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춘지절(立春之節)에 만났던 제주의 꽃들

[달팽이가 만난 우리꽃 이야기 96] 입춘화

등록 2007.02.05 14:04수정 2007.02.05 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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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유채꽃 만발한 종달리

유채꽃 만발한 종달리 ⓒ 김민수

드디어 봄, 입춘이다. 봄은 남녘에서부터 서서히 올라온다. 입춘의 증거를 눈으로 보고 싶어 가까운 산을 찾았지만 서울의 봄은 아직 멀었는지 로제트형의 냉이만 겨울을 나기 위해 몸부림 친 흔적을 안고 벌겋게 달아올라있을 뿐이었다. 오랜만에 날씨는 겨울을 떨쳐버리려는 듯 따스했고, 산행을 나온 이들의 옷차림도 한결 가벼워졌다.


제주가 그리웠다. 이맘때면 활짝 피어난 유채꽃들이 봄바람에 살랑거리고, 바다 내음과 함께 후각을 자극하곤 했다. 자꾸만 봄이 오는 들판으로 유혹하던 봄, 그 봄이 그리워 입춘지절에 만났던 제주의 꽃들을 하나 둘 꺼내보았다.

a 눈을 녹이고 피어나는 세복수초

눈을 녹이고 피어나는 세복수초 ⓒ 김민수

제주의 봄을 상징하는 꽃은 무엇일까? 유채꽃과 더불어 세복수초는 빠지지 않는 단골손님이다. 유채꽃은 흔하게 만나기도 하지만 사람의 손길을 탄 꽃이니 야생화 중에서는 단연 세복수초가 제주의 봄을 상징하는 꽃이 아닐까 싶다. 제주의 오름 따스한 분화구안에서 입춘이 오기도 전에 피어나 입춘을 불러오는 꽃, 그가 영원한 행복이라는 꽃말을 가진 세복수초다. 얼음새꽃, 눈새기꽃 그 이름도 정겨운 봄꽃, 그가 피어난 노란 숲 속에 누워 파란 하늘을 바라보고 싶다.

a 뜰에 가득하던 금잔옥대 수선화

뜰에 가득하던 금잔옥대 수선화 ⓒ 김민수

이듬해 12월초면 어김없이 피어나 제주를 은은한 향기로 채우곤 하던 수선화, 내가 살던 집 뜰에는 유난히 금잔옥대 수선화가 많았다. 그 향기에 취해 가는 겨울이 아쉬울 정도였다. 아무리 그래도 봄이 오면 다른 봄꽃들에게 자리를 빼앗길만한데 피어있는 동안은 여전히 아름다운 모습 그대로 사람의 눈길을 잡는다.

a 때이른 명자나무의 꽃은 붉은 빛 대신 겨울눈의 하얀빛을 닮았다.

때이른 명자나무의 꽃은 붉은 빛 대신 겨울눈의 하얀빛을 닮았다. ⓒ 김민수

바보 꽃들은 어디에나 있다. 붉디붉은 명자꽃도 한 겨울에 피어나면 하얀 눈빛을 담고 피어나는가 보다. 입춘이면 막 꽃망울을 송글송글 맺기도 하고, 성급한 것들은 이미 피어나 봄을 바라보고 있다. "봄이 온다!" 소리라도 지르려는 듯, 그 소리에 겨울잠에서 미쳐 깨어나지 못한 뭇 생명들이 기지개를 피는 듯 하다. 풀꽃뿐만 아니라 나무 꽃까지 피어나면 정말 봄이다.

a 겨울꽃 동백-겨우내 피고지기를 반복하며 봄을 맞이한다.

