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파일과 보광 탈세수사로 풀린 '세풍 미스테리'

[정치 톺아보기 103] 배달사고 30억원의 의미

등록 2005.09.13 16:15수정 2005.09.13 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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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세풍사건에서 핵심 역할을 수행한 서상목 전 한나라당 의원(왼쪽)과 이회성(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의 동생)씨는 삼성과의 불법 대선자금 거래에서도 주요한 통로로 활동했음이 드러났다.

세풍사건에서 핵심 역할을 수행한 서상목 전 한나라당 의원(왼쪽)과 이회성(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의 동생)씨는 삼성과의 불법 대선자금 거래에서도 주요한 통로로 활동했음이 드러났다. ⓒ 오마이뉴스


지난 97년 15대 대통령 선거 당시 한나라당이 이석희 국세청 차장 등과 공모해 현대, SK, 대우 등 23개 대기업에서 166억3천만원을 한나라당 대선자금으로 불법모금한 이른바 '세풍(稅風)' 사건은 안기부 '북풍(北風)' 유도 사건과 함께 김영삼 정부 시절의 대표적인 국기 문란 사건이다.

그런데 북풍 사건 수사는 '전광석화'처럼 전개되어 '속전속결'로 마무리 데 반해, 세풍 사건 수사는 여소야대 정국에서 검찰이 피의자인 정치권에 지리멸렬하게 질질 끌려다니는 듯한 모양새를 나타냈다.

실제로 북풍 사건의 경우, 안기부의 사주를 받아 거짓 기자회견을 한 윤홍준씨의 체포를 계기로 서울지검 공안부는 안기부 6급 직원 이재일씨부터 팀장·처장·단장·국장, 그리고 권영해 안기부장까지 6명을 줄줄이 구속하는 개가를 이뤄냈다.

반면에 대검 중수부가 수사한 세풍 사건의 경우, 이 전대미문의 사건을 주도한 이석희 전 국세청 차장과 김태원 한나라당 재정국장이 도피하고 서상목 의원마저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가 펼친 '방탄국회'의 보호막 속으로 몸을 숨김에 따라 '소리만 요란한 빈수레' 수사가 되었다.

세풍 미스테리 2제 : 이회창 후보의 인지 여부와 삼성 비자금

98년 8월 31일 미국으로 출국하려던 서상목 의원에 대한 검찰의 출국금지 사실이 불거지면서 '지난 대선 때 국세청이 한 일'이 처음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세풍 사건 수사는 다음날 곧바로 임채주 전 국세청장의 구속으로 기세를 올리는 듯했다. 그러나 다른 핵심 인사들이 검찰의 수사망을 벗어남에 따라 1차 수사결과는 반쪽짜리에 불과했다. 그런 '믿음' 때문인지 이회창 총재 또한 방탄 정기국회가 끝난 뒤에 '대국민 사과성명'을 마지못해 '찔끔' 냈을 뿐이다.

그러나 수사에 박차를 가한 검찰은 세풍 사건에서 얼굴마담 역할을 한 이회성씨와 배재욱 전 청와대 사정비서관을 추가로 구속기소한 데 이어 김태원 전 한나라당 재정국장까지 구속하기에 이르렀다. 99년 9월 6일 검찰은 중간수사결과를 발표하면서 서상목 의원을 불구속기소하고 이석희 전 국세청차장 기소중지했다. 이회창 총재는 검찰의 중간수사결과 발표를 하루 앞두고 같은 사건으로 '어쩔 수 없이' 두번째 대국민 사과를 해야 했다.


그리고 마침내 다음 대선이 있던 2002년 2월에 미 FBI(연방수사국)가 이석희씨를 체포함으로써 김대중 정부 임기 내에는 세풍 사건이 마무리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씨는 범죄인 인도재판을 통해 다시 버티기를 했다. 누가 보기에도 다시 대선에 출마한 이회창 후보가 당선되기만을 기다리는 폼새였다.

a 세풍 핵심 주역 3인방 중의 1인인 이석희 전 국세청차장은 98년 8월 검찰 수사가 시작되자 미국으로 도피했다가 2003년 3월에야 귀국해 이 사건 수사를 5년 동안 끌었다.

세풍 핵심 주역 3인방 중의 1인인 이석희 전 국세청차장은 98년 8월 검찰 수사가 시작되자 미국으로 도피했다가 2003년 3월에야 귀국해 이 사건 수사를 5년 동안 끌었다.

실제로 참여정부가 출범한 이후인 2003년 3월에야 이씨가 범죄인 인도재판을 포기함에 따라 검찰은 그해 4월에 귀국한 이씨를 구속기소하고 최종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이렇게 3차 세풍 수사를 거쳐 검찰이 수사한지 꼭 만 5년만인 그해 8월 마침내 세풍 1심 선고가 마무리되었다. 이회창 전 총재는 3차 대국민 사과는 하지 않았다. 노무현 후보에게 패배한 뒤에 정계를 은퇴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세풍 사건은 권력욕에 눈이 먼 부도덕한 정치인과 공직자들이 결탁해 국가 조세권을 무기로 정치자금을 강제모금한 파렴치한 사건인데도, 선거에서 패하자 이번에는 '약자'(야당)임을 위장해 방탄국회를 열고 핵심 피의자들을 도피시켜 그 파렴치함을 은폐하려 한 후안무치한 사건이다.

