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산바다 조기들은 어디로 갔을까?

[섬이야기 39] '옛이야기' 된 위도 파시

등록 2006.06.30 18:29수정 2006.06.30 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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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양할미가 열어준 뱃길을 따라 30여분 달렸을까. 갑자기 배가 좌우로 흔들린다. 뭔가 잡지 않고는 서 있기 힘들다. 멀리 보이던 형제도가 물 속에 잠겼다 나오기를 반복하더니 왼쪽에 덩그러니 섬이 하나 나타났다.

임수도라고 한다. 위도를 감싼 조류가 다시 합쳐지면서 작은 섬을 만나 소용돌이를 일으키는 곳이다. 이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고, 안전한 뱃길을 위해서 처녀를 바치기도 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어디서 많이 들었던 이야기다. 얼마 전에는 임수도에서 문인상이 몇 개 발견되었다. 주민들은 처녀 대신 석상을 빠뜨려 용왕을 달랬을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a 격포에서 위도로 들어가면서 본 모습(사진 앞쪽  검은 섬이 임수도, 뒤에 있는 섬이 위도)

격포에서 위도로 들어가면서 본 모습(사진 앞쪽 검은 섬이 임수도, 뒤에 있는 섬이 위도) ⓒ 김준

'돈 실러 간다'했던 칠산바다 조기잡이

부안군 변산면 격포항에서 14㎞ 서쪽 바다에 떠 있는 고슴도치 모양의 섬, 위도(蝟島, 고슴도치섬)는 한때 전라남도 지도군에 속했다. 그리고 일제강점기에는 영광군에 속하기도 했다. 지금의 전남 영광 송이도, 안마도, 전북 부안군 위도 사이의 바다가 팔도 뱃사람들의 꿈과 희망을 건져올리던 '칠산바다'다.

그래서일까 '돈 실러 간다'는 칠산바다 조기잡이는 1960년대까지 4월부터 시작해 6월까지 계속되었고, 위도에는 난장인 '파시'가 이루어졌다. 바다(어장)에서 어선과 상고선 사이에 잡은 고기와 식구미(뱃사람들의 일상생활용품)가 거래되는 것을 '파시'라 한다. 지금은 섬이나 인근 육지에 철따라 일시적으로 형성되는 시장을 의미하는 것으로 변했다.

파시에 대한 기록은 <세종실록지리지>에 '파시평'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그 파시평은 영광군에 속했던 칠산바다를 말하며, 주로 석수어(머리에 돌이 있다고 해서 붙여진 조기의 다른 이름)를 잡았다.

일제강점기에는 용호도, 연평도, 녹도, 고군산군도, 위도 등에 조기파시가 형성되었다. 특히 영광군 위도 인근에서 잡은 조기는 그 중 으뜸이었고, 당시 영광의 중심이었던 법성포에서 소금에 잘 갈무리한 조기는 '영광 굴비'가 되어 임금에게 진상이 되기도 했다. 당시 조기를 운반하던 상고선들은 법성포로 직접 들어갔지만 3개의 돛을 달고 7∼8명의 선원들이 탔던 풍선배는 어장이 가까운 위도에 머물렀다. 그곳이 위도면 치도리였다.


a 법성포구에서 만난 조기

법성포구에서 만난 조기 ⓒ 김준

a 치도리 마을 뒤산에 당집에 모셔진 신체, 주민들은 조기의 신으로 알려진 임경업장군으로 추정한다.

치도리 마을 뒤산에 당집에 모셔진 신체, 주민들은 조기의 신으로 알려진 임경업장군으로 추정한다. ⓒ 김준

팔도 풍선배 모여들던 치도리

동력선과 나일론 그물이 등장하기 전 치도리 장불은 풍선배들의 선착장이었고, 그물과 풍선을 손질하는 수리소였다. 뿐만 아니라 기둥을 세우고 겨우 바람만 막은 술집은 거친 파도와 싸우며 조기를 잡던 뱃사람들의 유일한 놀이공간이었다.


치도리 장불은 어살을 막았다는 '살막금'에서 시작해 치도리 당집 아래까지 위도에서 가장 넓은 갯벌이 형성된 곳이다. 조기파시가 형성될 무렵만 해도 이곳은 모래와 자갈로 이루어진 넓은 갯벌로, '장불'이라고 불렀다.

조기잡이 선원들이 머무는 술집과 밥집들이 있었던 '제주촌', 일본 사람들이 있었던 '아래것', '임자도', '황해도', '원산덕'(태안) 등 임시가옥들이 옹기종기 머리를 맞대고 지어졌다. 심지어는 주민들의 집 마당에까지 임시막들이 지어졌다.

