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핵위기가 끌어낸 DJ의 '강연·회견 정치'

[정치 톺아보기 144] 김대중 전 대통령과 '시련의 10월'

등록 2006.10.19 16:44수정 2006.10.19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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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김대중 전 대통령 팔순잔치에서 강원룡 목사가 일어서서 축사를 하고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 팔순잔치에서 강원룡 목사가 일어서서 축사를 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김당


지난 2004년 1월 6일 저녁 서울시내 한 호텔에서 '국민의 정부 시절' 장·차관과 청와대 수석비서관을 지낸 150여명이 마련한 김대중(DJ) 전 대통령의 '팔순 잔치'가 열렸다.

이날 생일잔치에 참석한 '유일한 연장자' 고(故) 강원룡 목사는 "내가 6살이 더 많은데 나이 어린 사람의 생일날 축하인사를 하는 것이 결례라고 생각하지만 한 마디 하겠다"면서 "요즘 김 전 대통령이 너무 조심성이 많다"고 말해 DJ 퇴임 후의 '과묵한 처신'을 은근히 꼬집었다.

강 목사는 이어 "우리가 복잡한 나라여서 정치문제 개입하면 부당한 오해를 받을 수 있지만 2004년 한반도 역사는 김 전 대통령이 몸을 사려서는 안 된다"면서 퇴임 후 더 바쁘게 활동하며 부시 미국 대통령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의 사례를 거론하고 전직 대통령으로서 나랏일에 적극 개입해줄 것을 주문했다.

강연과 회견으로 빼곡하게 찬 DJ의 10월 대외 일정

강 목사는 특히 "남북문제는 나라의 운명과 관련돼 있을 뿐 아니라 동아시아와 세계평화와 직결돼 있다"면서 "여기에 김 대통령이 결실을 볼 수 있도록 적극적이고 책임 있는 참여를 해서 90세 생일 때는 남북의 평화적 통일이 이뤄지기를 바란다"고 거듭 적극적인 현실참여를 요청했다.

이에 대해 김 전 대통령은 "퇴임한 사람은 한계가 있으며, 현직을 맡은 사람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현직 대통령의 역할과 책임을 강조했다. 또 "국내정치는 물론 개입하지 않겠지만 남북문제와 세계평화를 위해 정부가 잘 해나가도록 격려하고 분수를 갖고 계속 노력하며 협조해 나갈 작정"이라고 역할과 한계를 분명히 했다.

그로부터 3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지금, 평생 동지였던 강 목사는 고인이 되었고 김 전 대통령은 연일 대학 강연과 언론 회견을 매개로 국민과 전세계와 직접 대화하며 '넓은 의미의 정치'를 하고 있다. 북한 핵실험이 낳은 절체절명의 위기의식이 김 전 대통령의 노구를 연일 공론의 광장으로 이끌고 있는 것이다.


올해 나이 여든 둘. 우리나라 사람들의 평균 수명에 견주어 흔치 않은 노익장이다. 더구나 김 전 대통령은 1주일에 두 번씩 인공 신장투석을 받고 있다. 통상 젊은이들도 신장투석을 하면 한나절은 꼼짝없이 누워서 쉬어야 한다.

그런데도 김 전 대통령은 지난 10월 3일 북한이 핵실험을 하겠다고 발표한 이후 거의 연일 대학 강연과 해외언론 인터뷰를 통해 국민과 전세계를 향해 평화적 해법의 메시지를 전파하고 있다. 최경환 비서관의 일정 메모에는 김 전 대통령의 10월 대외 일정이 이렇게 빼곡하게 적혀 있다.