그 후안무치 때문인지 몰라도 세풍 사건은 5년에 걸친 검찰의 끈질긴 수사에도 불구하고 두가지 핵심 미스테리를 숙제로 남겼다.

하나는 세풍 기획에 대한 이회창 전 총재의 인지 및 부국팀의 보고 여부이다. <오마이뉴스>가 입수한 '97년 대선자금 불법모금 사건'(세풍 사건) 검찰 수사 및 공판기록에 의하면, 이회성씨는 15회에 걸쳐 피의자신문조서를 받았는데, 유독 부국팀에 관해서만 진술을 거부했다. 검찰이 압수한 부국팀 보고서에 따르면, 부국팀은 97년 9월 이 총재에게 김영삼 대통령을 만나 대선자금 지원에 대한 '담판'을 지을 것을 권고하고 있다. 따라서 동생 이씨의 진술거부는 이 총재를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다른 하나는 '삼성 미스테리'이다. 현대(30억)·동부(30억)·대우(20억)도 이회창 후보측에게 수입억원씩 대선자금을 제공했는데 검찰 수사에서 삼성은 비자금 10억원을 제공한 사실만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이익치 현대증권 회장이 정치자금 관리의 '총대'를 맨 현대를 제외한 SK와 대우는 손길승 회장과 김우중 회장이 검찰조사를 받았지만, 삼성은 이건희 회장은 커녕 이학수 구조조정본부장도 조사를 받지 않고 넘어갔다.

2005년, 삼성 미스테리가 풀리다

a 홍석현 전 중앙일보 사장은 97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이회창 후보 쪽에 전해주라며 삼성 쪽이 건넨 정치자금 가운데 일부인 30억원을 전달하지 않은 채 착복한 의혹을 받고 있다.

홍석현 전 중앙일보 사장은 97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이회창 후보 쪽에 전해주라며 삼성 쪽이 건넨 정치자금 가운데 일부인 30억원을 전달하지 않은 채 착복한 의혹을 받고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그런데 홍석현 전 <중앙일보> 사장(현 주미대사)이 97년 대선 당시 삼성의 대선자금 전달책이었음을 입증하는 이른바 '안기부 불법도청 X-파일'의 공개와, 홍 사장이 이회창 후보에게 전해주라며 받은 정치자금 일부(30억원)를 착복했다는 <한겨레> 보도는 5년간의 검찰수사와 그 뒤 2년간의 잠복기를 보탠 '7년 묵은 미스테리'의 일단을 풀어 놓았다.

<한겨레>는 9월 12일 1면 머릿기사에서 "지난 1997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홍석현 전 사장이 이회창 후보 쪽에 전해주라며 삼성 쪽이 건넨 정치자금 가운데 일부인 30억원을 전달하지 않은 채 착복한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고 보도했다.

이 신문은 이어 "대검찰청 중앙수사부는 99년 10월 홍 사장이 대주주로 있던 보광그룹의 탈세사건에 대한 수사 과정에서 이런 사실을 밝혀냈지만, 친족 간의 횡령이어서 친고죄에 해당한다는 이유로 홍 사장의 범죄 사실에 포함시키지 않고, 처벌도 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고 전했다.

홍 사장이 삼성의 대선자금을 '삥땅'한 의혹은 익히 알려진 바이다. 홍씨는 '이회창 보험용' 대선자금뿐만 아니라 '김대중 보험용' 대선자금도 삥땅했다는 의혹을 받았다. 이 때문에 매형인 이건희 회장이 대노하고 김대중 대통령에게 사과했다는 얘기도 정치권에서 흘러나왔었다.

또 이 때문에 보광 탈세수사에서 출처가 확인되지 않은 30억원에 대해 홍씨는 '이회창 후보측에 전해주라며 삼성 쪽이 건넨 정치자금 가운데 일부'라고 진술했지만, 실은 김대중 후보측에 전해주라는 돈을 '슬쩍' 한 것이라는 얘기도 있었다.

상당한 재산가인 홍씨가 매형이 건넨 돈을 삥땅한 배경은 여러모로 추정된다. 나쁘게 말하면 가진 자의 '화수분' 심리에 의한 '견물생심'이고, 좋게 말하면 대선 판세와 당선 가능성을 주도면밀하게 계산한 '전략적 선택'일 수 있다. 물론 이도저도 아니라면 평소 정치인을 혐오하는 홍씨가 김대중 혹은 이회창 후보에게 '그냥 주기 싫어서'일 수도 있다.

