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전 로마에도 탐정이 있었을까

[불멸의 탐정들 20] 디디우스 팔코

등록 2008.01.17 16:46수정 2008.01.17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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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실버피그> 디디우스 팔코 시리즈 1편

<실버피그> 디디우스 팔코 시리즈 1편 ⓒ 황금가지


2000년 전 서기 1세기의 로마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제정 로마의 9대 황제인 베스파시아누스가 제위에 오른 것은 서기 69년이다. 당시 로마제국은 광활한 영토를 보유하고 있었다. 동쪽의 시리아부터 서쪽의 히스파니아(스페인)까지가 로마제국의 속국이었다.

베스파시아누스의 아들인 티투스가 유대전쟁을 승리로 이끌었기 때문에 제국의 동방도 안정된 듯이 보였고, 브리타니아(영국)를 공략하는 과정도 꾸준히 이루어지고 있었다.


반면에 이즈음 로마의 국내정세는 그다지 안정적이지 못했다. 서기 69년 한 해에만 황제가 세 차례 바뀌었다. 6대 갈바, 7대 오토, 8대 비텔리우스를 거쳐서 9대 베스파시아누스가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 갈바는 살해당하고 오토는 자살했다.

그리고 비텔리우스도 살해당했다. 내전이 일어났고 신전은 파괴되고 불타올랐다. 그 다음에 황제가 된 인물이 베스파시아누스다. 이런 일들이 모두 서기 69년 한 해 동안 일어났다. 이 한 해 동안 수도 로마의 시민들은 무척 혼란스러운 나날을 보냈을 것이다.

이렇게 혼란스러운 시기였던 만큼 황제의 자리를 둘러싼 음모도 있었을 테고, 불안한 치안을 틈타 시장이나 광장에서 다른 사람의 재물을 노리는 사람도 많았을 것이다. 서기 69년은 로마시민들에게 돌이키기 싫은 악몽의 해였을지 몰라도, 상상력 풍부한 작가에게는 좋은 소재를 제공해주는 시기이지 않을까.

베스파시아누스 황제 시절 혼란스러운 로마

영국작가 린지 데이비스가 만든 탐정 디디우스 팔코가 활동했던 시기도 바로 이 시기다. 서기 70년, 베스파시아누스가 황제에 오른 직후다. 베스파시아누스는 혼란기를 거쳐서 황제가 되었지만, 모든 로마인들이 그를 믿고 따르는 것은 아니다. 뒷전에서 반란을 꿈꾸는 귀족도 있고, 이때를 틈타서 부정한 방법으로 한밑천 챙기려는 사람들도 있다. 로마의 밤거리는 여전히 위험하고, 낮에도 혼자 안심하고 돌아다니기 힘든 구역도 있다.


이런 시기인 만큼 로마에도 탐정이 필요했을 것이다. 지역수비대만으로 로마의 치안이 안정되지 못한다면, 사설탐정이라도 나서야 했을지 모른다. 게다가 로마의 서민들은 무척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다. 당시 대다수 로마시민들은 빚을 가지고 살고 있었다.

신전 청소부에서 집정관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사람들이 대출에 의존해서 사는 셈이다. 부유한 사람들은 자신의 재산을 담보로 대출받을 수 있지만, 서민들은 그러기도 힘든 처지다. 가난한 사람들은 아들을 검투사로, 딸을 매춘부로 팔아서 생계를 연명하는 악순환이 계속 되었다.


로마의 사설탐정 마르쿠스 디디우스 팔코는 이런 현실에 분개해서 일어난 인물이다. 하지만 그의 처지도 별볼일 없다. 그는 혼자서 로마의 가난한 동네인 아벤티누스 구역의 한 아파트에 세들어 살고 있다.

어머니와 5명의 결혼한 누이들, 20명 가까운 조카들이 있지만 그는 자신의 일을 위해서 따로 나와 살고 있다. 아버지는 팔코가 7살때 '체스 한판하러 간다'라고 말하고 나간 뒤에 소식이 없다. 형이 한 명 있었지만 유대전쟁 도중에 전사했다. 이제 30살인 팔코는 결혼도 하지 못한 채 이런 대가족의 기둥이 된 셈이다.

팔코가 하는 일도 별로 보잘 것 없다. 팔코는 자신을 가리켜서 '정보원'이라고 소개한다. 사람들이 의뢰를 하면, 그 일을 하고 대가를 받는 것이 팔코의 수입원이다. 하지만 팔코는 그다지 지명도가 있는 정보원이 아니라서 돈 되는 일을 많이 의뢰받지 못한다. 기껏해야 가정문제와 관련된 정보수집을 하는 것이 전부다.

예민한 아버지를 대신해서 사윗감을 조사한다든지, 유산과 함께 물려받아야 할 빚이 있는지를 조사한다. 도난당한 예술품을 되찾기도 한다. 징병기피자, 빚 수금과 관한 일은 취급하지 않는다. 그나마 이런 일도 잘 들어오지 않는다.

혼란기 로마에서 활동하는 가난한 탐정 팔코

a <베누스의 구리반지> 디디우스 팔코 시리즈 3편

<베누스의 구리반지> 디디우스 팔코 시리즈 3편 ⓒ 황금가지


허름한 아파트 6층에 있는 팔코의 사무실 겸 집은 그래서 썰렁할 때가 많다. 팔코에 표현에 의하면, 사무실에 있는 것은 죽은 빈대들이 섞인 흙이 발라진 벽뿐이다. 집세도 제대로 내지 못해서 수개월간 연체되고, 그 때문에 집주인이 팔코를 보면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기도 한다.

