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는 그 곳으로 끌려가지 않으리!"

영화 속의 노년(61) : 〈토끼 울타리〉

등록 2003.10.27 10:58수정 2003.10.27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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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인들의 손에 손녀들이 끌려가고 난 자리에 주저앉아 할머니는 돌멩이를 들어 자신의 머리를 치고 또 친다. 아이들 어미가 울부짖는 옆에서 찢어지는 가슴을 어찌할 수 없어, 피가 나도록 자기 머리를 돌로 치고 또 치는 할머니의 얼굴에는 눈물조차 말라붙어 있다.

비록 백인들의 배급을 타먹고 살 수밖에 없는 신세지만, 외손녀 몰리, 그레이시, 데이지와 사냥을 나가면 앞장 서 달리는 큰손녀가 서두르다가 동물들 발자국마저 지워 버릴까봐 조바심 치며 뒤를 따르던 건강한 할머니이시다.


호주의 서부 지가롱. 원주민들을 격리 수용하기 위해 호주의 북쪽과 남쪽을 가로지르는 '토끼 울타리'가 세워지고, 백인들의 우월한 피로 원주민들의 피를 희석시켜야 한다는 말도 안 되는 명분 아래 백인들은 혼혈아들을 하녀나 농장 일꾼으로 훈련시키려고 엄마에게서 강제로 떼어내 보호소에 수용한다.

'토끼 울타리'를 만드는 사람이었던 백인 아버지가 떠나고 엄마와 살던 몰리와 데이지도, 사촌 그레이시와 함께 하루아침에 엄마에게서 떼어져 멀고 먼 보호소로 끌려간다. 보호소의 아이들은 너무 멀리 떠나왔기에 어느 쪽이 고향인지, 어디로 가야 엄마가 있는지도 모른 채 하루하루 살아간다.

그러나 열 네 살 몰리는 도저히 엄마를 잊을 수 없었다. 도망치다 잡혀와 창고에 갇혀 매를 맞는 친구의 울음소리도 몰리의 탈출 결심을 막지는 못한다. 몰리는 결국 사촌 동생 그레이시와 여덟 살짜리 친동생 데이지를 데리고 도망을 친다.

쏟아지는 비가 발자국을 지워주고, 시냇물이 흔적을 삼켜버릴 것을 아는 똑똑한 몰리는, 도망친 아이들을 귀신같이 찾아내는 원주민 '개코'의 추적을 따돌리며 용케 걸음을 이어나간다.

아이들은 그저 엄마가 보고 싶어 엄마가 있는 집에 가고 싶을 뿐이다. 그 아이들을 잡기 위해 벌이는 백인들의 계획과 추격은 참으로 잔인하며 야만적이다. '토끼 울타리'를 따라가면 엄마가 있는 집이 나올 거라는 희망 하나에 목숨을 걸고 세 아이는 걷고 또 걷는다.


아이들이 보호소를 탈출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 날부터 엄마와 할머니는 '토끼 울타리'에 손을 얹고 날이면 날마다 하염없이 아이들을 기다린다. 그 때 들려오는 할머니의 구음(口音)이 어찌나 슬픈지, 편안한 극장 의자에 앉은 내가 목이 메고 눈물이 흐른다.

자식을 어미에게서 억지로 떼어놓으면서도 '이것이 다 그들 자신을 위한 일이란 것을 알아주면 좋겠다'고 말하는, 경찰에게 아이들을 잡아 오라 명하는 양복 입은 하얀 얼굴이야말로 악마의 얼굴에 다름 아니다.


쫓기는 두려움과 배고픔에도, 투정부리는 어린 동생을 안아주고 업어주며 길을 가고 또 가는 몰리. 그 아이를 그렇게 강하게 만든 것은 무엇이었을까. 엄마가 '영혼의 새'라며 늘 너를 지켜줄거라 가르쳐 주던 새. 그 새를 떠올리며 몰리가 본 것은 바로 자유였으리라.

엄마와 딸의 본능적인 끌림이었을까. 험한 길에서 여러 날 굶은 아이들은 사막에 이르러 목숨이 위태롭지만 끝내 그 곳, 엄마가 있는 집에 다다른다. 무려 9주 동안을 걸어 아이들이 온 것이다. 사촌 그레이시는 같이 오지 못했다.

아이들을 잡으러 온 경찰과 어둠 속에서 마주한 엄마는 처음으로 그를 향해 똑바로 창을 겨눈다. 그 창 끝에는 말할 수 없는 분노와 슬픔과 증오가 맺혀있어 마치 피가 뚝뚝 떨어져 흐르는 것 같다.

손녀들과 늘 함께 살았던 할머니는 아이들이 끌려간 자리에도, 아이들을 기다리는 그 자리에도 엄마와 함께 계신다. 딸이 자신의 딸을 빼앗기고 몸부림치는 것을 지켜보며 할머니는 차라리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고 또 내어놓고, 열 번도 더 내어놓고 싶으셨으리라.

몰리의 간절함과 엄마의 애끓는 기다림은 이미 엄마의 엄마인 할머니에게서 시작된 것. 돌멩이로 자기 머리를 쳐 피 흘리던 할머니의 애통함은 결국 그들이 다시 만날 때까지 결코 포기하지 않게 만든 사랑과 그리움의 씨앗이 되었으리라.

열 네 살 몰리가 자라 결혼한 후에도 다시 보호소로 끌려갔다가 탈출하고, 결국 막내딸 안나벨라는 그들에게 빼앗기고 말았다는 그 후의 이야기가 이어지는 동안 화면에는 주름이 가득하고 걸음도 잘 걷지 못하는 몰리 할머니와 데이지 할머니의 얼굴이 나타난다.

몰리 할머니는 이제 다시는 그 곳으로 끌려가지 않을 거라고 말하지만, 몰리가 자라서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할머니 나이에 이를 때까지 계속되었던 그 길고 긴 아픔을 생각하면 참으로 슬프다. 화가 난다.

황량한 호주의 사막 풍경에, 맨발에 운동화 하나 달랑 신고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지친 걸음을 걷는 아이들의 새처럼 가는 다리가 겹쳐지면 호주라는 나라가 정말 싫었다. 그 넉넉하고 살기 좋아 보이던 나라가 말이다.

슬프고 눈물나는 이야기가 펼쳐지는 극장 객석에는 단 두 사람, 열심히 팝콘과 콜라를 먹고 마시느라 부스럭대는 한 남자가 있었고, 훌쩍거리는 내가 있었다. 요즘은 워낙 인기 있는 영화만 집중적으로 여러 곳에서 상영하기 때문에, 보고 싶은 영화를 아차 하는 순간에 놓치기 십상이다.

몰리가 걸었던 9주 동안의 걸음을 같이 걸으면서 가슴도 먹먹했고 다리도 아팠지만, 간절함은 우리를 살아있게 하는 힘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힘의 밑바닥에는 세상의 어머니와 할머니가 계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가슴에 새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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