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년만의 만남, 장미 33송이를 준비했습니다

"내가 지금 눈을 감고 있는 것은…"

등록 2003.09.24 12:07수정 2003.09.27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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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년 만에 고국 땅을 밟게 된 누이가 미국 LA로부터 11시간의 비행 끝에 인천 공항에 도착한 14일 새벽 5시 20분, 나는 그 시간에 공항에 있지 않았습니다. 내가 마중을 하지 않은 것에는 까닭이 있답니다.


안면도 출신으로 안양에서 사시는 매형과 누님이 마중을 하기로 한 데다가, 누이가 고국에서의 첫 하루를 안양에서 지내기로 했기 때문이지요. 매형과 누님은 현재 호주 시드니에 새 삶의 보금자리를 꾸밀 준비를 하고 있는 넷째 딸도 만나 보고 미국에 사돈이 되실 분들과 '상견례'를 갖기 위해 16일 출국 예정인 상황이었지요.

그렇게 누이의 입국일과 매형 누님의 출국일이 이틀 상간이어서 우리는 모두 그 사실을 크게 다행으로 여겼지요. 매형과 누님의 호주 여행 계획은 오래 전에 작정이 되었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상태에서 미국 누이의 귀국 계획이 수립되고 또 겨우 일주일 전에서야 소식이 알려지게 되어서, 우리 가족 모두는 '아슬아슬했다'는 느낌과 표현을 서로 공유할 수 있었지요.

매형과 누님이 누이를 마중할 수 있게 된 덕분에 나는 추석을 쇠러 집에 온 딸아이를 연휴 마지막 날인 일요일까지 집에 붙들어놓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9월 15일 월요일 새벽에 천안부터 가서 딸아이를 등교 시간 전에 학교 근처 원룸에 내려주고 안양으로 갈 수 있었답니다.

매형과 누님이 누이를 마중하러 가는 길에는 다섯째 딸이자 막내딸인 귀염둥이 대학생도 동행을 했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내 누이를 마중하는 인천 공항의 그 자리에는 그들 세 사람 외에도 또 한 사람이 있었답니다. 나에게는 1년 후배가 되고 누이에게는 2년 선배가 되는 사람…. 늦은 나이에 시인으로 등단해서 의미 있는 주옥같은 시들을 발표하고 있는 사람….

누이를 마중하는 그 시인 친구의 손에는 꽃다발이 들려 있었답니다. 꽃다발은 장미꽃이었고, 모두 33송이였답니다. 그 장미꽃 다발을 누이에게 건네 주면서 시인 친구는 말했답니다.


"가만히 헤아려보니 우리가 무려 33년 만에 상봉을 하는 것이어서 서른 세 송이의 꽃을 준비했지. 장미꽃을 선택한 것은 세레나가 장미꽃을 특히 좋아했던 기억이 나서…."

누이를 내 승합차에 태우고 서해안 고속도로를 달릴 때 나는 누이동생으로부터 그 얘기를 들었지요. 그 얘기를 듣는 순간 나는 괜히 가슴이 뭉클하면서 눈물이 핑 돌더군요. 서둘러 선글라스를 쓰지 않을 수 없었지요. 30여 년 전 청년 시절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치는 것을 보면서 차의 속도를 늦추지 않을 수 없었고….


지금으로부터 33년 전이라면 1970년이겠지요. 나는 그 해 월남의 화약냄새 속에 몸을 놓고 있었고, 누이는 공주교육대학생으로 초등교사가 되기 위한 공부를 하고 있었지요. 가난한 집에서 어렵게 교대로 진학하여 자취를 하며 공부를 하자니 누이의 어려움은 클 터…. 나는 종종 내 피 같은 전투 수당의 일부를 떼어 누이에게 보내 주곤 했지요. 한 번은 3천원을 보내 주었는데 (그때의 3천원이 지금은 얼마일지…), 누이가 그 돈을 지니고 다니다가 그만 소매치기를 당해서 몹시 울었다는 말을 나중에 들은 적도 있답니다.

