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시음한 한중일 술, 중국 소흥주, 해남 진양주, 일본 니이가타 술.
국립아시아문화전당
나는 술을 천착하면서, 술로 이름을 얻은 지역을 제법 떠돌았다. 우리나라에서 술로 이름을 얻은 고장으로는 홍주의 진도, 소주의 안동, 막걸리의 포천을 꼽을 수 있다. 근자에 주목받는 동네로는 한산 소곡주의 충남 서천, 오미자로 막걸리와 과실주와 맥주 제조장까지 생긴 경북 문경, 두견주와 막걸리로 강세를 보이고 있는 충남 당진을 꼽을 수 있다. 술을 자산으로 삼은 지역들이 생겨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일본과 중국에 견주면, 한국의 술은 아직 관광 자원으로까지 떠오르지는 않았다.
일본은 술로 특성화가 많이 돼, 다른 상품들과 견줘도 가장 세련되고 완성도가 높은 상품으로 자리매김돼 있다. 술의 관광지로 고베의 나다, 교토의 후시미, 히로시마의 사이조 마을 들을 꼽을 수 있고, 니이가타의 사케노진처럼 지역을 기반으로 한 성공적인 축제도 생겨났다.
중국에서는 고속도로를 달리다보면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게 술 광고판이다. 술이 국가 기간 산업이라고 여겨질 정도다. 마오타이를 생산하는 구이저우(貴州)성 마오타이진에는 1000개의 양조장이 있고, 쓰촨(四川)성 우량예(五粮液) 양조장에는 3만 명의 직원이 있으며, 8월에 산둥(山東)성에서는 칭타오 맥주 축제가 열린다.
세계를 여행하다 보면 술 마을이나 양조장들이 지역 음식과 지역 문화와 버무려져 관광 자원이 되고 축제가 되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현대 사회에 들어 교통과 통신 수단이 발달하면서 지역의 경계가 희미해졌지만, 그럴수록 다른 한편에서는 지역 정체성을 강화하는 노력들이 이뤄지고 있다. 지역 축제를 열고 사투리나 특산물을 부각시키는 것은 그 때문인데, 이때 지역 명주가 있으면 당당하게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술은 농산물의 가공 상품이고, 부피 대비 고가의 상품이고, 가방에 담기 쉽고 오래 보존할 수 있어서 기념품 가게나 면세점의 인기 품목이 돼 있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의 강연 요청을 받고서, 나는 '광주에서 어떻게 아시아의 술을 말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컸다. 우선 광주에는 광주의 술이 없다. 김치 축제가 열리고 맛깔스러운 음식들이 인정과 함께 넘쳐나지만, 광주를 대표하는 술이 없다.
서울의 장수 막걸리와 같은 계통의 무등산 막걸리가 있긴 한데, 광주 사람 누구도 그 술이 광주의 술이라고 자랑하는 걸 보진 못했다. 그저 광주에서 만들어지고 있을 뿐이지, 광주 인근의 농산물이나 기법이 담기지는 않았다. 그런 이유도 있고, 또 한·중·일의 곡물 발효주(곡물을 재료로 발효한 그대로를 여과한 술)들을 나란히 놓고 시음하고 싶어서 광주에서 멀지 않은 지역의 대표적인 곡물 발효주인 해남 진양주를 시음 대상으로 삼았다.
진양주는 찹쌀과 누룩과 물로 빚은 황금빛이 도는 약주다. 진양주는 200년 전 궁녀 최씨가 궁궐을 나온 뒤에 영암 광산 김씨의 소실로 들어오면서 민가에 전해졌는데, 광산 김씨 집안의 딸이 해남 계곡면 덕정리로 시집오면서 해남 술이 됐다. 진양주는 경주교동법주와 더불어 약재가 들어가지 않은 한국의 대표 술로 꼽힌다. 약재가 안 들어가는데도 진양주나 경주교동법주를 약주라 부르는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는 술을 약처럼 여겨온 전통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