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 접견한 김윤규 제거는 곧 김정일 무시한 것"

[정치 톺아보기 105] 북한이 현정은과 현대에 분노하는 까닭

등록 2005.10.25 17:01수정 2005.10.25 2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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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지난 7월 16일 현대의 현정은 회장-김윤규 부회장을 접견한 김정일 국방위원장.

지난 7월 16일 현대의 현정은 회장-김윤규 부회장을 접견한 김정일 국방위원장. ⓒ 현대아산

현대와 북한 당국간에 심각한 갈등이 벌어진 배경에는 '현대측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무시했다'는 북측의 판단이 크게 작용했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또 바로 이런 점 때문에 한국 정부 당국이 싸움을 말릴 중재 공간이 협소하다는 지적이다.

남북경협 사정에 정통한 한 인사는 24일 "김윤규 전 현대아산 부회장은 정주영-정몽헌 부자와 함께 김정일 위원장을 6회나 면담한 현대 대북사업의 산증인이다"면서 "특히 김정일 위원장 접견자를 현정은 회장이 개인비리를 내세워 대북사업에서 손을 떼게 한 것이 결정적으로 김 위원장의 비위를 건드렸다"고 밝혔다.

최근 북측 인사로부터 관련 정황을 탐문한 이 대북 소식통은 "지난 7월 16일 김 위원장이 처음으로 현정은 회장을 접견하는 자리에서 개성-백두산관광 독점권이라는 '선물'을 줬는데, 현대측이 그로부터 1주일만에 김 부회장을 실권이 없는 자리로 좌천하더니 비리를 구실로 퇴출시킨 것이 '배은망덕'한 행위로 비쳐졌다"고 사정을 전했다.

사실 현정은 회장이 지난 7월 16일 자신으로서는 처음이자 현대가(家)의 최고경영자로서는 여섯번째인 김정일 위원장과의 면담을 성사시켰을 때만 해도 김윤규 부회장의 퇴진은 아무도 예상치 못했다. 왜냐하면 김 부회장은 김정일-현정은 접견을 막후에서 성사시킨 장본인이었기 때문이다.

"김정일 접견 1주만에 '팽' 당했으니 건의했던 북측 인사들이 어떻게 되었겠냐"

현정은 회장 체제가 출범한 이후 현대측은 그동안 김정일 위원장과의 면담을 적극 추진했으나 쉽지 않았다. 특히 지난 6·15 공동선언 5주년 행사 때 현 회장은 면담을 기대하고 방북했으나 김 위원장은 정동영 통일부장관만 접견하고 현 회장을 만나주지 않아 애를 태우기도 했다.

앞서의 경협사정에 정통한 인사는 "그러자 김 부회장이 북한의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측에 자신의 체면을 봐서라도 현정은 회장 접견을 성사시켜 달라고 적극 요청해, 그로부터 한달만에 7월 16일 원산에서 면담이 성사되어 현 회장에게 '선물'(백두산 관광)까지 줬는데 접견을 주선한 김 부회장이 '팽' 당했다"면서 "그러니 김 위원장에게 현 회장 접견을 건의했던 북측 관계자들이 어떻게 되었겠냐"고 반문했다.


북한에서는 김일성이나 김정일을 직접 만나고 함께 사진을 찍었던 사람을 '접견자'라고 하면서 그 자체를 대단히 영예롭게 여긴다. 이 인사는 "따라서 현대가 북측의 최대 금기사항인 김정일의 비위를 건드렸기 때문에 현재의 갈등을 해소하기가 쉽지 않고, 그만큼 한국 정부가 나서 갈등을 중재할 공간도 협소하다"면서 "아태평화위의 담화를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와 같은 정황은 지난 20일 현대그룹과 맺은 7대사업 독점권 계약 등 합의에 얽매이지 않고 사업을 재검토하겠다는 입장을 밝힌 아태평화위원회 대변인 명의 담화의 다음과 같은 대목에서 잘 드러나 있다.


"다 아는 바와 같이 지난 7월 현대그룹 회장은 김윤규 부회장과 함께 우리측 지역을 방문하여 경애하는 김정일 장군님의 접견을 받는 크나큰 영광을 지니였다. 선임자들의 뜻을 이어 서로 합심하여 일을 잘할 데 대한 따뜻한 격려의 말씀과 함께 개성관광과 백두산관광 독점권까지 받아안은 분에 넘치는 최상 최대의 특전도 지녔다.

그런데 돌아가자마자 야심가들의 충동을 받아 함께 접견을 받은 부회장을 따돌리고 그의 목까지 떼였으니 이보다 더한 인사불성이나 배은망덕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우리는 이에 심한 배신감을 넘어 분노마저 금할 수 없다. 현대측은 이런 행태로 우리의 감정을 크게 상하게 하였을 뿐 아니라 우리와의 신의관계마저 무참히 짓밟아버렸다."


