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풍, X-파일.... '국가 정보기관' 수난사

[정치 톺아보기 104] 검찰, 국정원 베나

등록 2005.10.06 12:58수정 2005.10.06 1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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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유일한 '국가 정보기관'이자 대통령 직속기관인 국가정보원이 61년 중앙정보부 창설 이후 최대의 시련기를 맞이했다. 지난 79년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 대통령을 살해한 10·26 사태 이후 처음 겪는 최대의 수난이다.

당시 중앙정보부는 부장 이하 일부 직원들이 국가원수를 살해한 '대역죄'에 가담한 혐의로 국가안전기획부로 개편될 때까지 내내 죄인 신세를 면하지 못했다. 그 때문에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박정희 대통령 살해사건의 합동수사본부장으로서 중앙정보부장서리를 겸직하게 되자 '국가 정보기관'인 중정은 '부분 정보기관'인 보안사에 '접수'되는 수모를 겪었다.

79년 12·12에 이은 80년 5·17로 이어지는 점진적인 쿠데타를 실행해 정권을 잡은 전두환 장군을 정점으로 한 '신군부'는 이후 대통령 시해집단인 중정에 대한 대대적인 숙정을 단행했으나 '남산 사람들'은 서슬퍼런 군사정권의 위세에 눌려 숨죽이고 살아야 했다. 새 정부는 중정을 국가안전기획부로 환골탈태 시키는 과정에 실·국장과 지부장 등 부서장급의 3분의 2와 직원 수백명의 옷을 벗겼다.

'국가 정보기관' 수난사

이른바 문민정부를 표방한 김영삼 정부 출범을 기해서도 안기부는 당시 사정 드라이브 정국과 맞물려 대대적인 개혁을 강요당했다. 그러나 김영삼 대통령의 고교 후배인 정형근 차장 등이 적극적으로 정치권에 로비를 펼치고, 이른바 '민주계'(범상도동계)를 중심으로 한 집권세력 또한 '뒷간에 다녀온 뒤'로 마음이 달라진 탓에 안기부에 대한 의회 통제를 강화하기 위해 국회에 정보위원회를 설치하는 선에서 정치권과 안기부의 타협이 이뤄졌다.

그러나 현실에 안주해 개혁을 외면한 후과(後果)는 5년 뒤에 야당 후보(김대중)에 대한 오익제·김병식 편지 공세와 공기업을 동원한 여당 후보(이회창) 대선자금 모금, 그리고 선거 막판의 북풍 공세와 낙향 구전 홍보활동 독려 등과 같은 노골적인 선거개입으로 재현되었다.

그리고 김대중 정부가 정식으로 출범하기도 전에, 당시 권영해 안기부장의 사주를 받아 대선 직전에 김대중 후보의 친북활동을 폭로하는 조작된 북풍 기자회견을 감행한 재미교포 윤홍준씨가 출입국 통보자 명단에 오른지도 모른 채 버젓히 국내에 들어왔다가 체포된 것을 계기로 이른바 북풍 사건에 대한 검찰 수사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98년 3월 당시 북풍 수사를 담당한 서울지검 공안2부는 윤홍준씨의 자백을 받아내 6급직원 이재일씨부터 주만종 팀장·김은상 처장(3급)·송봉선 단장(2급)·이대성 실장(1급), 그리고 권영해 부장까지 순차적으로 구속하는 수사성과를 거두었다. 검찰이 이토록 많은 국정원 간부와 직원들을 줄줄이 구속한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바로 북풍 공작에 개입한 국가 정보기관의 명백한 불법행위의 증거가 있었기에 여소야대 상황에서 집권한 김대중 정부는 취약했지만 IMF 긴급구제금융 사태를 극복하기 위한 사회적 공감대 속에서 '군살 빼기'와 정치에 오염된 환부를 제거하는 '개혁 수술'을 단행할 수 있었다.


