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오늘부터 여자!"

영화 속의 노년(62) : 〈내가 여자가 된 날〉

등록 2003.11.03 19:12수정 2003.11.04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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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에 언 땅을 뚫고 뾰족하게 얼굴을 내미는 새싹처럼 딸아이의 가슴도 처음에는 정말 뾰족한 몽우리가 잡혔다. 1년 반쯤 흐른 것 같은데, 목욕탕에서 때를 밀어주면서 슬쩍 내 손을 갖다 대니 제법 도톰하게 손안에 들어온다.

전에 목욕을 마친 아이가 발가벗고 아빠 앞을 마구 뛰어다니면 "다 큰 녀석이…"하고 기막혀 하며 웃는 남편에게, 조금 있으면 저절로 가릴 것 가리게 되고 그러면 영영 아빠는 딸의 저 어리고 예쁜 속살을 볼 수 없을 거라고 이야기하곤 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건만 아이는 정말 이제 더 이상 아빠 앞에서 옷을 갈아입지 않는다.


영화〈내가 여자가 된 날〉은 세 여자의 이야기이다. 첫 번째 주인공은 아홉 살 하버. 아홉 살이 되는 생일 아침, 할머니는 '넌 오늘부터 여자!'라 선언하시고는 매일같이 어울려 놀던 남자 친구 하싼마저 대문간에서 쫓아버리신다. 시장에 다녀온 엄마는 차도르라 부르는 검은 천을 사 가지고 와서는 머리에 씌워보며 치수를 재느라 분주하다.

나가 놀지 못하게 하는 할머니를 졸라대서 얻어낸 시간은 딱 한 시간, 나무 막대기의 그림자가 없어지는 12시까지만 허락을 받는다. 야금야금 그림자는 자꾸 줄어드는데, 같이 놀아야 할 하싼은 숙제를 다 하지 못해 그만 집에서 나올 수 없는 신세가 되고 만다.

두 번째 이야기의 아후는 차도르를 쓴 다른 여자들과 함께 내내 자전거의 페달을 밟는다. 말을 타고 쫓아온 남편은 그 '악마의 말'에서 내려올 것을 명령하고 그렇지 않으면 이혼이라고 협박한다. 심지어 친척들과 오빠들까지 나서서 이혼은 가문의 수치라고 소리를 지르며 계속 뒤를 따른다.

검은 차도르의 여인들이 바다를 따라 난 길을 자전거로 달릴 때, 남자들은 웃통을 벗고 말을 탄 채 위협적으로 달려든다. 버티고 버티다가 자전거에서 내리는 아후, 자전거를 빼앗긴 아후의 모습은 저 멀리로 자꾸 밀려난다.

마지막 여자는 할머니인 후러. 다리가 아파 제대로 걷지도 못하면서 온갖 살림살이를 장만하러 돌아다닌다. 손가락 마디마디에는 갖가지 색깔과 무늬의 천 조각들이 매듭져 묶여 있다. 할머니는 사고 싶은 물건을 한 가지씩 살 때마다 그 매듭을 하나씩 풀어버린다.


평생 내 것을 가져보지 못했다는 할머니는 이제 혼자가 돼 상속받은 돈으로 냉장고며, 침대며, 욕조며, 주전자까지 물건을 사고 또 산다. 그런데 그 물건을 펼쳐 놓는 곳은 다름 아닌 바닷가 모래밭.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한 하얀 모래밭에 온갖 살림살이가 자리를 잡는다.

모래밭 소파 위에서 차를 마시려던 할머니는 옆을 지나가던 여자들이 나누는 아후 이야기를 스치듯 듣는다. 그리고 저 먼바다에 떠있는 큰배를 향해 돛단배에 물건을 싣고 할머니가 떠날 때 바닷가에는 아홉 살 하버가 배웅이라도 하듯 나와 서있다. 하버와 아후와 후러, 서로 알지 못하지만 세 여자는 이렇게 이어져 있다.


앞으로 다시는 어울려 놀지 못하게 될 하버와 하싼 두 아이가 창살을 사이에 두고 나눠 먹는 버찌는 어찌 그리 새콤하고, 하나 뿐인 막대 사탕은 어찌 그리 달콤한지 모른다. 하루아침에 남자와 여자로 갈라서게 된 연유를 알지 못하는 아이들의 맑은 눈동자는 그래서 더더욱 안타깝다.

하버가 두르고 있던 스카프는 바닷가에서 나무 조각과 빈 드럼통으로 배를 만들던 아이들의 돛이 되고, 12시가 넘자 하버의 머리에는 어김없이 검은 차도르가 씌어진다. 그 차도르는 그대로 아후에게로 옮겨진 것. 자전거에서 내려와 제 자리로 돌아오라는 남자들의 위협은 아후의 등뒤를 떠나지 않는다.

차도르에 갇힌 인생이 후러처럼 할머니가 되고, 남편이 떠난 후 홀로 되어서야 자유로워지는 것일까. 그 자유는 후러 할머니의 손가락에 매었던 매듭이 하나씩 풀려가듯 그렇게 인생의 맨 끝자락에서야 비로소 얻어지는 것일까.

하얀 웨딩 드레스까지 사서 바닷가에 걸었던 할머니는 그러나 마지막 매듭 하나는 무엇을 사기 위한 것이었는지 끝끝내 기억해 내지 못한다. 정말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비록 그 매듭을 풀지는 못했지만 배에 올라타고 떠나는 할머니의 모습은 너무도 자유롭고 유쾌하다.

집에 와서 아홉 살 생일이 되면 검은 차도르를 써야 하고, 남자 친구와 놀아서도 안 되는 나라의 여자 아이 이야기를 해주니, 열 한 살 둘째는 그저 "머리에 그거 쓴 거 텔레비전에서 봤는데 너무 답답하겠더라" 간단히 넘기고 만다.

그러나 비록 우리가 지금 머리에 차도르를 쓰지는 않지만, 웃통 벗은 말 탄 남자들이 따라 오는 속에서 자전거 바퀴를 밟으며 달리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비록 그들이 대놓고 자전거에서 내려오라고 소리치지는 않지만 말이다.

그래서 후러 할머니가 더 자유로워 보였는지도 모르겠다. 애써 사들인 물건들이 출렁이는 바닷물에 잠겨 들어가 다 잃어버리게 되는 일이 벌어진다 해도 할머니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것 같다. 손가락에 묶은 매듭을 풀 듯이 하고 싶은 일을 해봤으므로.

아홉 살 생일에 차도르를 씀으로써 여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또 자전거에서 내려와야 여자인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와 욕구를 생생하게 느끼고 누릴 때 진정 여자인 것을 세상이 모르고 있을 뿐이다.

후러 할머니는 처음으로 자신이 여자임을 그리고 인간임을 느끼며 손가락의 매듭을 하나씩 풀어나갔을 것이다. 그래서 영화 속 세 여자는 얼굴도 이름도 다 다른 사람이지만 어쩌면 한 사람인지도 모른다.

(내가 여자가 된 날, 2000 / 감독 마르지예 메쉬키니 / 출연 퍼테메 체럭어하르, 샵남 톨루이, 아지제 세디기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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