겨울꽃 동백-겨우내 피고지기를 반복하며 봄을 맞이한다. ⓒ 김민수

동백은 겨울 꽃이라고 해야할까? 낙화한 후에도 눈 시리게 아름다워 눈물이 날 것만 같은 꽃, 동백이 눈물을 뚝뚝 흘리며 떨어지는 날 동백나무에는 동박새가 찾아와 슬피 운다. 그러나 "슬퍼하지 말아라, 슬퍼하지 말아라" 한다. 그들이 있음으로 인해 또 피어나는 꽃들이 있으니.

a 매화꽃 만발한 사찰

매화꽃 만발한 사찰 ⓒ 김민수

설중매라고도 부르는 매화, 나뭇가지에 푸릇푸릇 봄물이 들면 이내 감추었던 꽃망울을 하나 둘 내고 봄의 소리를 담아 하나 둘 터진다. 입춘, 서울의 앙상한 나뭇가지에도 푸릇한 봄물이 들었다. 어김없이 봄이 가면 봄이 오는 구나, 그것이 너무 감사하다.


a 변산바람꽃은 제주에도 피어난다.

변산바람꽃은 제주에도 피어난다. ⓒ 김민수

봄바람 타고 피어나는 바람꽃, 작은 바람에도 살랑살랑 흔들리는 꽃이다. 흔들리지 않고 피어나는 꽃이 없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내 삶에 작은 바람이라도 불어오면 마치 광풍이라도 풀어오는 것처럼 호들갑을 떨며 살아간다. 간혹 꽃샘추위에 온전히 피어나지도 못하고 내년을 기약하기도 하는 바람꽃, 그 작은 꽃을 겨울이 어찌하랴.

a 분홍새끼노루귀-중산간지역에 이들이 피어나기 시작하면 봄이다.

분홍새끼노루귀-중산간지역에 이들이 피어나기 시작하면 봄이다. ⓒ 김민수

중산간 풀숲에 가득하던 하얀 새끼노루귀와 분홍새끼노루귀, 그때는 청노루귀가 보고 싶었다. 지천에 가득한 행복덩어리들을 온전히 누리지 못하고 멀리 있는 것만 그리워하다 정작 청노루귀를 만나는 곳에 서고 보니 분홍노루귀를 만날 수가 없어 그를 그리워한다. 사람이란 그런가 보다. 몰라서가 아니라 알면서도 그렇게 살아가는 것인가 보다.


a 광대나물-텃밭에 지천으로 피어나던 꽃도 헤어져 있으니 귀하다.

광대나물-텃밭에 지천으로 피어나던 꽃도 헤어져 있으니 귀하다. ⓒ 김민수

텃밭에 지천으로 피어나 발에 밟히면서 피어나던 광대나물, 그를 만난 지가 일년이 다 되어 간다. 이사하던 날, 마지막으로 눈맞춤을 했던 꽃 중의 하나인 광대나물, 지금도 양지바른 곳에 옹기종기 모여 피어났을 터인데 이젠 누가 그들과 눈맞춤을 할까? 혹시라도 눈맞춤 해주는 이가 없어, 눈 맞춤 하러 오는 중 밟는 이도 없어 슬퍼하는 것은 아닐까?

a 개구리발톱-양지에서는 한 겨울에도 겨울잠도 자지 않고 피어난다.

개구리발톱-양지에서는 한 겨울에도 겨울잠도 자지 않고 피어난다. ⓒ 김민수

유채꽃, 세복수초, 수선화, 명자나무, 동백, 매화, 변산바람꽃, 분혼새끼노루귀, 광대나물 그리고 개구리발톱, 이 모든 꽃들은 입춘지절 제주에서 만날 수 있는 꽃들이다. 어떤 것은 눈만 들어보면 보이고 어떤 것은 조금 몸을 낮춰야 보이기도 하고, 어떤 것은 풀섶 사이 보물찾기하듯 보아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입춘이 지나고 하루 이틀 날이 더해질수록 봄은 하루 이틀만큼 우리 곁으로 다가올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 '벌써 봄이네!' 하지 말고 올해는 오는 봄을 천천히 바라보자. 봄이 어떻게 오는지 천천히 바라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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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소재로 사진담고 글쓰는 일을 좋아한다. 최근작 <들꽃, 나도 너처럼 피어나고 싶다>가 있으며,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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