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년 외길' 철도원의 특별한 꿈

[새벽을 여는 사람들 44] 신현두씨의 열차 안전점검 인생

등록 2003.10.20 11:06수정 2003.10.20 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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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석

"이제 겨우 18년밖에 안 됐는데요."


열차를 관리하는 부서는 크게 전기반, 기관반(엔진), 대차반(주행)으로 나뉜다. 신현두(38)씨는 대차반을 거처 전기반에서 일하고 있는 18년차 철도원이다. 2교대 근무로 48시간을 하루 삼아 살고 있는 그에게 일년은 '6개월'에 불과하다.

"남과 다른 게 있다면 이틀 단위로 하루를 산다는 것뿐이죠. 그래서 그런지 한 달이, 일 년이 너무 빨리 지나가 버려요. 잠깐 눈을 몇 번 떴다 감는 사이 어느 덧 시간이 가버리고 없네요."

철도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철도원으로 외길 인생을 달려 왔다. 철도길 옆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던 그에게 열차는 아주 오래 전부터 자연스런 일상이었다. 철도원 외에 다른 길을 생각해 본적이 없던 신씨에게 열차는 그의 인생이자 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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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석

일과를 마친 열차가 그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하루에 11대의 열차가 그의 전기 점검을 거쳐 운행을 시작하고 마감한다. 열차에게 전기란 사람에게 있어 공기와 같다. 열차가 달리는 데 있어 모든 부분이 똑같이 중요하지만 전기 없이는 열차도 호흡할 수 없다.

"뭐니 뭐니 해도 안전이 제일이죠. 몇 번을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 게 바로 고객의 안전입니다. 어찌 보면 그저 개인적인 직업에 불과하기도 하지만 결국 제 일이 고객의 안전에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면 그 어느 것 하나도 소홀히 할 수가 없어요. 열차는 다름 아닌 우리 국민의 발이잖아요. 열차를 이용하는 고객이 없으면 우리 또한 여기서 일할 필요가 없는 거죠."


신씨는 자신의 일이 곧 국민의 안전과 행복으로 이어짐에 보람을 느낀다고 한다. 다행히 18년간 그의 손을 거쳐간 열차 가운데 아직까지 사고를 일으켰던 열차는 없었다. 이에 신씨는 밤이슬 젖은 안전모를 쓰다듬으며 그간의 무사고가 가장 큰 자부심이라 당당히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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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석

"천재지변을 제외하고 열차를 정해진 철로를 따라 제대로 운행한다면 사고 날 이유가 없어요. 단, 사람이 아니라 기계이기에 의외의 불가항력적인 부분이 있긴 해요. 바로 그 부분을 최소화 하기 위해 사람이 끊임없이 점검하고 관리해야 하는 거죠.


인재로 인한 사고는 절대 발생해선 안돼요. 인재란 '사람이 제 할 몫을 하지 않아 생기는 사고'잖아요. 사람들이 맡은 바 책임을 다 한다면 인재로 인한 사고는 결코 일어나지 않겠죠."

가끔 밥 먹을 때도 안전모를 쓰고 먹는다고 너스레를 떠는 신씨에게 '고객의 안전'은 그의 신념이자 철학이었다.

어린 시절 "너 커서 뭐가 되고 싶니?"라는 질문은 어느 덧 성인의 문턱에 들어서면 "넌 꿈이 뭐였어?"라고 바뀌어진다. 어린 시절을 함께 했던 수많은 소년들은 흔히 한번쯤 '-사' 자 가 들어가는 직업과 '대통령'을 꿈꾸곤 했던 것 같다.

그러나 신씨는 "유명하고 큰 사람이 되는 것 보다는 그저 무슨 일을 하든 열심히 최선을 다 하는 것"이 꿈이었노라 말한다. 이어 그는 "조금 더 욕심을 낸다면 한 분야에서 인정 받아 다른 이들을 이끌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너무 소박하고 평범하죠. 이거 재미없어서 어떡하죠?(웃음) 꿈이 다른 사람에 비해 별로 특별한 게 없는데…."

