각종 영수증 묶음이나 최남선에게 배달된 편지나 신문, 이름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최남선의 자녀들이 공부하는 데 이용했던 것으로 보이는 교재나 연습장 등 당시 사회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코드' 역할을 하는 '자잘한' 유품들을 상당수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도 방안이나 가구 속이 아니라 마당에 널브러져 있는 종이상자 안에서…

우리 사회는 그동안 모 방송사의 '진품명품' 프로그램이 주는 덧없는 환상 속에서 문화재를 그저 '돈'을 매개로 다뤄온 것이 사실이다. 즉 도자기라면 흠집이 하나도 있어서는 안되고, 병풍은 으레 찢어짐 없고 수려한 문양을 뽐내야만 예상 판매가가 높게 매겨졌지, 문화·역사적으로 아무리 중요한 인물이나 사건과 관련이 있다고 하더라도 흠이 많거나 찢어진 것들은 가격이 낮아지는 등 소홀히 대접받았던 것이다. '진품명품'은 어디까지나 당시 사회를 읽는데 도움이 되는 단 하나의 '코드'에 불과할 뿐 전체 풍경을 조망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은 아닌 데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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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관된 문화재 보존 정책을 기대한다

a 단기 4288년 4월 29일, 강원도 사는 윤수병(尹受炳)이라는 청년은 최남선에게 보낸 편지에서 "선생의 거룩한 애족·애족 정신으로 지도해 달라"며 "지도만 해주신다면 저는 목숨을 걸고 지도에 응하겠다"고 쓰고 있다. 단기 4288년은 서기 1955년으로 남북간 대결이 한창일 때로, 젊은이가 최남선을 민족지도자로 생각한 것을 보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단기 4288년 4월 29일, 강원도 사는 윤수병(尹受炳)이라는 청년은 최남선에게 보낸 편지에서 "선생의 거룩한 애족·애족 정신으로 지도해 달라"며 "지도만 해주신다면 저는 목숨을 걸고 지도에 응하겠다"고 쓰고 있다. 단기 4288년은 서기 1955년으로 남북간 대결이 한창일 때로, 젊은이가 최남선을 민족지도자로 생각한 것을 보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 권기봉

한편 서울시의 서울시문화재 지정 대상 탈락의 이유와 관련해서도 시원치 않은 점이 눈에 띤다. 서울시는 이 같은 결정을 내린 이유로 (1) 최남선이 41년부터 52년까지 이 집에 살면서 강연과 신문 논설을 통해 조선 청년들에게 참전(參戰)을 적극적으로 독려했던 장소이고, (2) 올해로 이 집이 지어진 지 65년(1939년 5월 29일 건설)째로 이미 원형이 훼손돼 보존할 가치가 없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한 논거가 합당하다면 일제의 조선침략 냄새가 그대로 남아 있는
<동아일보>의 일민미술관(一民美術館)이나 일제시대의 '세종문화회관'격인 부민관(府民館)이 있던 현 서울시의회 건물, 한국은행과 맞은편의 신세계백화점 건물 및 제일은행 빌딩, 전북 고창의 김성수(金性洙) 생가 등도 철거되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그런 일은 2003년 1월 현재 벌어지지 않고 있지 않은가. 일관성 있는 문화재 보존 정책이 아쉬운 대목이다.

"왜 지금 와서 이렇게 관심을 보이는가?"

마지막으로 드는 의문은 "왜 이렇게 늦게 관심을 보이는가?"하는 점이다. 이미 최남선 옛집 보존 여부에 대한 논의는 지난해 말부터 시작되었으나, <동아일보>만이 지난 해 11월 이런 논란을 간략하게나마 다뤘을 뿐 당시 관심을 갖는 이는 극히 드물었다. 뿐만 아니라 1월 26일 현재 최남선 옛집은 이미 헐려 폐허로 방문객을 맞고 있을 뿐이다.

특히 지난 23일(목) [문화유산답사51] "집 헐리기 전, 자료라도 수습하라"라는 기사가 보도된 후 기자는 적지 않은 전화와 전자우편을 받아야만 했다.

연락을 취해온 이들 중에는 친일 문제를 연구하는 학술단체에서부터, 친일 관련 역사 연구가, 모 대학 박물관 학예사, 종합 일간지의 문화부 기자 등 이미 한번쯤은 직접 가봤어야 했을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왜 이들은 대표적인 친일 현장에 미리 관심을 갖지 않았던 것일까.

a 단기 4289년인 1956년 한국사학회(韓國史學會)에서 보낸 것으로, 조선왕조실록 제16책이 나왔으니 찾아가 달라는 출판 통지를 하고 있다. 위 자료 사진들은 기자가 직접 '소원'을 찾아 찍은 것으로, 지금 이 같은 자료들이 바람에 날려 뿔뿔이 흩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단기 4289년인 1956년 한국사학회(韓國史學會)에서 보낸 것으로, 조선왕조실록 제16책이 나왔으니 찾아가 달라는 출판 통지를 하고 있다. 위 자료 사진들은 기자가 직접 '소원'을 찾아 찍은 것으로, 지금 이 같은 자료들이 바람에 날려 뿔뿔이 흩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 권기봉

최남선 옛집 철거 전야, 무엇을 남겼나

결국 육당 최남선이 1941년부터 1952년까지 머무르면서 강연과 신문 논설을 통해 조선 청년들에게 참전(參戰)을 적극적으로 독려했던 장소는 허물어져 쓸쓸한 폐허가 되었다.

1948년 9월 제정된 '반민족행위처벌법'에 따라 구성된 '반민족행위처벌법 기초특별위원회', 이른바 반민특위에 의해 최남선이 구속될 당시 머무르던 집. 이제 이것마저 사라졌고 곧 빌라가 들어서면 또 하나의 근·현대 유적이 완전히 사라지는 셈이다. 몇몇 신문에 의한 의도적인 사실 호도로 인해, 그나마 희미했던 기억마저 거의 사라져 가는 친일 문인의 흔적이 말이다.

덧붙이는 글 | - 최남선 옛집 '소원(素園)'에 55년간 살아온 유모씨(우이동·60세)는 기자와의 인터뷰를 통해 "최남선 옛집이 이미 헐림에 따라 오는 2월 9일 인근으로 이사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유씨는 최남선 옛집을 자주 이용하지는 않았고, 옆에 컨테이너를 짓고 주 살림은 그곳에서 해왔다.

덧붙이는 글 - 최남선 옛집 '소원(素園)'에 55년간 살아온 유모씨(우이동·60세)는 기자와의 인터뷰를 통해 "최남선 옛집이 이미 헐림에 따라 오는 2월 9일 인근으로 이사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유씨는 최남선 옛집을 자주 이용하지는 않았고, 옆에 컨테이너를 짓고 주 살림은 그곳에서 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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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 기억 저편에 존재하는 근현대 문화유산을 찾아 발걸음을 떼고 있습니다. 저서로 <서울을 거닐며 사라져가는 역사를 만나다>(알마, 2008), <다시, 서울을 걷다>(알마, 2012), <권기봉의 도시산책>(알마, 2015)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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