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리칠 캐가꼬 그 가시나 줄라꼬

<내 추억 속의 그 이름 53>칡캐기

등록 2003.02.20 11:42수정 2003.02.20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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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칡넝쿨

칡넝쿨 ⓒ 우리꽃 자생화

"우리 낼 아침에 칡 캐로 가자"
"그라모 내가 곡괭이하고 푸대하고 갖고 올끼니까, 니는 수군포(삽)하고 호매이(호미)하고 낫을 갖고 나온나"
"니는 몇 시에 아침 묵노?"
"무성티에 해가 촛불맨치로(촛불처럼) 깜빡거릴 때 묵는다 아이가"
"그라모 낼 무성티 꼭대기에서 해가 마악 꼬리를 뗐을 때 똥뫼산으로 나온나"


우리 마을 주변에는 야트막한 산에서부터 400-500미터 남짓한 산들이 무척 많았다. 사방팔방이 산이었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김해평야처럼 확 트인 곳이 한군데도 없었다. 가까운 비음산에 나무를 하러 올라갔다가 우리 마을을 바라보면 산이 마치 수호신처럼 큰 울타리를 치고 우리 마을을 보호해 주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어마어마한 울타리 안에 펼쳐진 들판에는 야트막한 산들이 마치 자라처럼 들판 곳곳을 헤엄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또 들판 곳곳에 옹기종기 골뱅이처럼 붙어있는 마을을 언뜻 바라보면 마치 조그마한 고깃배들이 들판 위를 이리저리 떠다니며 그물을 던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해마다 이맘 때, 봄방학을 하면 우리 마을 아이들은 동이 트자마자 비음산과 배꼽을 마주대고 있는 대암산으로 칡을 캐러 갔다. 대암산은 당시 우리가 비음산과 더불어 '무성티' 라고 불렀던 산이다. 하지만 우리들이 나무를 하러 갈 때에는 주로 무성티의 북쪽인 비음산 꼭대기로 갔고, 칡을 캘 때에는 반드시 무성티의 남쪽인 대암산 중턱으로 갔다.

"오늘은 가리칠(칡)로 캐야 될낀데"
"가리칠로 캔다꼬? 가리칠 캐는 기 울매나 에러븐(어려운) 일인지 니는 아나? 나는 나무칠이라도 많이만 캤으모 좋것다"
"그래도 기대로 가꼬 가야 쪼맨한 기라도 하나 안 캐것나"
"그라지 말고 고마 동삼을 캔다 캐라"

대암산으로 올라가는 길은 비음산으로 올라가는 길과 달랐다. 그리고 길이 비좁고 몹시 가파로웠다. 하지만 나무 한 짐을 등에 지고 400-500미터가 넘는 산을 넘나들었던 우리들에게 그런 길은 신작로처럼 보였다. 이전부터도 우리들은 산에 오르락내리락 하다가 길이 없으면 길을 만들어서 다녔기 때문이었다.

해마다 우리들이 칡을 캐러 가는 장소는 거의 비슷했다. 우리 마을에서 새칫골과 철로를 지나 한동안 걸어가면 과수원과 젖소를 키우는 농장이 하나 있었다. 그 농장을 지나 곧장 올라가면 대암산 솔밭이 나왔고 우리들은 그곳에서 잠시 쉰다. 그곳에는 저절로 생겨난 제법 넓은 잔디밭이 있었고, 그 아래에는 고드름이 주렁주렁 매달린 계곡이 있었다.


그 계곡에는 우리가 '별똥' 이라고 부르는 빠알간 열매가 열리는 보리수나무가 제법 많았다. 간혹 재수가 좋으면 고드름을 따먹으며 목을 축이다가도 얼어붙은 별똥을 따먹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늦가을에 따먹는 것처럼 그런 새콤달콤한 맛이 나지 않았다.

"어! 칠 찍을라. 살살 캐라"
"에이~ 이거는 나무칠 아이가"
"괘않타. 나무칠은 칠이 아이라꼬 누가 그라더노"
"가리칠로 캐야 될낀데"
"와? 니 가리칠 캐가꼬 그 가시나 줄라꼬 그라제?"
"뭐라카노. 인자 그 가시나도 제법 컸다꼬 내하고 말도 잘 안할라칸다"


칡을 캘 때에도 요령이 필요하다. 칡넝쿨이 있다고 해서 그냥 무조건 땅을 파는 것이 아니다. 우선 이리저리 엉킨 칡넝쿨을 잡고 천천히 따라가면 이내 칡넝쿨이 줄줄이 달린 칡뿌리를 찾을 수 있다. 그러면 일단 칡넝쿨을 낫으로 모두 자른다. 이때 조심해야 한다. 마른 칡넝쿨은 생각보다 몹시 질기기 때문에 그리 쉬이 잘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a 칡꽃

칡꽃 ⓒ 우리꽃 자생화

그때부터 칡뿌리를 따라 흙을 살살 파내야 한다. 특히 칡이 있는 곳에는 제법 큰 돌이 많이 있다. 돌을 들어내고 흙을 떠내고 하면서 칡뿌리를 따라 계속 파내려 가야만 한다. 하지만 칡의 뿌리를 끝까지 팔 수는 없다. 그러므로 일정한 길이가 되면 그쯤에서 칡뿌리를 낫으로 자른 뒤 다시 흙과 돌을 묻어야 한다. 그래야 봄에 또 칡이 자라나기 때문이다.