최근 검찰이 수사중인 이른바 X-파일 녹취테이프와 녹취록을 유출한 공운영 전 팀장이 이끈 안기부 현장도청 '미림'팀도 그때 해체되었고, 공씨도 그때 면직되었다. 그 때문에 일부에서는 김대중 정부가 안기부를 무리하게 개혁하는 과정에 불만을 품은 공씨가 테이프를 유출한 것이라며 이를 안기부 개혁 탓으로 돌리고 있으나 이는 책임을 전가하는 '결과론'일 뿐이다. 왜냐하면 그때 미림팀이 해체되지 않았다면 공씨는 음습한 골방에서 더 많은 X-파일을 만들어 쌓아놓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97년 12월 헌정 사상 최초의 선거에 의한 정권 교체가 없었다면, 대전복·반혁명세력 색출이라는 시대적 배경 속에서 창설한 이후 줄곧 '국가 안보기관'보다는 '정권 안보기관'으로 기능해온 국가 정보기관의 불법행위는 다시 한번 묻혔을지도 모른다.

북풍사건 수사의 '우연'

필자는 누구보다도 그런 사실의 현장에 가까이 있었다. 필자는 97년 대선 전부터 안기부가 개입된 오익제·김병식 편지사건, 정재문(한나라당)-안병수(북한 조평통) 커넥션 등 북풍공작 의혹을 잇달아 추적 보도한 바 있다. 또 필자는 98년 3월에 북풍공작 수사가 시작되자 북풍공작에 개입했던 이대성 203실장(해외공작실장) 등이 구명을 위해 정치권 압박용으로 외부에 유출한 이른바 이대성 파일(2급비밀)을 입수해 보도한 '전력' 때문에 북풍사건 수사 말미에 서울지검 공안2부에서 파일의 입수 및 보도 경위와 관련해 조사를 받은 바 있다.

게다가 필자 자신이 안기부의 북풍 공작의 한 가운데 있었던 이른바 '흑금성 공작원'의 활동상을 잘 알고 있었거니와, 이 사건과 관련해 검찰 조사를 받으면서도 수사상황에 대한 취재를 하는 것이 기자의 업(業)이었기에, 필자는 당시의 상황을 누구보다도 생생하게 알고 있다.

모든 역사의 뒤편에는 대개 대중이 모르는 우연의 요소가 작용했었지만, 북풍 사건 수사도 '우연'에서 비롯되었다.

재미교포인 윤홍준씨는 97년 대선 직전에 처음에는 일단 '안전하게' 중국 베이징에서 기자회견을 했다. 그러나 국내 언론에서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일본 도쿄로 건너가 그곳에서 회견을 가진 다음에 대범하게 서울에 들어와 여의도 6·3빌딩에서 같은 회견을 가졌다.

그러자 당시 국민회의측은 김대중 후보를 비방한 윤씨를 선거법 위반혐의로 관할 영등포경찰서에 고발했다. 이 사건 또한 선거 때면 난무하는 수많은 후보 비방과 고소·고발 중의 하나였을 뿐 선거가 끝난 뒤에는 아무도 기억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 때문인지 윤씨는 자신이 비방했던 김대중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었음에도 안기부로부터 기자회견의 대가로 20만 달러를 받으려 겁도 없이 한국에 입국했다가 출입국사무소의 입국통보를 받은 당시 서울지검 남부지청 공안부의 김오수 검사한테 체포당했다.

윤씨가 체포될 때만 해도 윤씨의 검거가 권영해 부장의 구속까지 이어질줄은 아무도 몰랐다. 물론 윤씨를 검거한 남부지청 공안부 김오수 검사조차도 이 사건이 그렇게까지 '줄줄이 사탕'으로 엮일 줄을 몰랐다고 나중에 털어놓았다.

밤마다 고문당하는 악몽을 꾼 검사

그도 그럴 것이 안기부와 검찰, 특히 안기부 대공수사국과 서울지검 공안부의 관계는 '순망치한'(脣亡齒寒)의 관계로 비유될 만큼 밀접한 사이였다. 특히 검찰의 직접 수사지휘를 받는 경찰과 달리 안기부는 대공·간첩수사의 전문성을 인정받았기에 안기부의 기소의견 송치는 대부분 검찰의 공소제기로 이어질만큼 밀접했으며, 5공화국 때까지만 해도 검찰이 안기부의 눈치를 볼 정도였다.

특히 5공 때는 ▲85년 김근태씨 고문사건(치안본부 남영동 분실) ▲86년 부천서 성고문 사건 ▲87년 박종철씨 고문치사 사건(남영동 분실) 등에서 보듯, 안기부의 비호를 받는 경찰력이 체제를 지탱하고 안기부는 이른바 관계기관대책회의를 통해 검찰을 조정·통제했다.

