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어린 연인에게 보내는 편지 2

‘평화의 마을’에서 내 품으로 날아온 작은 천사

등록 2000.07.31 16:36수정 2000.07.31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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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만들기 캠프는 겨울의 가족음악회로 이어졌습니다. 가족을 맺은 사람들이 서로 다시 만나는 자리였지요. 신촌의 창천교회를 빌리고 올챙이 아저씨 박경호 선생님이랑 정애리 씨의 사회로 아이들이 가족을 위해 준비한 작은 공연이었습니다. 캠프에는 참석하지 못했지만 동수랑 저도 그 음악회의 주인이었습니다.


동수를 만날 생각에 들떠서 신촌으로 달려가던 그 날, 하늘에선 조금씩 눈까지 내려주고 있었습니다. 오늘은 날 보고 웃어 주겠지, 저를 데려가 재우려고 방 청소도 깨끗이 하고 내일은 서울랜드에도 함께 갈 거니까 날 보고 좋아해 주겠지, 하는 기대를 하며 걸어가는 발걸음은 그저 가볍기만 했습니다.

조그만 옷을 지어입고 무용을 하고 노래를 하는 평마 아이들 모습은 말 그대로 천사의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하지만, 3시간 정도 계속된 그 공연 내내 제 마음엔 먹장 구름이 가득했습니다. 어찌된 셈인지 동수는 여전히 저를 피하기만 했던 겁니다. 제가 저를 보지 않을 땐 분명히 내가 앉은 곳을 바라보고 있다가 제가 동수가 있는 곳으로 고개를 돌리면 황급히 머리를 숙이거나 옆으로 고개를 돌려버리는 것이었지요.

게다가 반가운 마음에 달려갔을 때는 또 저만치 달아나 다른 아이들 틈에 숨어 버리는 겁니다. 다른 가족들은 전부 아이를 무릎에 앉히고, 다정한 얘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녀석은 아니었습니다. 제가 성급한 기대를 했던 게지요.

녀석은 나를 피해, 한 달 넘게 땀 흘리며 준비한 무대에 아예 올라가지도 않았습니다. 가족과 함께 서서 노래하는 시간에는 아예 저만치 구석 자리에 머리를 박고 발장난에만 열심이었지요. 감히, 버림받은 기분이 어떤 것인지 알 것 같았단 말을 하고 싶습니다.

그 아이, 동수는 내게 지금의 내가 얼마나 행복한가를 알게 하고 사람들과 어떻게 관계맺을 것인가를 가르쳐 주기 위해 내게 온 천사임이 분명했습니다. 그걸 배우느라, 저는 많이 아파야 했습니다. 내내 피해 다니는 동수에게 사정 또 사정을 해서, 겨우 우리 집으로 데려갔습니다. 그 날 일기에 저는 이렇게 적어 놓고 있습니다.

“평마음악회에서 동수를 다시 만나다. 동수네 방 선생님께 여쭤서 동수 운동화가 낡았다는 정보를 입수하곤 운동화랑 장갑이랑 사서 신나게 달려갔으나, 녀석을 여전히 나를 피해 저만큼 달아나기만 했다. 처음 만났을 때도 내내 도망만 다니더니 여전했다. 괜히 눈물이 나려고 했다.


당연히 나를 좋아하고 받아줄 거라 믿었던 섣부른 기대에 동수는 참으로 냉정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 아이에게 아무 것도 아닌 주제에 나를 좋아해 주길 바라고 기대했다. 별다른 노력 없이도 사랑을 얻을 수 있다고만 생각했다. 스스로의 모자람은 보지 못하고 동수가 비뚤어져서, 혹은 사랑받는 법을 몰라서 그렇다고만 쉽게 떠넘기려 했다.

외면받는 자의 자리에 처음으로 서 본다. 내 섣부른 이기심, 버려야 함에도 그러지 못하고 동수에게 또 다른 상처가 될지 모른다는 걸 생각지 못하고…. 안 오겠다는 걸 조르고 졸라서 겨우 우리 집까지 형빈이랑 준형이랑 현미랑 호철이랑 다같이 데리고 왔다. ……쉽게 잠들지 못하고 자꾸만 왔다갔다 하는 형빈이 녀석도, 우리 집에 오기 싫다고 눈물까지 흘리던 동수 녀석도 잠은 쌕쌕 이쁘게도 잘 잔다….”

그렇게 밤을 보내고 다음 날, 「작아」식구들이랑 함께 아이들 데리고 서울랜드에 가서 하루 종일 아이들보다 더 신나게 눈썰매를 탔습니다. 그 때도 하루 종일 위태위태하던 동수는 결국 또 눈물을 흘리고 말았습니다. 아주 사소한 일이었지요, 적어도 우리 기준으로는. 하지만 이 아이의 마음엔 지울 수 없는 상처가 있어서 보통의 기준으로는 대하기 힘들다는 것을 몸으로 체득하기까지 제가 가야 할 길은 아직도 멀기만 했습니다.


놀이 공원에 가 보신 분들은 아실 겁니다. 놀이 기구들 대부분이 그렇잖아요. 두 사람이 함께 앉도록 설계되어 있어서 사람이 홀수인 경우에는 낯선 사람과도 짝이 되기도 하구요. 근데 우리 아이들은 전부 다섯 명이었고, 많이 내성적인 동수는 다른 아이들보다 수줍음도 많아서 늘 혼자 뒤처지곤 했지요. 그게 녀석에게 얼마나 큰 아픔인지 몰랐던 저는, 그만 집에 가겠다고, 보내 달라고 울먹이기 시작하고 나서야, 아이를 잘 보듬는 일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실감하고 있었습니다.

자기만을 봐 줄 것을 기대하는 이 아이들의 특별한 요청에 화답하는 것이 힘에 벅차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래도 저는 희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아이들을 대전 평마로 보내기 위해 터미널로 향하던 지하철에서 동수는 놀이 공원의 팜플렛을 손에 들고는 다른 아이들과 더불어 떠들어대고 있었거든요. “난 오늘 아홉 개 탔다. 이거랑, 이거. 형! 나도 이거 탔어!…치, 나는 하나도 안 무서웠는데” 동수가 평마에 돌아가서도 오래도록 이 날의 이야기를 선생님들이나 아이들에게 들려 주곤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서두르지 않기로 했습니다. 동수와 함께 있는 내내, 그 아이의 눈길은 무디기 짝이 없는 저조차 느낄 만큼 강렬하게 내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는 걸, 그 아이 시선이 나를 떠난 적이 없었다는 걸 저는 알고 있었거든요. 그리고, 내 어린 연인은 그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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