▲3일 경향신문 창간 60주년 기념 인터뷰 ▲7∼9일 미국 CNN '토크 아시아' 프로그램 방영 ▲9일 경향신문 인터뷰 발간일 ▲10일 노무현 대통령의 진직 대통령 초청 오찬 및 광주 방문 ▲11일 전남대 초청 특별강연 ▲14일 로이터통신 인터뷰 게재일 ▲16일 <뉴스위크> 인터뷰 발간일▲18일 세계지식포럼 축사 ▲19일 서울대 개교 60주년 기념 초청 강연 ▲23일 한양대 최고위과정 초청 강연(김대중도서관) ▲28∼29일 목포 및 구목포상고 방문, 하의도 주민 만남



DJ가 직접 미 '네오콘' 책임론 거론할 만큼 위중한 상황

a 김대중 전 대통령은 14일, <르몽드 디플로마티크>(한국어판)와의 특별 인터뷰에서 "미국의 네오콘과 일본의 우파는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더 이상 북한을 악용하고 봉쇄해서는 안된다"고 밝혔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14일, <르몽드 디플로마티크>(한국어판)와의 특별 인터뷰에서 "미국의 네오콘과 일본의 우파는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더 이상 북한을 악용하고 봉쇄해서는 안된다"고 밝혔다. ⓒ 르몽드 코리아 제공


일종의 대국민 '강연정치'이자 '회견정치'이다. 그는 현직과 정치를 떠난 지 오래이지만 그의 지론대로 '정치는 살아있는 생물과 같아서' 북핵 위기가 그를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게 만든 것이다. 그만큼 상황이 위급하고 엄중하다는 얘기다.

그에 따라 화법도 전에 없이 직설적이어서 어떤 때는 '네오콘은 북한 문제에서 손을 떼라'는 식으로 '노무현식 어법'을 구사하기도 한다.

이에 대해 최경환 비서관도 "그동안 조심스럽게 접근해오신 것이 사실이지만 상황이 엄중하고 또 민족문제는 거리낌없이 말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고 계신 것으로 안다"고 배경을 설명했다.

돌이켜보면 DJ의 직설화법을 동원한 '강연 및 회견 정치'는 지난 9월부터 시작되었다.

김 전 대통령은 9월 15일 창간된 <르몽드 디플로마티크>(한국어판)와의 특별 인터뷰에서 남북한과 미국 정부 그리고 세계의 양심 세력들에게 "미국의 네오콘이 북한을 악용하고 있다"며 "북한 문제는 한국의 의견을 존중해 달라"고 호소했다.

또 그는 이날 부산대 초청 특별강연에서 "북한의 위조지폐 문제에 대해서는 6자회담의 성공을 위해서 당분간 보류하든지, 아니면 그 증거를 명확히 제시해서 북한으로 하여금 조속하고 완전한 시정조치를 취하게 하든지 해서 위폐문제가 더 이상 6자회담의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처리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DJ 핵심 참모들이 북핵 문제에 있어 '네오콘'(neocons, 공화당을 중심으로 한 미국의 신보수주의자들) 책임론을 거론한 적은 있지만, DJ의 '입'에서 직접 네오콘 책임론이 나온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는 "미국의 네오콘과 일본의 우파는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더 이상 북한을 악용하고 봉쇄해서는 안된다"면서 이같이 밝혔다.

그 이전까지는 그는 6·15 공동선언 6주년 기념 행사와 6월로 예정했던 2차 방북이 무산된 이후 석달 간 침묵을 지켜왔다. 돌이켜보면 그것은 북한과 미국 모두에 대한 일종의 '침묵 시위'였다.

6월 2차 방북 무산 이후 석 달 만에 침묵 깬 DJ의 '강연·회견 정치'

이윽고 그는 석달 만에 침묵을 깨고 "한반도에 다시는 전쟁이 있어서는 안 된다"면서 북미 직접 대화를 촉구하고 나섰다. 그는 "한미 동맹은 평화를 위한 것이지 전쟁을 위한 게 아니다"면서 "이제는 미국이 대화에 나서야 할 차례"라고 거듭 역설했다.

그때만 해도 아무도 한반도에서의 '전쟁'을 입밖에 내지 않을 때였다. 주변 4강의 틈바구니에서 한반도의 통일과 민족의 장래를 오래 천착해온 그의 본능적 안보 감수성이 작동한 결과였을 것이다.