아태평화위 담화 "원래 얼굴이 하나도 없는 현대는 현대가 아니다"

a 김윤규 부회장이 개인비리 혐의로 퇴출당하자 북측은 "정주영·정몽헌 선생들이 떠나가고 그 자리를 메꾸어오던 김윤규 부회장마저 없어진 현대에서 우리가 알 사람이란 누구도 없다"면서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김윤규 부회장이 개인비리 혐의로 퇴출당하자 북측은 "정주영·정몽헌 선생들이 떠나가고 그 자리를 메꾸어오던 김윤규 부회장마저 없어진 현대에서 우리가 알 사람이란 누구도 없다"면서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자료사진


사실 지난 8월 4일 고 정몽헌 회장 2주기 추모식을 앞두고 아태평화위는 현 회장 앞으로 조전을 보내 "민족의 화합과 조국통일에 기여한 업적은 길이 빛날 것"이라고 정 회장을 기리고, 현 회장에게 "지금 남북 관계가 좋아지는 즈음에 경협사업을 잘 해주기 바란다"고 부탁하는 등 현대측과 북측의 관계가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며칠 뒤에 <동아일보>(8월 8일자)가 '김윤규씨 대북사업 개인비리' 제하의 기사에서 "김윤규 현대아산 부회장의 개인비리를 내부감사를 통해 밝혀내고 김부회장에게 사퇴를 종용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고 보도하면서 현대-북한 사이에 틈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때만 해도 북측은 "우리는 사업에서 인간관계를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면서 김 부회장에 대한 배려를 완곡하게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아태평화위도 앞서의 대변인 명의 담화에서 "우리는 김윤규 문제가 제기되자 현대측에 신중을 기할 것을 거듭 권고하였으며 그들이 이성적인 사고를 가지고 옳바르게 처신할 것을 기대하였다"고 밝혀 그점을 분명히 했다.

그러면서 북측은 "이번 현대사태는 결코 김윤규 개인에 한한 문제로 되지 않는다"면서 "돌이켜보면 현대의 성장과 우리와의 협력사업 전 과정은 정주영, 정몽헌 선생들과 그들을 도와 36년 동안이나 현대에 몸을 담고 투신해온 김윤규 전 부회장을 떠나서 생각할 수 없다"고 밝혔다.

이처럼 북측이 "현대사태가 김윤규 개인에 관한 문제가 아니다"면서 "협력사업은 김윤규 전 부회장을 떠나서 생각할 수 없다"고 밝혀 사실상 김 부회장의 복귀를 요구하고 나선 데는, 김정일 위원장을 무시했다는 판단 말고도 김 부회장이라는 '완충장치'가 사라지는 것에 대한 현실적 불만도 크게 작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앞서의 대북 소식통은 "김윤규 부회장과 북한 아태평화위측 인사들은 오랜 교분을 통해 서로 체면을 안차리고 속마음을 털어놓고 의논하는 사이가 되었다"고 전제하고 "그 때문에 김윤규 부회장도 이들에게 상당한 배려를 해온 것으로 안다"면서 "그런데 김 부회장이 갑자기 배제되자 이들의 충격이 컸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북측은 아태평화위 담화에서도 "김윤규 부회장마저 없어진 현대에서 우리가 알 사람이란 누구도 없다"라고 그점을 분명히 밝혔다.

'현대가의 김윤규'는 곧 '김대중 정부의 박지원'

"남조선에서 정주영의 분신으로, 명예회장의 친자식으로 불리운 김윤규 선생은 정몽헌 회장으로부터 대북사업을 넘겨받아 더 강력히 추진시켜 달라는 유서당부까지 받았다. 하기에 우리는 정주영·정몽헌 선생들을 떠난 현대를 생각해 본 적이 없듯이 정주영·정몽헌 선생들을 떠난 김윤규 전 부회장을 생각해 본 적이 없으며 정주영·정몽헌 선생들이자 곧 김윤규로 여겨왔다.

정주영·정몽헌 선생들이 떠나가고 그 자리를 메꾸어오던 김윤규 부회장마저 없어진 현대에서 우리가 알 사람이란 누구도 없다. 따라서 오늘의 금강산관광사업은 사실상 굴러온 돌이 배긴 돌을 뺀 격의 일로 되고 말았다. 현대의 원래 얼굴이 하나도 없는 현대는 현대가 아니다."


'김윤규 없는 현대는 현대가 아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은 노무현 대통령이 대북송금 특검을 받아들였을 때의 상황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

북한 사정에 밝은 한 사업가는 "북측은 현대를 김대중 정부와 등치시키는 경향이 있다"고 전제하고 "북측에 정주영 회장과 김윤규 부회장의 관계는 김대중 전 대통령과 박지원 전 비서실장의 관계와 비슷하다"면서 "박지원 전 실장이 구속되었을 때 북한 당국이 석방을 요구하는 성명을 낸 것도 같은 이치"라고 지적했다.

김정일 위원장이 접견한 '현대가의 김윤규'는 곧 '김대중 정부의 박지원'으로 간주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측이 일종의 인사권에 개입한 북측의 요구를 받아들이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북측은 핵문제 협상에서 국가의 존엄성을 무시했다고 판단한 미국을 향해서뿐만 아니라 현대측에 대해서도 '벼랑끝 승부수'를 던지고 있는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아태평화위가 25일 현대아산에 금강산 관광사업에 대해 협의하자고 제의해 온 것으로 확인돼 주목된다.

정동영 통일부장관은 이날 국회 본회의 통일·외교·안보분야 대정부질문 답변을 통해 북한의 현대아산 대북사업 전면 백지화 선언과 관련, "금강산(관광)사업의 책임자라고 할 수 있는 이종혁 아태평화위 부위원장이 오늘 아침 현대아산에 협의할 것을 제안했다"면서 "곧 협의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정 장관은 또 "양측 사업자가 만나면 좀더 발전된 논의가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정 장관은 더 자세한 내용에 대해선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정동영 장관은 24일 총리를 지낸 연형묵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의 사망에 대해 정부 차원의 공식 조의를 표명했다. 따라서 아태평화위의 협의 제안은 정부의 유화 제스처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 것으로 풀이된다.

이에 따라 북한의 '현대아산 대북사업 전면 재검토' 선언으로 중단 위기에 처한 현대의 대북사업이 재개되는 계기가 마련될 지 주목된다. 물론 아직 낙관은 금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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