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 만에 누이가 한국 땅을 밟았습니다

중년의 모습으로 해후한 누이와 나, 그 세월의 흔적들

등록 2003.09.23 13:46수정 2003.09.23 1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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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이라는 시간이 꿈같이 지나갔다. 7일이라는 시간의 처음과 끝은 '동시'였다. 수많은 모든 일들은 동시에 이루어졌고, 금세 아련한 일이 되었다. 그리하여 7년도, 70년도, 우리네 인생이 사는 이승의 그 모든 시간은 그야말로 '찰나'임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미국 사람이 되어 미국 LA에서 살고 있는 내 바로 아래 누이동생이 무려 15년 만에 고국을 찾았다. 9월 14일 이른 아침에 인천 공항에 내린 누이를 안양에 사시는 매형과 누님이 마중을 해주었고, 누이는 고국에서의 첫 하루를 안양에서 지냈다. 다음날 15일 아침에 나는 어머니와 함께 안양에 가서 누이를 만나고 내 승합차에 태워 태안으로 내려왔다.

동생은 나와 어머니를 보는 순간 미국식으로 인사하자며 포옹을 했다. 우리는 어렸을 때 "어제 온 고깃배가 고향으로 간다하기 소식을 전차하고 갯가로 나갔더니 그 배는 멀리 떠나고"라는 노래를 배워 불렀었다. 우리는 그 노랫말이 지니고 있는 사연이나 정감 따위를 일찍이 체득하며 살아온 세대지만, 그 노래처럼 15년 동안 소식 없이 막연하게 지내온 처지는 아니었다. 수시로 전화 통화를 하고, 인터넷이라는 문명의 이기로 자주 소식을 주고받음으로써 마치 태평양이 이웃 간의 담 하나인 것 같은 느낌 속에서 살아왔다.

하지만 15년이라는 시간의 길이는 우리에게 많은 애환을 갖게 하기에 충분했다. 15년이 지나는 동안 우리는 피차 많은 것들을 새로 얻는 동시에 잃었고, 그 잃은 것들을 알게 모르게 그리며 반추할 수밖에 없었으며 서로 많이 변해 있음을 알게 되었다. 60대 중반 짱짱하던 어머니는 팔순 노인이 되었고, 불혹의 나이 속에서 패기와 꿈을 새롭게 가다듬던 나는 어언 50대 중반의 세월을 병고와 싸우며 살아가는 처지가 되었다. 또한 30대 중반 팽팽하던 아름다움을 지녔던 누이동생은 지천명의 세월로 접어든 중년 여인의 모습이었다.

15년이라는 세월이 금세 지나가 버린 것만 같고 짧게만 느껴지는 가운데서도 우리는 15년 세월의 질감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돌아갈 수 없는 날들, 다시 잡을 수 없는 지난날의 그 모든 일들은 점점 더 추억 속으로 멀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상실과 허무라는 이름의 깃발들이 마치 차단 줄처럼 좀더 명확하게 우리 앞에 가로놓여 있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1977년 결혼과 함께 초등학교 교사 생활을 접고 먼 동네 마산에서 신혼 살림을 시작한 누이는 다시 대학에 진학했다. 경남대학교 사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한 다음 누이는 81년부터 일본으로 옮겨가서 살았다. 그리고 몇 년 후에는 미국으로 삶의 자리를 옮겼다. 미국 생활 초기 단계의 어려움 속에서 1986년 아버님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했던 누이는 88년 말 쯤에 겨우 한번 고향을 찾을 수 있었다.


그로부터 15년 만인 2003년에 누이가 다시 고향을 찾은 것은 어머니의 팔순 생신 덕이었다. 그리고 그 길에 남편과 동행을 하지 못한 것은(지난해 가을 남편 혼자 고국을 다녀갔던 것도) 미국에서 올해 88세 미수(米壽)를 지내신 시아버님을 모시고 살기 때문이었다. (누이의 시아버님은 과거 경남대학장을 지내고 일본 경도대학에서 교수 생활을 오래 하신 영문학자 배덕환 박사이시다.)

