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라일락꽃 그늘 아래 - 32회(5부 : 캠퍼스 연가 2)

- 첫사랑은 아픈 거예요

등록 2005.02.21 22:35수정 2005.02.22 0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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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지는 바다
해지는 바다장재훈
검은빛 바다 위를 밤배 저 밤배 무섭지도 않은가 봐 한없이 흘러가네 밤하늘 잔 별들이 아롱져 비칠 때면 작은 노를 저어 저어 은하수 건너가네 끝없이 끝없이 자꾸만 가면 어디서 어디서 잠들 텐가 으음 볼 사람 찾는 이 없는 조그만 밤배야

이번에는 그녀를 위해 불러준 나의 목소리였다. 역시 둘 다섯의 노래 '긴 머리 소녀'였다.


빗소리 들리면 떠오르는 모습 달처럼 탐스런 하얀 얼굴 우연히 만났다 말없이 가 버린 긴 머리 소녀야 눈 먼 아이처럼 귀 먼 아이처럼 조심조심 징검다리 건너던 개울 건너 작은 집에 긴 머리 소녀야 눈감고 두 손 모아 널 위해 기도하리라

이번에는 둘이 함께 불렀던 노래가 흘러 나왔다. 외국곡 '예스터데이' 와 정태춘, 박은옥의 '사랑하는 이에게'였다

그대 고운 목소리에 내 마음 흔들리고 나도 모르게 어느새 사랑하게 되었네 깊은 밤에도 잠 못 들고 그대 모습만 떠올라 사랑은 이렇게 말없이 와서 내 온 마음을 사로잡네 음 달빛 밝은 밤이면 음 그리움도 깊어 어이 홀로 새울까 견디기 힘든 이 밤 그대 오소서 이 밤길로 달빛 아래 고요히 떨리는 내 손 잡아주오 내 더운 가슴 안아주오

이 노래가 바로 우리의 수상작이었다. 음악을 듣고 있자니 뜻 모를 눈물이 창밖의 빗물처럼 흘러내려 두 볼에 강을 이루고 있었다. 터져 나오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어 그만 끌까 하여 손가락을 녹음기에다 가져다 댔다.

그러나 차마 정지 버튼을 누를 수가 없었다. 정지‥‥ 그 버튼을 누른다는 것은 요절한 그녀를 또 한 번 요절시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자책감이 일었기 때문이었다. 계속해서 녹음기는 그녀와 내가 함께 불렀던 노래들이 흘리고 있었다.


'사랑이여, 나뭇잎 사이로, 장밋빛 스카프' 등 대중가요와 '실로암, 사랑, 왜 날 사랑하나, 사랑의 송가, 평화의 기도' 등 복음성가, 그리고 'TONIGHT, TO YOU, WHEN A MAN LOVES A WOMAN, I'D LOVE YOU TO WANT ME' 등 팝송이 마치 코를 통해 산소가 들어오듯 귀를 통해 내 몸으로 흘러들고 있었다.

앞이 뿌옇게 물안개가 핀 것 같아, 손으로 눈물을 닦았다. 그리고는 무심코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눈물의 홍수로 위험수위를 넘어버린 작은 호수 안에 환영처럼 그녀가 있었다. 문득 윤동주의 '소년'과 '눈 오는 지도'라는 시가 떠올랐다.


여기저기서 단풍잎 같은 슬픈 가을이 뚝뚝 떨어진다. 단풍잎 떨어져 나온 자리마다 봄을 마련해 놓고 나뭇가지 위에 하늘이 펼쳐 있다. 가만히 하늘을 들여다보려면 눈썹에 파란 물감이 든다. 두 손으로 따뜻한 볼을 쓸어보면 손바닥에도 파란 물감이 묻어난다.

다시 손바닥을 들여다본다. 손금에는 맑은 강물이 흐르고, 맑은 강물이 흐르고, 강물 속에는 사랑처럼 슬픈 얼굴-아름다운 순이(順伊)의 얼굴이 어린다. 소년은 황홀히 눈을 감아 본다. 그래도 맑은 강물은 흘러 사랑처럼 슬픈 얼굴-아름다운 순이의 얼굴은 어리다.

順伊가 떠난다는 아침에 말 못할 마음으로 함박눈이 내려, 슬픈 것처럼 창 밖에 아득히 깔린 지도 위에 덮인다.