칡에도 두 가지 종류가 있었다. 하나는 우리가 '가리칠'이라고 부르는 칡과 '나무칠'이라고 부르는 칡이 있었다. 칡은 처음 씹으면 어느 칡이든 몹시 쓰다. 하지만 가리칡은 씹으면 씹을수록 달착지근한 맛이 나면서 가루가 나기 때문에 별로 버릴 것이 없다. 나무칡도 오래 씹으면 달착지근한 맛이 나긴 하지만 가루가 나지 않아 어느 정도 씹다가 한입씩 내뱉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들은 누구나 가리칡을 캐기 위해 용을 쓰고 칡을 캐러 다녔던 것이다. 또한 가리칡은 4일장이 서는 날, 상남 시장에 내다 팔 수도 있었다. 하지만 칡넝쿨만 보고 처음부터 그 칡이 가리칡인지, 나무칡인지 구분할 수는 없었다. 다만 칡이 어디에서 자라고 있느냐에 따라 구분되었다.

가리칡은 주로 황토와 마사가 적당히 섞인 그런 곳에 많이 있었고 나무칡은 주로 시커먼 흙과 돌이 많은 그런 곳에 있었다. 그랬으니 우리가 주로 캐내는 칡은 나무칡이었다. 하지만 재수가 좋은 날이면 가리칡과 나무칡의 중간 정도의 맛을 지닌 그런 가리칡을 캘 때도 제법 있었다.

그렇게 칡 몇 뿌리를 캐고 나면 우리들은 휘파람을 부르며 신나게 산을 내려왔다. 그리고 솔밭 근처에서 고드름을 따서 목을 축인 뒤 점심을 먹었다. 우리들이 먹는 점심은 삶은 물고매와 벌건 김치였다. 삶은 물고매의 껍질을 벗긴 뒤 잘 익은 김장김치를 싸서 먹는 그 맛은 정말 둘이 먹다가 하나 죽어도 모를 맛이었다.

"욱! 욱! 우욱!"
"급히 묵을 때 알아 봤다. 아나, 퍼뜩 물 마시고 정신 좀 차리거라"
"고... 고맙다"
"그래, 고마우모 나중에 니 가리칠이나 쪼매 내한테 주라"
"아... 알았다"

집으로 가지고 온 칡은 우선 물로 깨끗히 씻은 뒤 일정한 크기로 작두에 잘랐다. 작두에 자를 때에도 가리칡은 잘 잘렸으나 나무칡은 정말 나무토막처럼 잘 잘라지지가 않았다. 그렇게 일정한 크기로 자른 칡은 우리 가족들만 먹는 것이 아니었다. 부모님께서는 그 토막난 칡을 들고 마을 사람들에게 골고루 나눠주셨다.

그날, 양지 바른 담벼락에서 제법 도톰한 입술을 조잘대며 고무줄 뛰기를 하고 있는 그 가시나를 나는 눈짓으로 슬쩍 불렀다. 그 가시나가 고개를 끄덕했다. 나는 앞산가새에 있는 소나무 숲 속에서 그 가시나를 기다렸다. 이내 그 가시나가 단발머리를 나폴거리며 나타났다.

"아나?"
"그기 뭐꼬?"
"칠이다. 오늘 캔 칠 중에서 제일 좋은 가리칠로 니한테 주는 기다"
"고맙구로"
"그라고 칠을 묵고 나서 입수구리(입술)로 잘 닦아야 된다"
"와?"
"입수구리가 불 뗀 거맨치로 새까매진다 아이가"

칡을 건네 받는 그 가시나의 손은 제법 따뜻했다. 내가 준 칡을 받은 그 가시나는 만족한 듯 살포시 웃었다. 웃고 있는 그 가시나의 쌍거풀 진 눈이 그날따라 우물처럼 움푹 패인 것 같았다. 나는 칡을 질겅질겅 씹고 있는 그 가시나의 도톰하고도 제법 빨개진 입술을 바라보면서 어서 내려가라며 턱짓을 했다.

"니 아까 그 가시나캉 오데 갔더노?"
"앞산가새에"
"뭐하로?"
"......"
"얼레꼴레리 얼레꼴레리"
"나는 봤다 나는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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