팔코가 이런 정보원 일을 시작한 것은 5년 전이다. 그전에는 브리타니아에서 7년 동안 군복무를 한 경력이 있다. 상이병으로 제대했고 춥고 습한 지역인 브리타니아에서의 생활을 어두운 기억으로 가지고 있다.

당시의 로마는 계급사회였다. 귀족, 중산계급, 자유시민, 노예 등의 계급으로 나뉘어진 사회다. 자유시민 신분의 남자가 중산계급의 여자를 넘본다는 것은 상상하기도 힘든 일이다.

팔코는 이런 자유시민의 신분이다. 노예의 신세는 아니지만 돈벌이가 시원찮기 때문에 그보다 특별히 더 좋을 것도 없다.

자유시민이 중산계급으로 오르기 위해서는 40만 세스테르티우스(로마의 화폐단위)의 돈이 있어야 한다. 팔코의 1년 생활비는 약 1천 세스테르티우스다. 이 정도면 팔코의 신분과 중산계급의 신분 차이가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다.

하지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가진 자들의 욕심은 끝이 없는 법. 당시 로마에서도 중산계급의 사람들은 자신의 위치에 만족하지 못한다. 중산계급의 사람들은 어떻게든 서민들에게 돈을 뜯어내서 한 단계 더 신분상승을 하려 한다.

서민들을 상대로 고리대금업을 하고 부동산을 임대한다. 대출금이 연체되면 가혹한 방법으로 돈을 징수한다. 팔코는 이런 중산계급의 사람들을 증오한다. 임대업을 가리켜서 더러운 전염병같은 것이라고 하고, 시내에는 사회 기생충들이 득실거린다고 말한다. 제정로마에 반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로마는 공화정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당당하게 주장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팔코가 세상에 대한 분노로 뭉친 인간은 아니다. 서른 살의 젊은 나이인만큼, 그도 사람들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유머감각을 잃지 않는다. 친구와 함께 포도주를 마시면서 기분좋게 취하고, 술집에서 괜찮은 여종업원에게 농담을 건네기도 한다. 조카들을 자상하게 돌봐주는 좋은 삼촌이기도 하다. 빈민가의 허름한 아파트에서 산다는 것만 빼면, 수입이 별로 없다는 것만 빼면 그럭저럭 살아가는 인생인 셈이다.

소설로 복원한 2000년 전의 로마

그러던 어느날 팔코에게 색다른 일이 터진다. 첫 번째 작품인 <실버 피그>에서 팔코는 귀족출신의 한 소녀를 우연히 만나고 이때부터 잔인한 살인과 기이한 음모 속에 휘말려들게 된다. 가정문제만 추적하던 팔코가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를 만나는가 하면, 그의 아들인 티투스와 함께 술을 마시기도 한다. 팔코는 이것을 기회로 돈벌이와 신분상승을 함께 이룰 수 있을까.

물론 로마의 기득권층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다. 팔코는 로마제국을 둘러싼 음모를 파헤치기 위해서 동분서주한다. 하지만 팔코가 가는 길은 고난의 연속이다. 정체모를 사람에게 두들겨 맞는가 하면 칼에 찔리기도 한다. 자유를 박탈당하기도 하고 강제노역장에 끌려가기도 한다. 로마의 뒷골목만을 누비고 다녔던 팔코가 넓은 세상으로 나오자마자 온갖 악전고투를 겪는 것이다.

<실버 피그>에서 시작되었던 귀족들의 음모는 <청동조각상의 그림자>로까지 이어진다. 팔코는 자신에게 부여된 임무를 무사히(?) 마치지만, 그 보상은 보잘것없다. 팔코는 항상 공화정을 주장했지만, 그의 활동은 결과적으로 황제의 권력을 확고하게 만들어주는 것이었다.

정치판에 환멸을 느낀 팔코는 다시는 정치에 개입하지 않겠다고 다짐할 정도가 된다. 그래서 팔코는 세번째 작품 <베누스의 구리 반지>에서 다시 현실로 돌아온다. 광활한 로마제국의 영토가 아닌, 냄새나고 더러운 로마의 골목으로 돌아온 셈이다.

하지만 로마의 골목에서도 환멸을 느끼기는 마찬가지다. 로마시내의 거리는 그 시대의 추한 모습을 가지고 있다. 테베레 강 너머의 비참한 빈민가, 담보사기로 돈을 긁어모으는 중산층, 계약에 문제가 있다는 이유로 노점상을 쓸어버리는 임대업자, 재개발을 위해서 세입자가 살고 있는 건물을 통째로 무너뜨리는 건물주 등.

팔코는 탐욕스럽고 비열한 유산계급에게 분노를 느낀다. 하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자신은 사건을 의뢰받아서 해결하고 그 보상금으로 하루하루 살아갈 뿐이다. 세상에 대한 분노를 터뜨리기보다는, 집으로 돌아가서 휴식을 취하는 것을 택한다. 하나의 일이 끝나면 당분간은 일도 없고 의뢰자도 없고, 이 사회에는 정의도 없기 때문이다. 아니면 팔코의 말처럼, 정의란 오직 부유한 사람들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실버 피그 - 로마의 명탐정 팔코 1

린지 데이비스 지음, 정회성 옮김,
황금가지, 2005


#추리소설 #디디우스 팔코 #린지 데이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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