그는 9월 23일 CNN의 '토크 아시아' 프로그램에 출연(방영은 10월 7∼9일)해서는 미국에 북한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줄 것을 호소했다. 그는 "(미국이) 북한의 안전을 보장하고 경제적인 제재를 해제해서 국제사회에 나오도록 해주어야 한다"면서 "북한에게 한 번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말해 미국의 결단을 촉구했다.

미국에 무조건적인 양보를 요청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그렇게 해주었는데도 (북한이) 만일 약속을 안 지키면 그때는 6자회담에 참가한 북한을 뺀 나머지 5자가 북한을 제재해야 한다"면서 "그때는 중국도 반대하지 못할 것이고 우리도 반대하지 못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공교롭게도 <경향신문>과 창간 60주년 기념 인터뷰를 진행한 10월 3일은 북한이 핵실험을 하겠다고 발표한 날이었다. 또 공교롭게도 그 창간 기념 인터뷰가 게재된 신문이 발간된 10월 9일에는 북한의 핵실험이 실시되었다.

그는 <경향신문> 인터뷰에서 북한에 대해 "특히 BDA(방코델타아시아) 문제는 (미국에게) 증거가 있으면 내놔라, 그러면 처리하겠다고 6자회담 가서 얘기해야죠"라고 비판하는 한편, "미국도 미흡하다"면서 "있으면 증거를 내놓아 북한을 책임지게 만들고, 없으면 BDA를 해결해줘야 하는데 잘 안 되고 있다"고 미국을 비판했다.

DJ "햇볕정책이 실패했다는 것은 해괴한 이론"

a 11일 오전 전남대 강연에 나선 김대중 전 대통령.

11일 오전 전남대 강연에 나선 김대중 전 대통령. ⓒ 광주드림 안현주


9일 북한이 핵실험을 강행하자 '희생양'을 찾는 보수세력의 비난의 화살은 DJ의 '햇볕정책'에 집중되었다. 햇볕정책을 승계해 평화번영정책을 추진해온 노무현 대통령조차도 대북포용정책의 변화를 예고했다.

대북포용정책의 지속을 강조하며 노 대통령의 'U턴'에 누구보다도 먼저 제동을 걸고 나선 것은 DJ 자신이었다. 이를 두고 일부 언론에서는 'DJ가 직접 햇볕정책 지키기에 나섰다'고 묘사했다.

그는 11일 전남대 강연에서는 노 대통령이 포용정책 수정 가능성을 언급한 것과 관련 "요새 해괴한 이론이 돌아다니고 있다"면서 "만만한 것이 햇볕정책이냐"고 말해 불편한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그는 특히 "북한이 핵 개발한 것은 미국이 못살게 굴고 살길을 안 열어주기 때문이라고 (북한) 스스로 말하고 있다"면서 "북의 핵실험은 (햇볕정책 때문이 아니라) 미국의 핵 정책이 실패했음을 입증하는 것"이라고 미국에 직격탄을 날렸다.

14일 로이터 통신과의 서면 인터뷰에선 "미국은 북한과의 대화를 거부함으로써 많은 것을 잃었다"며 북핵 실험에 대한 미국 책임론을 거론하며 "미국 정부는 평양이 바라는 안전 보장과 금융 제재의 해제를 제공해야 하고, 북한은 핵프로그램을 중단해야 한다"고 거듭 양자 대화를 촉구했다.

또 16일 미국 시사주간지 <뉴스위크>와의 회견에선 "미국이 대화를 거부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워싱턴과 평양간 협상의 시동을 걸기 위해 (미국의) 고위급 대북특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더 나아가 "대북특사는 미국 정부가 가장 신임하는 미국의 지도자가 가는 것이 좋다"며 "그런 의미에서 제임스 베이커 전 국무장관이 좋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간의 특사론에서 한 발 더 나아가 구체적으로 베이커 전 국무장관을 지목한 것이다. DJ는 94년 1차 북핵 위기 때도 미국 내셔널프레스클럽에서 연설하면서 북핵 문제 해법으로 '포괄적 타결 방안'을 제시하며 카터 전 대통령을 대북특사로 파견할 것을 제안해 결국 카터의 방북 및 김일성 주석과의 회담을 통해 위기를 해소한 바 있다.

