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강은 직선으로만 흐르지 않는다

등록 2004.03.13 14:54수정 2004.03.13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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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내 제1당인 한나라당과 제2당인 민주당의 공조는 더욱 거대한 몸피를 과시하며 참으로 '위대한' 일을 했다. 그들은 대한민국 헌정사상 초유의 대통령 탄핵소추라는 엄청난 일을 해냈다.


지난 4년 동안 국회의원 명색으로 앉아서 이 나라를 위해서 한 일이 도대체 뭘까? 구린내만 천지 사방에 풍겨온 그들이 임기를 한 달도 남겨놓지 않은 시점에서 국민이 뽑은 대통령, 임기 5분의 1을 겨우 넘긴 대통령의 권한을 정지시키는 참으로 놀랍고도 불가해한 거사를 '성공'시켰다.

그들은 지금 골리앗의 자만적 쾌감에 젖어 있다. 자신들의 놀라운 능력 발휘가 가져온 승리감에 도취해 있다. 오늘의 거사를 자축하는 축배를 들면서도 온갖 그럴 듯한 명분으로 자신을 분식하느라 바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들이 의회민주주의의 승리니, 헌정질서 확립이니 따위의 말까지 차용하는 그 수사적 명분들 속에는 참으로 오묘하고도 엄청난 역설과 아이러니가 함유되어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행동과 말속에 뱀 똬리처럼 서려 있는 역설과 아이러니의 실체를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다. 아니, 그것을 인식하지 않으려고 하거나 애써 부정하려고 발버둥을 치고 있다.

그들은 대한민국 역사의 한 페이지 안에 더욱 도드라지고 풍성한 장식물로 존재하게 되었다. 그들의 말과 행위들은 낱낱이 기록이 되어서, 그들이 역사의 장대한 물굽이 안에서 어떤 요철 구실을 했는지, 역설과 아이러니의 실체 속에서 그 누추한 모습들은 두고두고 재생이 될 것이다.

오랜 세월 독재권력에 빌붙어서 이 나라의 민주주의를 탄압하며 역사의 진전을 방해해왔던 그들은 그들이 그토록 부정하고 훼방했던 민주화의 과실을 오늘날 누구보다도 많이 누리게 되었다. 그리고 그 민주주의의 과실로 말미암아 민주화의 험난한 길을 헤쳐온 노무현 대통령을 도리어 징벌(?)하는 묘한 일까지 감행할 수 있었다.


그들에게는 본디 수치심이라는 것이 없다. 독재권력에 빌붙어서 민주주의를 억압할 때도 아무런 부끄러움이나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듯이, 오늘날 민주주의의 힘을 덤으로 얻어 누리고 행사하는데도 아무런 면구스러움을 느끼지 않는다. 그러니 조국의 자유민주주의를 위해 험난한 길을 헤쳐온 사람들과 역사의 진전에 대해 일말이라도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턱이 없다.

한때는 민주주의를 위해 싸운다고 했던 일부 사람들도 사실은 탐욕과 정치권력이 목표였다. 그렇기에 그들은 민주와 반민주가 첨예하게 구도를 이루던 시절 자신들을 탄압하고 핍박했던 독재권력의 화신들과도 쉽사리 손을 잡고 뒤엉켜 보조를 맞출 수가 있었다. 도저히 함께 어울릴 수 없을 것 같던 두 부류의 사람들이 기막히게 화합하고 일치하는 모습을 보면서 사실은 그들이 똑같은 부류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나는 한때 민주당의 분당 사태를 보면서 민주당 잔류파 쪽에 좀더 올바른 명분이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왜 더욱 결집시켜야 할 정치적 기반을 양분시켜 거대 야당의 힘을 배로 키워주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신당을 부정하고 민주당을 두둔하는 글을 쓴 적도 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이미 기득권의 아류가 되어버린 낡은 구시대 정치인들의 실체를 보게 되었다. 경선으로 뽑아놓은 후보를 여론 지지율이 조금 떨어진다고 마구 흔들어댔던 사람들을 포용하지 못해서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낡은 관습과 부패로 찌든 그들을 껴안고서는 개혁의 길이 온전할 수 없으리라는 것, 호남인들의 높은 정치의식을 따라가지 못하는 그들을 떨구지 않고서는 우리가 이 시대에 기필코 시급히 극복해야 할 지역 구도를 도저히 깰 수 없으리라는 것 등을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너무 심한 말일지 모르지만 나는 그들에게서 천박한 창녀의 모습을 본다. 아무리 헤어진 사람이 밉다 해도 그렇게 함부로 몸을 팔아서는 안 되는 법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지켜야 할 지조가 있고,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는 것이다.

그들의 그런 천박한 속성을 일찍이 알았기에, 그것으로 말미암아 딴살림이 좀더 쉽게 촉진되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갖는다.

전혀 수치심을 모르고, 자신들의 존재와 행위 안에 도사리고 있는 역설과 아이러니의 기미조차 전혀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에 의해 정말 역설적으로 헌정이 유린되는 사태가 빚어졌다. 야합과 협잡으로 그런 일을 저질러놓고 그들은 의회민주주의의 승리니, 헌정질서 확립 차원이니 하는 강변으로 자신 스스로를 호도한다.

그런데 그들은 정말 아무런 부끄러움이 없을까? 부끄러움이 전혀 없지는 않을 것이다. 부끄러움을 애써 감추고 분식하려는 것이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것의 하나가 70%에 달하는 국민의 비판 여론에 눈감지 못하고 역풍을 걱정하는 낌새다.