당시 그물은 면사그물이었고, 닻줄은 칡넝쿨을 꼬아 만들었다. 제법 사는 집에는 커다란 가마솥이 마당 가운데 걸려 있고 연신 불을 지폈다. 질기지 않는 면사그물이 그 가마솥에 들어갔다 나오면 새 그물로 둔갑해 나왔다. 이렇게 면사 그물에 갈물을 들여서 질기게 만드는 작업을 했다.

조기들이 칠산바다에 알을 낳기 위해 헤매고 있을 때 육지에서는 객주와 선주들 사이에 선금이 오가며 거래가 이루어진다. 이를 '선대'라고 한다. 조기잡이 출어를 위한 비용이 없었던 선주들은 객주에게 미리 돈을 빌려 출어를 하고, 잡은 고기는 그대로 객주에게 인계했다.

치도리에 배들이 모여들면 포구에 가득 차 마을 앞 딴치도까지 건너다닐 정도였다. 60년대까지만 해도 먼 바다로 나가지 않고 섬주변에 그물을 드리우기만 해도 만만치 않는 조기들이 걸려들었다. 이곳에 모여든 팔도의 배들이 조기잡이에 나서기 전에 치도리 당집이나 아래 바다에 들려 꼭 풍어와 안전을 기원했다. 지금도 정월 보름 무렵이면 치도리에서는 당제가 진행되고 있으며, 그곳에는 임경업 장군으로 알려진 당신을 모시고 있다.

a 팔도에 조기잡이 풍선배들이 모였던 치도리 장불, 주민들이 바지락작업을 하고 있다.

팔도에 조기잡이 풍선배들이 모였던 치도리 장불, 주민들이 바지락작업을 하고 있다. ⓒ 김준

a 처녀 대신 임수도 인근 거친 바다에 던졌을 것이라고 믿고있는 석상, 주민이 임수도 해변에서 주워 보관하고 있다.

처녀 대신 임수도 인근 거친 바다에 던졌을 것이라고 믿고있는 석상, 주민이 임수도 해변에서 주워 보관하고 있다. ⓒ 김준

파도에 밀려든 황금조기들이 장불에 널릴 정도

지금이야 격포와 위도를 잇는 뱃길이 좋아졌지만, 과거에는 줄포를 이용했다. 격포보다는 오히려 부안의 돈지포구가 훨씬 크고 어판장도 잘 발달해 있었다.

지금은 새만금사업으로 흔적들이 지워지고 있지만 그곳 갯골에는 죽방렴만 막아도 조기들이 터지도록 들었고, 파도에 황금조기들이 밀려 장불에 널릴 정도였다. 마을 주민들은 1960년대 시작되어 1970년대 완공된 계화도간척사업 이후 이곳에서 조기가 자취를 감추었다고 한다. 서해의 바다생물의 70%가 일생에 한번은 갯벌을 거쳐간다고 한다.

갓고기들이 잡히지 않자 어민들은 많은 경비를 들여 큰 배를 지었다. 더 멀리 나가서 잡기 위해서였다. 파장금에 파시가 형성될 때만 해도 위도의 절집 내원암에는 뱃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선주들은 물때에 맞춰 출어를 앞두고, 아녀자들은 칠산바다에 조기잡이를 나간 자식과 남편의 안전을 기원하려는 정성이 줄을 지었을 것이다.

작고 아름다운 절집은 최근 전통사찰로 지정을 받았다. 요란하지도 않고 현란하지도 않다. 부처님을 모신 작은 절이지만 모퉁이를 둘아 몇 백 미터 올라가면 최근 불사를 해서 용왕을 모셔놓은 용신당이 있다. 일반 절집에서 보기 힘든 모습이다.

절집을 지키고 있는 스님은 이곳을 찾는 신도들에게 "부처님에게 절하지 말고, 바다에 절을 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이야기한다. 위도가 먹고사는 것은 다 저 바다 덕분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무리해서 용신당을 짓고 용왕을 모셨다.

많은 위도 사람들이 찬성하는 핵폐기장을 반대했던 것도 그 바다를 망치는 일은 위도사람을 죽이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 덕에 절집을 찾는 신도들의 발걸음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지만 진심을 머지않아 알아 줄 것으로 믿고 있다.

a 위도파시의 상징, 파장금

위도파시의 상징, 파장금 ⓒ 김준

조기 나가고 청어 들어오고

위도의 중심 포구가 치도리에서 파장금으로 옮겨갔다. 왜 옮겨갔을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풍선배가 동력을 갖춘 기계배로 바뀌고, 그물도 나일론으로 바뀐 것과 깊은 연관이 있다. 풍선배는 모래밭이나 자갈밭에 올려놓으면 그대로 정박이 가능하지만 기계배는 요즈음과 같은 선착장이 마련되어야 한다.