DJ "악마와도 대화해야 한다"

그는 18일 서울에서 열린 '세계지식포럼'에 참석해서는 심지어 "악마와도 대화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미국이 북한과의 대화를 거부해 북한의 NPT(핵확산금지조약) 탈퇴와 IAEA(국제원자력기구) 요원 추방, 미사일 발사와 핵 실험 강행으로 이어졌다고 전제하고, "대화는 친구를 사귈 때만 하는 것이 아니다"면서 "국가 이익이나 세계평화에 필요하면, 악마와도 대화를 해야 한다"고 거듭 직접 대화를 호소했다.

그는 미국의 역대 대통령 사례를 들어가며 "미국은 악을 행한 자와 대화할 수 없다고 한다"면서 "하지만 아이젠하워는 북한과 전쟁 중에 대화했고, 닉슨은 중국과 레이건은 소련과 대화해 개혁과 개방으로 이끌었다"고 덧붙였다. 부시에게 북한(김정일)과 대화해 개혁개방으로 이끌라는 충고이자 압박이다.

19일 서울대 강연에서도 그는 냉전시대 아이젠하워, 닉슨, 레이건 전 대통령 등 공화당 출신 전직 미국 대통령들의 공산국가와의 대화 노력을 언급하면서 "왜 같은 공화당 출신인 부시 대통령만 북한과 대화를 못한다는 말이냐"고 반문하면서 "도대체 핵 문제 당사자간에 대화조차 하지 않겠다는 것은 납득할 수 없는 일"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개성공단, 금강산관광 사업 중단 논란과 관련해서도 "개성공단과 금강산관광은 우리가 북측으로 각기 5km, 10km까지 진출한 것이고 휴전선이 그만큼 북쪽으로 올라간 것이며 이는 우리 안보에 지대한 도움을 주고 있다"면서 "(대북) 경제진출은 남북이 이익을 보는 '윈-윈'의 협력관계"라고 말해 사업 중단에 대한 반대의사를 분명히 밝혔다.

한 달간의 강연·회견 정치에서 관통하는 일관된 흐름은 제재보다는 대화, 전쟁이 아닌 평화적 해결이 북핵 위기를 푸는 열쇠라는 것이다. 그는 특히 "이번 북핵 위기를 막는 데 실패하면 제2차 한국전쟁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하면서 북한과 미국의 '공동책임'을 들어 양자 대화를 촉구하고 있다.

DJ의 적극적인 행보에 대한 양극단의 평가

그러나 이러한 김 전 대통령의 적극적인 행보에 대한 평가는 현재의 북핵 위기를 바라보는 두 시각만큼이나 양극단이다. 한쪽에서는 남북한 화해협력과 평화통일에 대한 DJ의 마지막 열정과 헌신이라고 높이 평가하는 반면에 다른 한쪽에서는 노벨평화상을 안긴 '햇볕정책'을 지키기 위한 몸부림이라고 폄하한다.

더구나 정계개편을 앞둔 현실정치는 그의 일거수 일투족을 '제 논에 물대기' 식으로 마구 끌어다 쓴다. DJ의 햇볕정책과 노선을 계승한 적통자임을 두고 다투는 민주당과 열린우리당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한나라당까지도 '노무현 대통령의 평화번영정책이 햇볕정책을 망쳤다'는 논리를 내세운다.

DJ가 오는 29일 정치적 고향인 목포를 방문하는 것을 두고서도 정치적 근거지 방문을 통한 햇볕정책 적극 옹호라는 시각에서부터 다음 대선을 겨냥한 정계개편론에 힘을 실어주기 위한 행보라는 시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관점이 중첩되고 있다.

DJ는 정치를 떠났지만 오히려 정치가 그를 가만히 놔두고 있지 않은 것 같다. 그에게는 이래저래 '시련의 10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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