동생의 몸은 오십 고개를 넘어선 중년 여인답지 않게 가냘프기만 했다. 체중이 40kg 정도라고 했다. 주름이 거의 없는 여전히 아름다운 얼굴과 잘 어울리는 몸매였는데 가리는 음식 없이 이것저것 고루 잘 먹어도 그렇게 살이 찌지 않는다고 했다. 아마도 세밀하고 과도하게 신경을 써야 하는 일에 종사하기 때문인 듯했다.


건강이 좋지 않은 남편과 시아버지 뒷바라지를 하며 살림을 꾸려나가야 하는 누이의 그 조건은 희생, 헌신, 책무 등의 무거운 단어들이 결부되는 삶일 터였다. 거기다가 아이를 갖지 못해 아이 기르는 재미도 누리지 못하고 살아왔으니, 자식이 없는 그 삶 속에는 무미건조함과 삭막함도 어느 정도는 껴들어 있을 터였다. '무자식이 상팔자'라는 말은 얼마나 무미건조하고도 허무맹랑한 말인지….

누이동생은 어머니에 대해 죄스러운 마음도 많이 지니고 있었다. 가난한 집에서 딸자식을 어렵게 대학까지 가르쳤건만 누이는 일찍 사랑에 빠져 버렸다. 결국 친정의 애옥살이를 외면하고 동생 하나도 가르치지 않고 교직도 버리고 멀리 떠나서는 급기야 외국으로까지 내뺀 꼴이 되었으니, 그 죄가 너무도 크다는 얘기였다.

그 얘기는 이미 동생이 몇 년 전부터 편지와 전화로 해온 말이었다. 누이는 그 사실이 너무도 후회되고 가슴 아픈 모양이었다. 언젠가 한번은 내게도 그런 말을 하면서 눈물을 흘리기까지 했다.

나는 누이의 미국 생활, 바쁘고 고달프고 무미건조한 삶을 느낄 적마다 뭔가 억울하고 속상하고, 짙은 연민 같은 것이 가슴을 에는 듯했다. 사람의 진정한 행복이란 평범하고도 소박한 것에 있을 터였다. 출가한 여자가 자식 달고 가끔 친정에도 와서 노닥거리고, 집안 대사에는 꼭 와서 피붙이들과 이리저리 몸을 부딪치기도 하고, 부엌에서 전 부치는 일을 하며 이런 얘기 저런 얘기 중에 부엌문 덜렁거릴 정도로 깔깔거리고 웃기도 하는 그런 삶이 행복의 실체일 터였다.

그런 것들을 하나도 누리지 못한 채, 빼앗기고 잃은 것들이 너무도 많은 상황 속에서 어렵게 이국 생활을 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런 동생을 느끼고 생각할 때마다 나는 괜히 울화가 치밀기도 했다.

그런 오빠를 동생은 오히려 위로하고 달랜다. 뭔가를 과장하거나 숨기지 않고 솔직한 태도를 보이면서도 동생은 늘 남편을 변호하곤 했다. 남편에 대한 사랑이 동생에게서는 전혀 변함이 없었고, 주부, 직장인, 아내, 며느리로서의 책무 역시 동생에게는 여전히 소중하고도 신성한 것이었다.

15년 만에 고국 땅을 밟고 친정에 와서 팔순 생신을 맞은 노모께 자신의 불효를 사죄하면서도 밝은 모습을 보이려고 애쓰는 누이를 나는 더욱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지 않을 수 없었다.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중심을 잃지 않고 꼿꼿한 자세로 살아가는 그 모습이 한편으로는 대견스럽게 보이기도 했다.

