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학때 놀더라도 불안해하지 마세요"

아이들에게 희망을 접지 않는 이유

등록 2003.07.26 11:49수정 2003.08.01 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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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는 가녀린 한 줄기 빛도 희망입니다. 방학을 하고 두 아이로부터 받은 편지에서 저는 그런 희망을 느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성적표와 함께 보낼 생각으로 반 아이들에게 편지를 쓰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정성스럽게 쓴 한 통의 편지가 아이들의 가슴에 얼마만큼의 온기를 전할 수 있을까? 심히 의심하면서. 그 의심의 끝에 한 자락 희망을 매달아보기도 하면서.

방학을 하던 날 저는 방학 계획을 세운 아이들은 손을 들어보라고 했습니다. 세 명의 아이가 손을 들었습니다. 손을 들지 않은 서른 한 명의 아이들의 눈이 마치 신기한 구경거리라도 생긴 듯 모두 그들을 향했습니다. 바로 그때, 제 입에서는 마치 연극대사라도 외우듯이 이런 말이 흘러나왔습니다.

"오! 그래. 너희들은 방학 계획을 세웠단 말이지?"

저는 방학계획을 세우지 않은 아이들을 크게 나무라지 않았습니다. 계획을 세워도 실천하지 못한다면 시간 낭비일 뿐인데, 매번 실패한 방학을 보낸 아이들에게 방학계획을 세우라는 교사의 말이 형식적으로 들렸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대신, 저는 아이들에게 이런 말을 해주었습니다.

"방학 계획을 세우지 않았다면 지금부터 계획을 세워도 늦지 않습니다. 이러면 어떨까요? 방학 중 절반은 과감하게 놉시다. 나머지 절반 중에서도 3분의 2는 놀고 3분의 1인 8시간만 공부합시다. 물론 그 공부시간 속에는 독서도 포함이 됩니다. 공부시간이 너무 많은가요?"

말을 던져놓고 아이들의 표정을 살펴보니 그 정도면 해볼만하다는 눈치입니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다시 이렇게 말을 이어갑니다.

"그러니까 이제는 방학 때 놀더라도 불안해하지 마세요. 절반은 공부하기로 했으니까요. 그리고 노는 것도 중요합니다. 인생이란 어떻게 노느냐에 따라 그 성패가 갈릴 수도 있습니다. 놀 때는 신나게 놀고 공부할 때는?”


“신나게 공부합니다.”

돌림노래라도 하듯이 이렇게 큰 소리로 말을 주고 받으니까, 기계적인 반응이긴 하지만 삽시간에 교실분위기가 달라집니다. 물론 이제 잔소리는 그만하고 어서 종례나 해달라는 말을 대신해서 소리를 크게 질러댄 축들도 없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에게도 한 마디 안 할 수 없지요.


“여러분의 직업은 학생입니다. 학생의 본분은 배움이지요. 만약 여러분 아버지가 자기 직업에 충실하지 않고 매일 술이나 드시고 직장생활을 엉망으로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런 아버지가 여러분에게 존경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방학 중에 절반은 놀아도 절반은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으면 합니다. 그것은 학생으로서 자기 자신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아이들을 보냈습니다. 문단속을 하고 있는 방번 아이들 마저 보내고 텅 빈 교실에 잠시 앉아 있다가 저도 교실을 나왔습니다. 혼을 실어서 말을 해주었지만 큰 호수에 작은 조약돌 하나를 던진 꼴은 아닌가 하는 쓸쓸한 생각을 하면서.

한 아이가 메일을 보내온 것은 그 다음날입니다. 그리고 이틀이 지나 또 한 통의 편지가 왔습니다.

"오랜만에 메일 쓰네요. 부끄러워요. 방학인데 바캉스 안 가세요? 저는 다음에 부산 해운대 가려구요. 잠은 친척 집에서 자요. 부럽죠?

이번 방학 때는 보람 있고 재미있게 보내려고 하는데, 그게 잘 안되네요. 선생님 말씀대로, 방학 반절은 놀고 반은 책도 읽고 컴퓨터 학원도 갈 생각이에요.

요즘 책도 읽고 있어요. 제 방에 보니깐 소설책 같은 게 많았어요. 선생님하고 대화를 좀 하려면 책도 많이 읽어야 할 것 아니에요.…"

"오늘은 이렇게 선생님한테 메일 쓰기로 하루를 시작하네요. 어제부터 봉사활동을 하구 오늘도 봉사활동을 하려구요. 그런데 봉사활동을 하는데…조금은 힘들었는데 너무 행복했었어요.

병원에 있는 식당에서 봉사활동을 했는데요, 보람도 찾구 너무 재미있어요. 설거지도 하면서 가정 실습을 하는 것처럼 처음으로 이렇게 봉사활동을 하면서 보람을 느낀 것 같아요. 매일 엄마를 도우면서 설거지도 한 그 결과가 어제도 말해주는 거 있죠?"


"아, 내 말을 듣고 있었구나!"

첫번째 편지를 받고 느낀 것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아이들에게 희망을 접지 않기를 잘 했다는 안도감과 함께, 그 반대의 경우를 생각하면서 가슴이 철렁 내려앉기도 했습니다.

두번째 편지도 제 마음을 울렸습니다. 봉사점수를 따기 위해서 병원 식당에 들어갔겠지만, 그곳을 나올 때는 봉사의 소중한 가치와 즐거움을 터득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배움의 길에 있는 학생에게 이보다 더 귀한 체험이 어디 있겠습니까?