'천용택 미스테리'도 풀렸다

이번 <한겨레> 보도로 '천용택 미스테리'도 풀렸다. 안기부 불법도청 X-파일이 공개되자 MBC를 비롯한 거의 모든 언론은 천용택 전 국정원장이 X-파일 내용을 보고받았기 때문에 99년 12월 15일 당시 국정원에서 개최한 오찬 기자간담회에서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의 정치자금을 언급한 것으로 추정해 보도했다.

그러나 <오마이뉴스>만 "당시 상황을 기록한 기자의 취재수첩을 복기한 결과, 이와 같은 추정은 사실과 다른 것으로 확인되었다"고 전제하고 "천용택 전 국정원장의 99년 홍 회장 발언은 X-파일과 무관하다"고 보도하면서 당시 천 원장의 발언 녹취록을 공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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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홍석현 사장의 삼성 비자금 '배달사고' 보도를 계기로 천용택 전 국정원장의 'DJ 삼성 정치자금' 발언은 검찰 관계자로부터 배달사고 내용을 보고받은 김대중 대통령으로부터 들은 '전문'(傳聞)임이 입증된 셈이다.

홍석현 사장의 삼성 비자금 '배달사고' 보도를 계기로 천용택 전 국정원장의 'DJ 삼성 정치자금' 발언은 검찰 관계자로부터 배달사고 내용을 보고받은 김대중 대통령으로부터 들은 '전문'(傳聞)임이 입증된 셈이다. ⓒ 안현주

"대통령이 97년에 대선자금을 받을 때도 정치자금법이 통과(11월 14일)되기 전에는 기업체의 돈 받아도 불법이 아니었거든요. 누구나 받을 수 있게 되어 있었어요. 그때까지 받았다는 거예요. 사실 홍석현(당시 중앙일보 사장)이가 삼성 돈을 가지고 그전에는 와서 한번 받았대요. 그런데 그 법 통과된 날 가져온 것은 그 다음 '빠꾸'시켰다(되돌려보냈다)는 거예요. 그때 받았으면 (나중에 보광그룹 탈세 사건으로 홍 회장이 구속되었을 때) 큰일 날 뻔 했다는 거죠.

그런 신중성 때문에 지금까지 살아 남았다는데, 서경원이가 북한에 가서 받아온 돈(1만 달러), 김대중이가 받겠습니까? 김대중이가 그때 사회적으로, 사상적으로 여러 가지 말(색깔 공세)을 듣고 있는 세상이었는데, 그건 말이 안되는 소리거든요."(* 필자주 : 위 내용은 당시 천 원장의 발언을 그대로 녹취해 푼 것이고 괄호 안은 필자가 단 주석임)


보광그룹 탈세사건 당시 검찰은 홍 전 사장 일가가 관리하던 1천여 차명계좌를 뒤져 출처가 불분명한 86억원을 찾아내, 이 가운데 32억원이 모친으로부터 증여받은 돈임을 확인하고 증여세 포탈(18억여원) 혐의 등으로 99년 10월 홍씨를 구속기소했다.

그런데 청와대는 보광그룹 탈세사건 수사 당시 이런 '배달사고' 내용을 검찰 관계자로부터 보고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당시 천 원장의 'DJ 삼성 정치자금' 발언은 검찰 관계자로부터 배달사고 내용을 보고받은 김대중 대통령으로부터 들은 '전문'(傳聞)임이 입증된 셈이다.

검찰, 대한민국 '최후의 성역'으로 간주되는 삼성 비자금 수사의 고비 넘을까

<한겨레> 보도를 계기로 검찰이 세풍 사건 기록에 이어 보광그룹 탈세사건 기록도 재검토하기 시작하면서 X-파일 내용 수사는 한층 탄력을 받게 되었다. 보광 탈세수사는 세풍 수사와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 시기적으로 세풍 수사가 시작된 지 1년여 만인 99년 하반기에 사건이 불거졌고, 수사팀도 대검 중수부로 같았다. 또한 두 사건 모두 삼성 불법자금과 밀접히 연관돼 있어 검찰이 '독수독과' 이론을 피해갈 돌파구가 열린 셈이다.

사실 X-파일에 따르면 홍씨가 대선 때 이건희 회장의 돈 심부름을 전담한 것으로 돼 있고, 검찰은 이미 보광 탈세수사에서 그의 차명계좌 대부분을 살펴본 만큼, 검찰은 삼성과 관련된 불법자금의 흐름을 파악하고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결국 삼성이 이회창 전 후보 쪽에 최소 60억원을 건넨 것으로 드러난 세풍사건과 매형이 배달시킨 돈 가운데 30억을 '삥땅'한 것으로 드러난 보광 탈세사건 수사기록과 함께, 삼성이 정치권에 100억원대 이상의 자금을 건넨 것으로 돼 있는 X-파일 내용의 진위를 가릴 단서들은 이미 검찰의 손에 쥐어져 있는 셈이다.

검찰이 2003년 현직 대통령의 대선자금 수사에 이어 대한민국 '최후의 성역'으로 간주되는 삼성 비자금 수사의 고비를 넘는다면, 그것만으로도 나라를 바로 세우는 첫단추를 꿰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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