그 시인 친구는 나보다 한 살 아래라서 1970년에 군에 입대했을 것으로 압니다. 제대 후에 들은 얘기인데, 베트남 전쟁에 뛰어든 나와 달리 그는 국내에서만 군대물을 먹었는데, 나보다 훨씬 더 어렵게 군대 생활을 했더군요. 북한에 침투하는 특수 부대 요원이었답니다. 비무장 지대로 침투하다가 두 번 실패를 하여 구사일생을 했고, 세 번째 작전 준비를 하는 단계에서 제대를 했다더군요.

몸도 별로 날렵하거나 건장한 편이 아니고, 심성도 전혀 독하지 못하고 시와 그림을 좋아할 정도로 연성(軟性)이었던 그 친구가 어떻게 그런 북한 침투 요원으로 복무할 수 있었는지….

제대 후에 그 친구는 교정 공무원으로 취직해서(특채라지요, 아마…) 성실하게 근무하며 오늘까지 비교적 무난하게 살아왔답니다. 착하고 무던한 아내 사이에 남매를 얻었는데, 아들은 서울대 전자공학과를 나와 현재 대학원에 재학중이고, 딸은 간호대학을 나와 현재 대형 종합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한다고 하더군요.

그 친구가 결혼 후 천주교 신자 가정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종교를 갖기 원하는 아내에게 천주교를 권하고 자신도 곧 신자가 된 것은) 청소년 시절 우리 집에서 접했던 천주교 신자 가정 분위기에 대한 소중한 기억 때문이기도 할 터….

내가 그 친구와 처음 만난 때는 고교 2년 시절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시골 신설고등학교 제2기생이었던 나는 그때 운동 선수로, 학생회 간부로, 글도 잘 짓는 학생으로 학생들 사이에서 꽤나 이름을 날리고 있었지요. 어느 날 교정에서 공을 차고 있는데, 1학년 학생 하나가 나에게로 와서 수줍은 얼굴로 인사를 하면서 쪽지 하나를 건네 주더군요. 쪽지를 펴보니, 나를 좋아한다고, 나와 친해지고 싶다는 내용이었지요. (아, 그때가 벌써 40년 가까이 흐른 옛날이라니…!)

그 후 우리는 학년을 초월하여 급속히 친해졌지요. 나는 하루가 멀다하고 그 친구 집엘 다니며 놀았고, 밥도 얻어먹고 잠도 자고 했지요. 그 친구도 우리 집엘 자주 왔고….

그 친구는 6·25 전란 중에, 그러니까 아기 적에 아버지를 잃은 사람이었습니다. 게다가 중학교 1년 시절에는 큰형님이 스스로 세상을 하직해서, 남모를 슬픔과 상처를 안고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중형은 따로 나가 살고, 그 친구가 홀어머니와 함께 사는데, 아버지 없이 사는 큰형님의 아이들, 두 조카들을 자주 찾아보며 각별히 신경을 쓴다고 하더군요.

그 친구는 우리 집에 스스럼없이 왔고 혼자 오는 때도 많았지만, 방학 때는 다른 친구들과 어울려서 오기도 했지요. 어울려서 오는 친구들은 네 명이었습니다. 대전상고에 다니는 두 명에다가 서울 서라벌예고에 다니는 학생이 한 명 있었는데, 모두 같은 또래로 내 1년(초등학교로는 2년) 후배들이었지요.

그 친구들이 방학 때만 되면 우리 집에 몇 번씩 와서 밤늦도록 놀다가곤 한 것은 다 까닭이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 친구들은 방학 때 집에 오면 우선 우리 집부터 오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공식 행사였는데, 인정 많고 솜씨 좋고 미인인 내 누님이 잘 대해 주는 탓이기도 했지만, 사실은 내 바로 아래 누이동생 때문이었습니다.

그들 사이에서는 알게 모르게 묘한 경쟁심 같은 것이 흐르고 있었는데, 그것이 점점 심화되는 상황에서는 서울 서라벌예고와 태안고등학교에 다니는 두 친구는 단독으로 우리 집에 놀러오는 경우가 많아졌지요. 서울 쪽 친구는 우리 고장에서 최고 부자이신 분의 자제여서 현실적으로 조건이 가장 좋은 데다가 예술고생이라는 것도 빛이 되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태안고에 다니는 친구는 누구보다도 지리적인 이점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겨울방학 때 우리 집에 온 날 밤에는 고교 3년 시절부터 신춘문예에 도전한 작가 지망생인 나 때문에 이상한 곤욕을 치르곤 했답니다. 나는 그들을 우리 집 방에 앉혀놓고는 내 신작 단편소설을 한 편씩 읽어주곤 했지요. 내 소설 낭독을 들으려고 그들이 우리 집에 온 것이 아닌데도, 우리 집 방안에 좀더 앉아 있으려면 도리 없이 내 소설 낭독을 들어주어야 하니, 소설이 짧기나 한가, 재미있기를 한가, 도대체 무슨 얘기인지도 모를 소설을 들어주는 그 고생이 사실은 이만저만이 아니었지요.