두 아이가 보내온 편지가 제게 희망을 준 것은 어쩌면 제가 아이들에게 큰 욕심을 부리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부모나 교사의 욕심에 비례해서 아이들이 바르게 성장해주기만 한다면 저라고 욕심을 부리지 않을 이유가 없지요.

하지만 욕심이 클수록 아이들의 가슴에 심리적인 부담만 더 얹혀주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로부터 우러나오는 소중한 성취동기의 싹을 잘라내는 불행한 결과를 가져오기도 합니다.

다만, 저는 어떤 경우에도 아이들에게서 희망을 찾는 일을 포기할 생각은 없습니다. 정성을 다해 쓴 한 통의 편지가 아이들의 영혼의 뿌리를 적시지 못하고 헛되이 땅 속으로 스며든다고 해도 말입니다.

누가 압니까? 땅 속으로 스민 한 방울의 물이 먼 훗날 다시 지상에 솟아올라 지친 나그네의 혀를 적셔주는 한 방울의 생수가 될 수 있을지. 그런 희망을 품어보며 아이들에게 쓴 편지입니다.

사랑하는 딸들에게

방학을 하고 사흘이 지났구나. 벌써부터 너희들이 보고 싶다면 거짓말이겠지? 아직은 아닐지 모르지만 곧 보고 싶어질 것 같은 예감이 든다. 그래 딱 그 정도야. 서른 네 명의 말만한 딸들로부터 해방되어 나만의 시간을 갖게 된 기쁨도 만만치는 않으니까. 섭섭하니?

요즘 도서관 일로 조금 분주하여 너희들에게 방학계획서를 받지 못하고 방학을 맞이한 것이 마음에 걸린다. 방학 전날 생일 시를 무려 세 편이나 쓰느라고 밤을 거의 꼬박 세우는 바람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단다. 아무튼 미안하구나. 이제야 마음의 여유를 되찾아 너희들에게 편지를 쓴다.

방학이 좋은 점은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있다는 거, 바로 그것일 거야. 난 고교시절에 기타를 배우고 싶었단다. 그런데 대학에 가서 시간이 많아지면 배우지 하다가 그만 기회를 놓치고 말았지.

막상 대학에 가니까 기타를 보아도 마음이 동하지 않는 거야. 정말 하고 싶을 때 과감하게 시작했으면 지금쯤 악기 하나쯤은 만질 수 있는 낭만적인 선생님이 되었을 텐데 하는 후회를 하곤 한단다.

방학을 가장 미련스럽게 보내는 사람은 이런 사람일거야. 놀고 싶은데 그러면 안 될 것 같고, 공부를 하자니 놀고 싶고… 그렇게 망설이고 주저하는 사이에 방학이 다 가버리는 거 있지. 나 같으면 이렇게 선언하겠다.

"방학의 주인은 나다. 방학은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내가 선택해서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공부를 하든지 놀든지 내 맘이다!"

어때? 조금 마음이 편해졌니?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은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마치 남의 삶을 살듯이 끌려가며 사는 사람일 거야. 방학 때만이라도 그날 주어진 시간들을 누구에게 의존하지 말고 스스로 생각하고 계획하고 실천해보면 어떨까? 그 결과의 양보다는 그것이 순수하게 너희들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라면 그 자체로 훌륭한 것이니까.

방학동안 선생님은 학교 도서관에 있을 거야. 가끔 놀러오기 바란다. 난 모범적인 학창시절을 보내지는 못했지만 책은 많이 읽었던 것 같애. 특히 방학 때는 수십 권의 책을 책상이나 머리맡에 탑처럼 쌓아놓고 한 권씩 정복해 가는 재미가 쏠쏠했단다. 방학은 그런 맛이 있었어. 읽고 싶은 책을 시간의 방해를 받지 않고 마음껏 읽을 수 있는 자유 말이야.

방학이 끝나면 방학을 어떻게 보냈는지 꼭 물어볼 거야. 그때 이런 대답을 듣지 않았으면 좋겠다. "집에서 잠만 잤어요." "지겨워서 혼났어요." 작년에 그런 말을 했다면 올해는 달라져야겠지. 해가 바뀌어도 발전이 없다면 그건 부끄러운 일이야.

방학 동안에 부족한 과목을 보충하는 것도 아주 중요해. 그런데 요즘 보면 꼭 돈을 들여서 공부를 하려고 하는 잘못된 버릇이 있더라. 정말 필요하다면 학원수강을 하는 것도 좋지만 가장 효과적인 공부는 스스로 하는 거야. 처음에는 좀 어렵고 힘들겠지만 문제해결능력을 키우는 방법으로는 그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지.

나에게 한 가지 작은 소원이 있는데 너희들하고 가을 소풍을 산으로 가보는 거야.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는데 선생님 소원 한 번 들어주지 않을래?

그러기 위해서는 방학동안에 몸 관리를 좀 해야할 거야. 시간을 정해서 산책도 하고 운동도 하고 그러렴. 소중한 것을 얻기 위해서는 얼마만큼의 고통은 따르기 마련이지.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땀을 흘리지 않고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어.

무엇을 하든지 너희들이 스스로 정하여 자유로운 마음으로 하거라. 그래야 후회가 없을 테니까. 어느 해보다도 재미있고 가치 있는 방학이 될 수 있도록 함께 노력했으면 한다. 그럼 방학이 끝나고 건강한 모습으로 만날 수 있기를 빌면서 이만 줄이마. 안녕!

2003년 7월 22일
사랑하는 담임선생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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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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