신씨는 특별한(?) 꿈이 없었음에 멋쩍어 했다. 하지만 그는 특별했다. 18년간 일하면서 그 능력을 인정받아 남보다 빨리 팀원의 반장으로 임명돼 22명의 직원들을 보란 듯이 잘 이끌고 있다. 행하지 못하고 지키지 못하는 '말'만 난무하는 시대. 자신의 위치에서 책임을 다하는 신씨의 모습은 그 누구보다도 특별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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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석

지난 밤의 단잠을 뒤로 세수를 마친 열차가 장거리 여행의 채비를 갖추려 한다. 신씨는 열차의 낭만이 예전 같지 못함에 아쉬워하면서도 문명 발달의 한 증거라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지금은 상상도 못하겠지만 예전엔 5-6시간을 그냥 서서 다니곤 했어요. 그래도 전혀 피곤하거나 짜증을 느낀 적이 없어요. 오히려 열차를 탄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겁고 행복했죠. 어르신들이 오면 자리도 비켜주고 모두가 너나 할 것 없이 열차를 타고 싶어했던 시대였으니까요.

하지만 지금은 다른 교통 수단의 발달로 열차 이용률도 많이 줄었고 또 사람들의 인심도 같이 줄어든 것 같아요. 배고픈 시절에 삶은 계란을 서로 나눠 먹던 인심이 이젠 혼자 마시는 맥주로 바뀐 것 같아요. 씁쓸하긴 하지만 그만큼 우리의 생활 수준이 발달했다는 증거인 것 같기도 해요."

문명의 발달과 사람들의 온기가 동시에 비례 할 수는 없을까. 시원하게 뚫린 고속도로와 어디든 달릴 수 있는 자가용을 얻기 위해 우리는 너무 비싼 대가를 지불하는 건 아닐지. 열차의 기적 소리만으로도 그저 가슴이 뛰었던 시간이 점점 '추억'으로 아련해지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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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석

신씨는 국민의 발이 되어 달릴 열차를 위해 마지막 새벽 점검에 들어간다. 가을을 좋아하는 그는 뜨거운 입김을 내뿜으며 짧은 가을을 아쉬워했다. 어느 덧 시린 목이 허전한 겨울이 은근 슬쩍 찾아왔다.

사람도 겨울엔 감기를 앓듯 열차도 겨울이 되면 특별 점검에 들어간다. 다른 때보다도 더욱 안전에 민감해지는 시기가 다름 아닌 겨울이다. 신씨 또한 가장 고된 시기를 겨울로 뽑으면서도 "제 생활입니다!" 라는 말로 쏟아지는 새벽잠을 쫓았다.

"10%가 부족해요. 바로 가족이죠."

자신의 일에 90% 만족한다는 그는 가족과 많은 시간 같이 있지 못함에 10%의 불만족을 표했다. 회사에 있는 시간이 많아 오히려 가족보다 동료와 더 친하다는 그는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장난감이 '열차'라며 너털웃음을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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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석

"아직 아이들이 어려 제가 정확히 무슨 일을 하는 지는 몰라요. 그냥 지들이 좋아하는 '열차'에서 일하는 것만 알죠.(웃음) 아무리 제가 열심히 일해도 주위에서는 간혹 그렇게 보지 않는 분들이 있어요. 소위 '기름때 묻히고 일하는 사람'이라는 선입견으로 보는 이들이 있죠.

하지만 전 남들이 뭐라고 하든 신경안써요. 나중에 우리 아이들이 저처럼 기름때 묻히고 일 한다 해도 적극적으로 밀어줄 겁니다. 전 자부심과 보람을 느끼기에 일을 해요. 비록 가족과 많은 시간을 같이 하지는 못하지만 저 또한 가족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대한민국의 여느 아버지와 같음을 당당히 말할 수 있습니다."