드디어 소설 낭독이 끝난다고 그것으로 종을 치는 것도 아니었지요., 이번에는 각자 독후감을 말해야 하는데, 그냥 무조건 소설이 좋다고 해도 핀잔을 먹고, 그렇다고 악평을 할 수도 없고, 실로 난감 지경이었답니다.

(이 부분의 이야기는 그 네 명 중의 한 명으로 대전상고를 나온 이일형씨(태안새마을금고 전무)에 의해 17일 내 어머니의 팔순 생신 오찬 자리에서 공개가 되어 참석자들의 웃음을 자아냈지요.)

그런데 그들이 그렇게 우리 집을 다니며 서로 경쟁 가운데서 우정을 나누었던 시간도 그들이 모두 고교를 졸업하고, 또 내 누이가 고교 졸업 후 공주교대로 진학을 한 것과 함께 마침표를 찍게 되고 말았지요. 대전상고를 나온 친구들은 군 복무 후 고향에서 살게 되어 내 누이와 소식을 나누는 시간이 좀더 연장되었지만, 태고를 나온 친구는 1970년 군 입대와 함께 오래 내 누이와 소식이 두절되었던 것 같습니다.

서울 서라벌예고를 나온 후 그 네 명 친구 중에서 유일하게 대학에 진학한 친구는 내 누이가 교대 졸업 후 고향에서 몇 년 동안 교편을 잡고 있을 때도 우리 집을 내왕하는 등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지요. 그래서 그 쪽의 부모나 주변 사람들이 어떤 '감'을 잡기까지 했는데, 그러나 세상의 연분이란 묘하고도 묘한 것이어서….

아무튼 그때로부터 어언 30여 년의 세월이 바람같이 흘러서 이제 우리 모두는 50대 중년의 세월을 살게 되었습니다. 대전상고 출신 두 친구는 지역의 두 금융기관(새마을금고, 지역농협)에서 전무를 하고 있고, 서울 서라벌예고 출신 친구는 이탈리아에서 경제학박사 학위를 받고 와서 현재 경희대 교수로 일하고 있고, 태고 출신 친구는 교정공무원으로 착실히 살아오면서 시인이 되었습니다.

그 시인 친구와는 내가 <흙빛문학회> 회장이던 1980년대 중반에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친구는 1990년대 중반 문예지 신인상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한 후 고향의 <흙빛문학>에 참여했다가 <태안문학>에도 참여하게 되었는데, 나는 고향의 옛 정취와 추억들을 질박한 언어로 알뜰살뜰하게 그려내는 그의 시들을 읽는 것이 큰 즐거움이 되었지요.

그 시인 친구는 내 누이가 미국에서 산다는 것을 오래 전에 알았지만, 내 누이와 편지로 소식을 주고받은 것은 5년쯤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요즘엔 주로 인터넷 이메일로 소식을 나눈다고 하더군요. 그들의 그것을 내 매제도 좋게 보고 있고….

나는 인천공항과 가까운 부천시에서 살고 있는 그 시인 친구가 새벽에 공항으로 가서 내 누이를 마중하며 '장미꽃 33송이' 꽃다발을 준 것을 고맙게 생각합니다. '33년만의 상봉'을 의미한다는 장미꽃 33송이…. 생각할수록 묘미가 느껴지는 듯싶습니다. 그 '33'이라는 숫자는 누구라도 헤아릴 수 있는 거지만, 장미꽃 33송이 꽃다발을 준비한 것은, 그가 시인이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그 시인 친구는 "세레나 덕에 인천공항에서 누님도 33년 만에 만나게 되어 일거양득이 되었다"는 말도 내게 하더군요.

