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녹색 피라미드 (46회)

등록 2005.03.11 07:58수정 2005.03.11 11:24
0
원고료로 응원
복도를 지나 객실로 들어온 김 경장은 곧바로 통나무처럼 침대 위로 쓰러졌다. 혼곤한 피곤과 함께 정신적인 긴장을 해서인지 온몸이 물에 젖은 솜처럼 나른해져왔다. 그는 눈을 감은 채 한동안 움직이지 않고 누워 있었다.

단동까지 단숨에 다녀온 탓에 누적된 피로가 온 몸 마디마디에서 느껴졌다. 중국에 오고부터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그였다. 범인에 대한 추적과 아울러 숨겨진 유물을 찾기 위해 그의 육신과 정신은 이미 한계상황을 넘어서고 있었다. 거기다 하우스 돌프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의 긴장감은 더욱 커져갔다. 그 긴장감은 부담으로 작용하여 두통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동시에 끈적끈적한 점액질의 피로감이 온몸의 피돌기를 타고 흘렀다.


김 경장은 겨우 몸을 일으켜 욕실로 걸어갔다. 한여름이지만 밤이 되면서 공기는 서늘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차가운 물로 오랫동안 샤워를 했다. 풀어진 정신을 추스르기 위해서였지만 피로는 좀체 가시지 않았다. 카운터에 전화를 해서 더운물을 틀어 달라고 했다. 그리고는 욕조에 뜨거운 물을 받아 몸을 담갔다. 그러자 땀이 솟아나며 몸의 피로가 조금 가시는 듯 했다.

물이 식어 온몸이 차갑게 굳어질 때까지 욕조에서 나오지 않았다. 아슴아슴 잠이 왔던 것이다. 몸은 차가웠지만 그의 정신은 혼곤 하게 젖어들고 있었다. 이대로 영원히 있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몸이 굳어지며 그의 정신마저 굳어질 것 같았다.

생각의 깊은 늪에서 벗어나 그렇게 단순하게 지내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안 될 일이었다. 그는 입술을 앙다문 채 욕조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물에 젖은 채 욕실 밖으로 나왔다. 밖은 여전히 후덥지근했으며 안개가 밖에서 스멀스멀 기어 들어오고 있었다. 하지만 물방울들이 살갗 위에서 천천히 흐르면서 짜르르 소름을 돋웠다.

지끈대는 두통에 싸늘한 한기 따위들과 대치라도 하는 심정으로 한동안 서 있다가 한 손으로 관자놀이를 누르며 천천히 창문을 열었다.

창밖의 거리엔 여전히 짙은 안개가 하얗게 몰려 있었다. 안개는 낮게 깔려 있었지만 아주 짙고 경계가 뚜렷했다. 그 안개 속으로 심양의 시가지가 바짝 엎드려 있는 게 보였다. 이 도시는 낡은 것과 새로운 것이 마구 뒤섞여 있었다. 몇 십 층이나 되는 빌딩 사이로 닭장 같은 목조 건물이 어깨를 기대며 무너질 듯 서 있으며, 고급 외제차와 함께 짐을 실은 나귀와 소가 도로를 활보하기도 했다. 여기저기 솟아 있는 건물의 그림자들은 구름 위로 고개를 내민 바위산 같았다.


'범인은 분명 저 건물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그런 생각과 함께 김 경장은 창밖의 경치를 살피며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안 박사가 목숨을 걸고 지키려 했던 그 유물을 찾아야 하지만 자신이 여기에 온 임무는 그것이 아니었다. 안 박사를 죽인 범인을 잡아야 하는 것이다.


자신이 여기에 파견된 이유는 분명했다. 범인체포를 제쳐두고 그 유물에만 매달릴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분명한 직무유기였다. 어떻게 해서든 여기에 파견된 목표를 달성해야만 했다. 자신은 범인을 잡아야만 하는 형사가 아닌가? 지금 여기 중국에 있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었다.

그렇다면 안 박사를 죽인 범인을 잡으면 그 유물을 찾을 수 있을까? 범인을 잡게 되면 분명 안 박사를 죽인 이유는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범인이 안 박사를 죽인 이유 또한 그 유물을 찾기 위한 것이 아닌가?

그들도 자신들 못지않게 유물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을 것이다. 그 유물이 세상에 알려지는 걸 막기 위해 안 박사까지 죽였던 그들이 아닌가? 때문에 안 박사를 죽인 범인을 잡는다 해도 유물의 행방을 알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반대로 그 유물을 찾으면 안 박사를 죽인 범인의 실체를 알 수 있는 것일까? 우연곡절 끝에 그 유물을 찾게 되면 그것을 노리고 있는 자들이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그걸 찾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게 뻔했다. 그때 그들을 체포하면 된다.

하지만 그들이 반드시 범인이라는 근거는 없었다. 여러 가지로 추측해볼 때 박사를 죽인 범인은 거대 조직의 하수인에 불과할 것이다. 살해한 범인을 찾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그를 지시한 그 조직의 실체를 파악하는 게 더 중요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일은 자신의 능력 밖이라는 걸 김 경장은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은 단지 안 박사를 죽인 범인을 찾기 위해 여기에 파견된 것이 아닌가? 거대한 실체를 파악할 능력이 없었고, 누구의 도움도 받기 힘든 상황인 것이다.

김 경장은 창문을 활짝 열어놓고 담배에 불을 붙여 물었다. 바람이 세게 불어와 담배연기가 빨려 들어가 듯 창밖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젖은 도로 위를 달리는 자동차의 질주음이 가까워졌다가 긴 꼬리를 끌며 사라졌다. 그는 침대로 걸어가 눈을 감고 억지로 잠을 청했다. 오들오들 몸이 떨려왔다. 살갗의 모공들마다에 까칠한 감촉이 느껴졌다. 그는 이불로 몸을 감싸 안은 채 천천히 숫자를 세었다.

하나, 둘, 셋, 넷…….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집 정리 중 저금통 발견, 액수에 놀랐습니다 집 정리 중 저금통 발견, 액수에 놀랐습니다
  2. 2 국무총리도 감히 이름을 못 부르는 윤 정권의 2인자 국무총리도 감히 이름을 못 부르는 윤 정권의 2인자
  3. 3 과음으로 독일 국민에게 못 볼 꼴... 이번엔 혼돈의 도가니 과음으로 독일 국민에게 못 볼 꼴... 이번엔 혼돈의 도가니
  4. 4 국방부의 놀라운 배짱... 지난 1월에 그들이 벌인 일 국방부의 놀라운 배짱... 지난 1월에 그들이 벌인 일
  5. 5 [영상] 가을에 갑자기 피어난 벚꽃... 대체 무슨 일? [영상] 가을에 갑자기 피어난 벚꽃... 대체 무슨 일?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