이렇게 어구를 바꿔야 했던 것은 사실 섬 주위에서 조기가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 멀리, 더 깊은 곳으로 더 오랫동안 바다에 머물러야 했기 때문에 배도 커지고 그물도 변했던 것이다.

고슴도치의 입에 해당하는 파장금은 섬의 북쪽에 위치해 북서풍의 영향을 크게 받을 수 있지만 식도, 정금도 등이 포구 앞에 위치해 바람을 막아주면서 물때와 관계없이 배들이 드나들 수 있어 포구로서 지정학적 조건을 갖추고 있다.

그후 칠산바다의 조기들은 나가고 다시 들지 않았다. 대신에 고깃배들의 그물질을 멈추지 않게 해 준 것은 청어였다. 파장금과 식도 주변에서 잡힌 청어가 파장금 '파수'(파시를 위도 주민들은 '파수'라 칭함)를 가능케 했다. 그렇다고 조기잡이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파장금 파시는 치도리와 달리 임시가옥이 아니라 가게가 만들어졌고, 철따라 주민들이 세를 받고 집을 내주기도 했다.

a 파장금 뒷골목에 남아 있는 요리집

파장금 뒷골목에 남아 있는 요리집 ⓒ 김준

a 여관, 술집, 요리집 등이 있었던 파장금 뒷골목

여관, 술집, 요리집 등이 있었던 파장금 뒷골목 ⓒ 김준

파장금 곳곳에 여관, 요리집, 술집 등 흔적

조기가 간혹 잡히기도 했지만 파장금 파시의 주역은 청어 외에 삼치, 고등어, 병치, 아지 등이었다. 특히 위도 사람들이 입맛을 다시는 아련한 기억은 '아지'였다. 고등어와 흡사한 아지는 위도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이야기하는 생선이다. 이들 생선들은 대부분 왕등도 바다에서 잡았다.

당시 그물은 흘림그물, 즉 유망(나가시배)과 저인망(우다시배)이었다. 이렇게 해서 장대, 꽃게 그리고 박대 등을 잡았다. 왕등도 인근에서는 유망을 이용해서 고기를 잡지만, 밖에서는 저인망배를 이용해서 잡았다.

부안보다는 법성포와 목포 그리고 군산에 돈줄이나 뱃길이 활발했던 파장금 사람들은 어구는 목포에서, 의류와 잡화는 군산에서 구입해 선원들에게 팔았다.

a 자손들은 어디가고 조상만 모셔놓았을까.

자손들은 어디가고 조상만 모셔놓았을까. ⓒ 김준

a 파장금 뒷골목 빈집에서 발견한 심수봉의 음반 1집 '나는 야구왕'(1987.8)

파장금 뒷골목 빈집에서 발견한 심수봉의 음반 1집 '나는 야구왕'(1987.8) ⓒ 김준

사실은 인근 어장에서 파시가 형성될 만큼 고기가 나지 않고, 고기를 잡는다 해도 이젠 직접 군산이나 목포, 심지어는 인천까지 가지고 갈 수 있을 정도로 기술이 발달했기 때문이다. 다만 파장금 곳곳에는 당시 여관, 요리집, 술집 등의 흔적들이 남아 있어 당시의 비릿한 생선포구로 번성했던 시절들을 이야기해주고 있다.

파장금 포구에서 그물을 손질하는 어민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어장(어획고)은 작년에 비해 반으로 줄어들었다. 당장이라도 고기잡이를 포기하고 싶지만 이것도 맘대로 할 수 없다. 배를 짓고 그물을 사고 어구를 준비하는데 적지 않은 돈을 정부(수협)에서 빌려다 쓴 탓에 사업을 포기하는 순간 차압이 들어오기 때문이다.

언감생심 이자를 갚기는커녕 새로 대출을 해서 출어 준비와 이자를 막고 있으나 새만금방조제가 막히면서 더욱 어려워지고 있다. 앞으로 파산이 줄지을 것이라 한다. 그래서 고기를 잡지 않더라도 배를 포기하지 못하고 명목은 어부로 살고 있는 것이다.

새만금으로 어장을 잃고, 핵폐기장으로 인심을 잃은 위도사람들의 고통과 아픔을 치유할 수 있는 대책을 마련하고 새로운 삶의 조건을 마련하는 것도 국책사업 못지 않게 국가와 사회가 나서야 할 일이 아닐까.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전라도닷컴' 7월호에 게재한 글입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전라도닷컴' 7월호에 게재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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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 년 동안 섬과 갯벌을 기웃거리다 바다의 시간에 빠졌다. 그는 매일 바다로 가는 꿈을 꾼다. 해양문화 전문가이자 그들의 삶을 기록하는 사진작가이기도 한 그는 갯사람들의 삶을 통해 ‘오래된 미래’와 대안을 찾고 있다. 현재 전남발전연구원 해양관광팀 연구위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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