방안을 돌아다보아야 아무도 없다. 벽과 천정이 하얗다. 방안에까지 눈이 내리는 것일까. 정말 너는 잃어버린 역사처럼 홀홀히 가는 것이냐. 떠나기 전에 일러둘 말이 있던 것을 편지를 써서도 네가 가는 곳을 몰라 어느 거리, 어느 마을, 어느 지붕 밑, 너는 내 마음 속에만 남아 있는 것이냐,

네 쪼고만 발자욱을 눈이 자꾸 내려 덮어 따라갈 수도 없다. 눈이 녹으면 남은 발자욱 자리마다 꽃이 피리니 꽃 사이로 발자욱을 찾아 나서면 일 년 열두 달 하냥 내 마음에는 눈이 내리리라.


초희는 나와의 관계가 나빠지면서 소월과 동주, 그리고 이상과 김유정의 작품들이 자꾸만 좋아진다고 말했다. 그 때는 바보처럼 그 의미를 눈치 채지 못했다. 황순원의 소설 '소나기'에서 소녀가 보랏빛을 좋아하여 병으로 세상을 등진 것처럼, 수를 누리지 못한 시인이나 작가를 좋아하면 그들처럼 요절할 수도 있다는 것을‥‥‥.

나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녀가 소월이나 동주, 그리고 이상과 김유정의 작품이 좋아 그들의 문학세계에 탐닉했거니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대학원에서 그녀가 좋아하던 작가들을 본격적으로 연구하다 보니,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 때 그녀의 참뜻을 알았어야 했는데', 나는 소설 '동백꽃'과 '봄봄'에 나오는 남자 주인공처럼 숙맥이라서 그녀의 마음을 읽어내지 못했던 것이다.

이제는 내가 소월이나 동주의 문학이 좋다. 한 때는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 육사처럼 온몸을 던져 저항하지 못하고, 왜 그렇게 못난이처럼 나약한 감상주의에 빠져 소극적으로 대처했던가? 역사를 외면한 문학은 문학이 아니다.

팔봉 김기진, 회월 박영희, 김수영, 신동엽, 김지하, 박노해 시인처럼 현실 참여적인 문학만이 참다운 문학이라며, 두 눈에 힘을 주어 날카로운 비판의 칼날을 들이대던 내가, 그러던 내가 지금은 그녀가 좋아하던 시인들이 점점 좋아진다.

대체 왜 일까? 나도 이제 변화를 싫어하고 혁명을 기피하는 기성세대가 되어 간다는 징조일까? 아니면 나도 이제 그녀의 곁으로 갈 때가 다 되어 간다는 신호일까?

이번에는 사진첩을 꺼내들었다. 거기에는 대학 1학년 때 충북 화양계곡에 갔던 일부터 시작하여 계룡산, 덕유산, 서대산, 대둔산 등반, 그리고 가요제 시상식 장면, 영탑지와 백마상 등 캠퍼스를 누비고 있는 모습, 만수원과 보문산에로의 산책, 논산 저수지에서 찍은 사진, 천수만에서 철새들을 배경으로 찰칵했던 낭만, 전남대에 함께 갔을 때 광주에서 찍은 사진‥‥‥ 등 그녀와의 추억이 생생한 모습으로 그렇게 남아 아직도 꿈틀거리고 있었다.

사진 속의 그녀는 늘 웃고 있었다. 하나도 그늘지거나 찡그린 것이 없었다. 그녀는 무엇이 좋아 저렇게 늘 하얀 이를 드러내며 해맑게 웃고 있었던 것일까? 주마등같은 사진첩을 한 장씩 넘길 때마다 그녀와의 일들이 기어 올라와 나의 폐부를 찌르고 있었다. 뾰족한 바늘처럼.


* 독자 여러분의 사랑에 감사드립니다. 33회에서 계속됩니다.

덧붙이는 글 | 리울(아호: '유리와 거울'의 준말) 김형태 기자는 신춘문예 출신으로 시와 소설을 쓰는 문인이자, 제자들이 만들어 준 인터넷 카페 <리울 샘 모꼬지> http://cafe.daum.net/riulkht 운영자이다. 글을 써서 생기는 수익금을 '해내장학회' 후원금으로 쓰고 있는 선생님이기도 하다.

덧붙이는 글 리울(아호: '유리와 거울'의 준말) 김형태 기자는 신춘문예 출신으로 시와 소설을 쓰는 문인이자, 제자들이 만들어 준 인터넷 카페 <리울 샘 모꼬지> http://cafe.daum.net/riulkht 운영자이다. 글을 써서 생기는 수익금을 '해내장학회' 후원금으로 쓰고 있는 선생님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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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포럼 <교육을바꾸는새힘>,<학교안전정책포럼> 대표(제8대 서울시 교육의원/전 서울학교안전공제회 이사장) "교육 때문에 고통스러운 대한민국을, 교육 덕분에 행복한 대한민국으로 만들어가요!" * 기사 제보 : riulkht@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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