인천 공항 입국장에서 뜻밖의 상봉과 함께 꽃다발을 받은 누이는 16일 저녁 가족과 함께 태안 성당으로 미사 참례를 하러 갔을 때도 성당 뜰에서 꽃다발 선물을 받았답니다. 꽃다발을 준 이는 청소년 시절의 그 네 명 친구들 중의 한 명인 이일형씨. 일찍이 아내부터 천주교 신자로 만들고 자신은 몇 년 전에 영세를 받았는데, 태안교회의 재정분과위원장을 맡아 봉사할 정도로 그는 열심한 신자랍니다.

그러고 보니 그 시절 우리 집에 놀러오곤 했던 그 네 명의 친구들 중에서 3명은 이미 예전에 천주교 신자가 되었고, 지역농협의 전무로 일하는 친구만이 '외짝교우(가족들은 옛날에 신자가 되었고)'로 살고 있는데, 생각하면 그들 모두 청소년 시절에 우리 집을 다니며 신앙 가정의 분위기를 접했던 영향이 아닐까 싶어 조금은 흐뭇한 마음이기도 합니다.

시인 친구가 내 누이의 15년만의 귀국을 알게 된 것은 내 '가족 메일' 때문인 것 같습니다. 나는 몇 년 전부터 내 가정을 중심으로 우리 가족의 여러 가지 일들을 알뜰히 기록하여 동생들과 조카들, 생질들과 처제들에게도 알려 주는 일을 자주 꾸준히 하고 있는데, 메일을 보내 주는 사람들 가운데는 몇 명의 친지들도 포함되어 있지요. 그 메일 선물을 그 시인 친구도 고마워하고 있고….

(나는 그 '가족메일'들을 내 홈의 '가족 공동체' 방에 게시하고 있답니다. 일년 전 오늘의 메일을 오늘 올리곤 하는데, 일년 전의 상황을 돌아볼 수 있는 것이 재미있기도 합니다.)

21일 저녁 8시 20분 비행기로 누이가 다시 미국으로 돌아갈 때도 그 시인 친구가 배웅을 나왔습니다. 직장 연가를 미리 얻어놓았다가 16일 아침에 태안에 와서 내 누이와 함께 천수만 등 옛 추억의 장소들을 돌아보고 성묘도 했던 그 친구는 옛 추억들이 다시금 새록새록 그립고 소중해지는 정감 탓에 공항에 오지 않을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오후 5시경 공항에 왔는데, 30여 년 만에 내 가운데 누이동생도 만나는 기쁨을 덤으로 얻었지요.

돌아올 길이 멀어 나는 그 시인 친구에게 누이를 '최종 배웅'하는 일을 맡기고 6시경 가족과 함께 인천 공항을 떠나왔지요. 공항 청사를 나와 '주차 대행업' 청년이 가져다 준 내 승합차에 올라 공항을 떠나올 때 이번에는 누이와 그 시인 친구가 우리를 배웅해 주는 형국이었습니다.

가운데 누이동생을 집에 데려다주러 안산 시내를 달리던 7시 경 그 시인 친구로부터 전화가 오더군요. 세레나 최종 배웅을 잘 했노라는 말….

그 친구의 음성을 듣는 순간, 이미 40년 가까이나 흐르고 있는 우리 청소년 시절의 한 목소리를 다시 듣는 것 같은 기분이더군요. 우리 사이에 알뜰하게 어려 있는 40년 세월의 어떤 결 고운 질감 같은 것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기분이었습니다.

집에 돌아온 후 나는 지난 봄 <태안문학> 10집에 발표된 그 친구의 시편들을 다시 읽었습니다. 그 중의 한 편을 여기에 소개하고자 합니다.


봄날은 간다·4

내가 지금 바다로 가는 것은
네가 그립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 하늘을 보는 것도
네가 그립기 때문이다

봄꽃이 지는 것을 안쓰러워 하는 것도
그 꽃으로 가슴을 채우려는 것도
모두, 네가 그립기 때문이다

손이라도 흔들자
너는 언제나 다가선 만큼 멀리 있고
나는 언제나 네가 사라진 길 위에서
너를 찾는다

눈을 감는다
일제히 일어서는 물밑의 소리
꽃잎이 흐르는 소리

내가 지금 눈을 감고 있는 것은
눈 뜰 수 없을 만큼 네가
그립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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