하지만 그들은 70%에 달하는 국민의 비판 여론, 그 분명한 역풍 앞에서도 대단히 천연덕스럽다. 그 70%의 수치에도 전혀 당혹감을 갖지도 않고 외려 그 정도는 훤히 예상을 했다는 태도다. 지금 당장에는 비판적 여론이 그 정도로 우세하다 해도 시간이 지나면 차차 수그러들고 종래에는 반전이 될 수도 있다고 보는 것 같다.

대단한 배짱이다. 국민의 비판 여론을 예상했다는 것은, 국민의 심정이나 여론 따위는 안중에 두지 않고 있다는 역설을 포유하는 것인데도 거기에 대한 고민도 없는 것 같다. 그것은 결국 철옹성 같은 30%의 동조 여론이 있으니 걱정할 것 없다, 그 30%의 지지층을 등에 업고 70%의 비판 여론을 허물어뜨리면 된다라는 뜻일 것이다.

그들의 그런 태도를 보며 나는 불현듯 1986년 여름의 한 풍경을 떠올린다. 당시 집권 여당이었던 민정당의 노태우 대표가 대전에서 열린 충남 도당 행사에 참석했을 때의 일이다. 그때는 태퐁 '베리'호가 왔다가 막 물러나고 난 직후였다.

태풍 베리는 예상보다는 큰 피해를 주지 않고 일찍 물러갔다. 막대한 피해를 예상하고 잔뜩 경계를 했던, 특히 피해 예상 지역에 속했던 사람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예상보다 적은 피해를 큰 다행으로 여겼다.

그런데 대전에 와서 도당 행사에 참석한 노태우 대표는 맨 먼저 이런 말을 했다.
"여러분의 열기가 태풍 베리호를 녹여버렸습니다!"

그의 그 말에 행사장을 가득 메운 모든 당원들이 일제히 박수를 하며 온 장내가 떠나갈 듯이 환호성을 올렸다. 그것을 신문 기사를 통해 보면서 나는 얄궂은 공포감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피해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예상보다 적은 피해를 주고 태풍이 일찍 물러간 것이 여간 다행스럽지 않습니다. 이 지방의 피해 주민들께 위안과 용기를 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태풍이 일찍 물러가서 우리가 도당 행사를 차질 없이 치를 수 있게 된 것에 대해서 하늘에 감사합니다."

이런 식으로 말을 하였다면 얼마나 겸손한 태도이며 여유 있고 아름답고 낭만적이기조차 한 모습일까 생각하면서, "여러분의 열기가 태풍 베리호를 녹여버렸다!"고 기염을 토하는 그 박력과 패기와 자신 만만함에 괜히 주눅이 들었던 경험을 나는 잊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태풍까지 녹이면서, 녹이려고 하면서 이 나라를 주름잡아온 사람들이다. 태풍까지 녹이는 능력을 가졌으니 못할 일이 없었고, 그것은 그대로 그들의 관성과 속성이 되었다. 그리하여 민주 세력의 품에 안긴 정권을 되찾으려는 일념으로 지난 대선 때는 천문학적인 대선 자금을 수많은 기업들에서 갈취하고, 그것을 위해 차떼기에다가 채권을 책처럼 보이게 하는 수법까지 동원했던 것이다.

뿐인가, 자신들이 정권을 잡았으면 그 엄청난 불법과 비리들이 땅 속 깊은 어둠 속으로 감춰진 채 이 나라를 계속 그런 부패 악순환의 길로 몰고 가리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단 한번의 성찰도 하지 않고, 철갑을 두른 얼굴로 자신들의 천문학적인 대선 자금 불법 모금액은 손바닥으로 가린 채 노 대통령 10분의 1 발언만을 물고늘어지는 것이다.

하늘의 태풍까지 녹이는 재주와 능력을 지니고 이 나라를 주름잡아온 그들일지라도, 그리고 비록 수치심을 모르는 재주와 능력으로 노무현 대통령의 직무를 정지시키는 국회 탄핵소추를 성공시켰다 하더라도 그것이야말로 일시적인 현상일 뿐이다. 그들은 70%의 비판 여론이 일시적인 현상일 것으로 믿고 기대하지만, 아무리 태풍까지 녹이는 재주를 지녀왔다 하더라도 30%의 지지로 70%의 대세를 녹이지는 못할 것이다.

오히려 탄력을 받은 70%의 대세는 더욱 큰 강물이 되어 역사발전이라는 이름의 배를 더욱 힘차게 떼 메고 나아갈 것이다. 역사의 강물은 직선으로만 흐르지는 않는다. 휘어 돌고 굽이치는 힘으로 스스로 탄력을 만들고 배가시키기도 하면서 유유히 흘러 장강(長江)을 이루고 바다로 나아간다.

진정한 역사 발전과 변혁은 손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가혹한 시련을 필요로 한다. 우리나라 민주주의 발전에도 수많은 피와 땀과 눈물이 있었다. 노무현 대통령도 말했듯이 사람이 아기를 낳으려면 진통을 겪어야 하고, 곤충이 탈바꿈을 하는데도 큰 고통을 치러야 한다.

지난번 글에도 말했듯이 우리는 역사 발전의 전기를 맞게 되었다. 그것을 아예 처음부터 노무현 대통령을 인정하지 않고 사사건건 발목 잡기만을 일삼았던 거대 야당이 만들어주었다. 그 역설과 아이러니가 중요하다. 무릇 역설과 아이러니들은 오묘한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 그 사실이 중요하다.

그래서 나는 오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우리 한국의 거대 야당들, 그들의 불가해하면서도 재미 충만한 교접에 찬사를 보내며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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