신씨는 세상이 자기 마음과 같지 않을 수도 있다고 담담히 말했다. 하지만 그는 무엇보다도 '맡은 바 최선을 다하고 있는 자신의 신념'이 가장 중요하다며 주변의 시선은 문제 될 것이 없다고 일축했다. 덧붙여 일을 찾아 방황하는 이들에 비해 건실히 일하고 있음에 '충분히 행복한 사람'이라는 고백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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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석

그의 일은 열차의 전기 점검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열차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좌석 및 화장실을 점검하는 등 그의 손길이 머물지 않는 곳이 없다. 요즘 신씨에게는 고민이 하나 있다. 철도청이 공사로 넘어가는 과도기인지라 그는 미래의 불투명에 불안해 했다.

"요즘 사회 분위기가 다 그렇잖아요. 금방 회사가 무너지고 또 명예퇴직 당하고. 과연 그 누군들 열심히 일하지 않았겠어요. 철도청도 공사화되면서 다른 곳처럼 정리해고 당하는 사람이 생길까 걱정이 돼요.

하지만 미래에 대한 불안은 비단 저 혼자만의 문제는 아닌 것 같아요.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직장인라면 누구나 다 가지고 있는 고민이겠죠. 피할 방법은 없고 무슨 일을 하든 성실히 근면하게 일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지 않을까요?"

신씨는 정년퇴직 하는 그 순간까지 철도청에 남아 있고 싶다고 나지막이 읊조렸다. 한편 내년에 개통될 고속 철도에 대한 기대감이 그의 불안감을 지우고 있었다. 새롭게 운행될 고속 철도로 발령이 예정된 그는 "계획대로 되면 좋지만 꼭 그렇게 되는 건 아니잖아요"라고 하면서도 상기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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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석

"아휴… 얼굴에 잡혔던 주름이 그냥 쫘악 펴지는 느낌이죠.(웃음) 모든 직장인들에게 물어봐도 저랑 심정이 똑같을 걸요. 공기부터가 상쾌해요."

24시간 근무를 마치고 퇴근하는 오전 9시. 신씨는 하루 중 이때가 가장 행복한 순간이라며 장난스런 미소를 짓는다. 그 미소엔 "아빠 오는 날"이라며 손꼽아 기다리고 있는 아이들의 환영 인사와 온 가족이 모여 먹는 따뜻한 식사의 기대감이 서려 있다.

남들이 쉬는 '빨간 날'일수록 더 분주히 일해야 하는 아빠를 이해하고 기다려주는 아이들과 아내를 만나기 위해 그의 발걸음이 분주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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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석

"전 어릴 때부터 라면을 참 좋아했는데 라면을 잘 먹으면 철도원 체질이래요.(웃음) 밤에 야식으로 먹는 그 라면의 꿀맛은 먹어 보지 않는 사람이라면 상상도 못 해요. 앞으로 바람이 있다면 제가 하는 일이 열차 기술 발전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됐으면 하는 거예요. 덧붙여 열차를 이용하는 고객들의 충고도 부탁드려요. 그 분들이 있어야 결국 우리도 발전하며 같이 살 수 있는 거잖아요."

도심을 향해 달리며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을 뒤로 그는 고단한 지난 밤을 달래기 위해 하루를 마감하려 한다. 신씨는 누차 자신을 그저 '평범하고 소박한 사람'이라고 강조했지만 그는 자신의 인생과 꿈을 책임 질 줄 아는 특별한 사람이었다.

"자신의 위치에서 맡은 바 최선을 다 할 것!"

너무 평범해서 누구나 할 수 있는 말과 행동 같지만 과연 실제로 이를 지킬 수 있는 이들은 얼마나 될까. 남들이 쉬이 간과해버리는 작고 평범한 신념을 신씨는 끝까지 지켜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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