태안으로 내려오던 날. 내가 일주일에 한 번씩 가서 여러 집들과 나누어 먹을 물을 길어오는 '해미성지'에 들렀을 때 누이는 성지를 둘러보기만 하지 않고 기도를 했다. 천주교 신자로서 기도하는 습관이 더욱 자연스럽게 배어 있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어머니의 팔순 생신 행사를 치르고 아버님 묘소 성묘를 하고 와서 백화산을 올랐을 때는 태을암 '마애삼존불' 앞에서도, '갑오동학혁명농민군추모탑' 앞에서도 성호를 긋고 기도를 했다. 천주교 신자가 석불과 동학탑 앞에서 성호를 긋고 기도하는 것은 보는 눈에 따라서는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내 눈에는 참으로 아름답고 자연스럽게만 보였다.

태안에는 누이의 초등학교 교사 시절의 제자들이 여럿 살고 있었다. 남자 반과 여자 반이 따로 나뉘어져 있던 시절, 5학년과 6학년의 여학생 반 담임을 맡았을 때의 제자들이었다. 그 제자들 중에는 지역농협의 상무로 일하는 사람도 있고, 유치원을 운영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 제자들이 누이를 납치하다시피 해서는 점심을 대접하고, 학암포와 사구(砂丘)로 유명한 신두리 해변을 구경시켜 주고, 태안에서 제일로 알아준다는 미장원으로 모시고 가서 파마를 시켜주기도 했다.

미장원의 미용사가 누이의 머리를 만져주면서 미용사 생활 20년에 옛날의 제자들이 옛 은사를 미장원에 모시고 와서 파마까지 시켜드리는 것은 처음 본다는 말을 했다나….

누이의 귀국을 누구로부터 전해 들었는지 누이의 제자 중에 수녀가 되신 분에게서도 전화가 와서 누이는 그 제자 수녀님과 오래 통화를 하기도 했다. 나는 누이의 그런 모습을 보면서 누이가 계속 교직에 있었더라면 참으로 많은 인재들을 길러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초등학생 어린 나이의 제자들이 그 시절에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무슨 감화를 받았는지 많은 제자들이 훗날 청소년기에, 또는 어른이 되어 스스로 천주교 신자가 되고 한 분은 수녀까지 되었으니….

일주일이 바람같이 지나고 누이가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는 21일 오후 우리 가족은 모두 인천 공항으로 갔다. 어머니도 동행을 해주셨고, 경기도 안산에서 사는 가운데 누이동생도 아침에 태안으로 내려와서 내 승합차에 동승했다. 공항에서 우선 짐을 부치고 잠시 머무는 동안 여기저기에서 피붙이들의 전화가 많이 걸려왔다. 안양의 생질들과 대전의 막내동생도 아쉬움이 큰 것 같았다. 대전 막내동생 집에는 18일 오후에 가서 하루 자고 왔는데….

나는 누이를 배웅하고 천안으로 내려와서 딸아이의 원룸에서 일박하고 월요일 새벽에 태안으로 돌아올 계획이었다. 내 계획때문에 내 승합차에 동승하지 못한 가운데 동생은 누이를 떠나 보낸 후 백화산에 올라가서 울었다고 했다. 그 얘기를 들려주는 제수씨의 목소리도 온전한 상태가 아니었다.

15년 만에 잠시 귀국했다가 다시 미국으로 떠난 누이는 이렇게 또 한번 모든 피붙이들에게 큰 아쉬움과 슬픔을 안겨주었다. 세상의 모든 형제들이 다 그렇겠지만 우리 형제들은 좀 더 유다른 것 같다. 그것에 관한 특별한 이유야 없겠지만, 우리 어린 시절의 가난과 그 가난 속에서 꽃순처럼 돋아난 소박한 우애가 중요한 이유는 아닐까 싶기도 하다.

옴팡집 비좁은 방에서 한 이불을 덮고 서로 몸 비비며 자고, 한 상에서 머리 부딪치며 밥을 먹고 자란 형제들이기에….

누이와 다시 만날 날을 소망하면서, 누이와 누이 가족들의 건강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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