전남 광주 출신의 '386 세대'인 김오수 검사는 당시 30대 중반의 혈기방장한 검사였지만 공안부 출신으로서 그런 기관·조직간의 역학관계를 잘 알고 있었다. 당시 이 사건의 실마리를 움켜쥔 초동 수사검사로서 서울지검 북풍수사팀으로 파견나가 수사의 마무리를 앞둔 김 검사는 필자에 대한 조사가 어느 정도 끝나자 필자에게 자신을 소개하고 이 사건에 대한 자신의 심경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김 검사는 처음 윤홍준씨의 공작관인 이재일씨를 소환할 때만 해도 이씨가 소환에 응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 현직 안기부 직원의 경우 현행범이 아닌 한 안기부직원법에 따라 부장의 사전허가를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상 신임 이종찬 부장은 해당 직원에게 조사를 받고올 것을 명했다. 정권 교체기라는 어수선한 시점인 탓도 있었지만 안기부 출신인 이종찬 부장이 대선 때부터 안기부의 북풍공작 혐의를 인지하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일단 소환에 응하자 그때부터는 일사천리였다. 이씨는 검찰 조사를 받게 되자 팀장인 주씨를 불었고, 주씨는 김 처장을, 김 처장은 송 단장을, 송 단장은 이 실장을, 그리고 이 실장은 권 부장을 진술했다. 중간에 권 부장이 자해소동을 벌이는 곡절이 있었지만 김 검사는 이렇게 해서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안기부의 부장까지 고구마 줄기를 캐듯 엮어내 구속시켰다.

그러나 막상 안기부 직원들을 구속은 시켰지만, 김 검사는 자신이 밤마다 안기부 지하실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는 악몽을 꾸었다고 털어놓았다. 이처럼 수사검사도 후환을 두려워할 만큼 안기부는 두려운 존재였다.

판도라의 상자, X-파일

a 지난 8월 19일 국정원 역사상 처음으로 검찰의 압수수색을 받은 국정원 청사 정문 앞으로 검찰 수사차량이 빠져나오고 있다.

지난 8월 19일 국정원 역사상 처음으로 검찰의 압수수색을 받은 국정원 청사 정문 앞으로 검찰 수사차량이 빠져나오고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그로부터 7년여만에 서울중앙지검 공안2부는 검찰 역사상 처음으로 국정원을 압수수색한 데 이어 다시 한번 전현직 국정원 수뇌부와 직원들을 소환조사하는 국면을 맞이했다.

이른바 안기부 불법도청 X-파일 사건을 수사중인 검찰은 그동안 전현직 국정원 직원 30여명을 소환해 조사를 벌였다. 서울중앙지검은 안기부 시절의 현장도청 '미림'팀 관련 조사를 매듭지은 데 이어 현재는 국정원 시절의 불법감청 의혹에 대해 조사중이다.

이와 관련 검찰은 오정소 전 안기부 차장과 김덕·권영해 전 안기부장을 불러 조사한 데 이어 천용택 전 국정원장을 조사했다. 이종찬·임동원·신건 전 원장도 소환 조사한다는 얘기가 나온다. 현재까지 소환한 국정원 직원 수만으로도 북풍 사건 이후 최대 규모이지만 고위직 인원 수를 감안하면 '전무후무한 기록'이 될 것이 분명해 보인다.

공운영 전 미림팀장에게서 압수한 도청테이프 274개의 내용분석을 마친 검찰은 오는 7일 대검찰청 국정감사장에서 김종빈 검찰총장이 의원들의 질의에 답하는 형식으로 X-파일 사건의 처리 방침을 밝히는 방안을 검토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북풍 사건에서 공안의 칼에 베인 전현직 직원은 권영해 부장을 포함해 총 6명이었다. 이에 비해 X-파일 사건으로 현재까지 공안의 칼에 베인 전현직 직원은 공운영 전 미림팀장뿐이다. 그러나 '판도라의 상자'인 X-파일 사건의 잠재적 파괴력에 비추어볼 때 늘 같은 편이었던 공안의 칼에 베일 자 몇 명이 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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