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하이 신앙의 세계본부가 이스라엘에?

'하이파(Haifa)'와 '악코(Akko)'로 여행을...(1)

등록 2000.11.20 16:56수정 2000.11.21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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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7월부터 1999년 3월까지 이스라엘을 여행하고 키부츠에서 생활한 이야기들을 <샬롬! 이스라엘>을 통해 연재하고 있습니다. - 편집자 주)


하이파와 악코는 이스라엘 서북부의 해변도시이다. 이 두 도시는 무엇보다 볼거리가 많다. 이스라엘을 여행하는 사람들에게 꼭 권하고 싶은 이 두 도시중, 하이파(Haifa)는 이스라엘 바다의 관문으로, 제 3의 항구 도시이다. 그리스 등에서 들어온 선박들이 입항하는 항구 주위에는 각국의 국기를 휘날리는 빌딩들이 들어서 있고, 무역을 위해 하이파를 찾은 사업가들과 선원들은 항구 주변의 맛있는 레스토랑을 찾는다.

하이파에는 예상 외로 볼거리, 즐길거리가 많은데, 바하이 신전, 카르메리트 지하철, 하이파 대학은 꼭 둘러보아야 할 곳이며, 하이파 곳곳의 박물관들은 이스라엘의 여타 박물관과는 달리 매우 특이하고 개성있는 곳이다. 그리고 악코는 아랍냄새가 물씬 풍기는 고전적인 도시이다.

하이파와 악코를 짧게 둘러보아도 하루에는 부족하기 때문에 하루는 하이파, 그리고 며칠 뒤 여유가 생기면 또 하루 시간을 내어서 악코를 둘러보기로 했다.

11월 말. 하이파로 여행을 떠나는 그날은 평소보다 일찍 일어났다. 이제 이곳 날씨도 점점 쌀쌀해진다. 이스라엘은 따뜻한 나라임이 틀림없지만, 남과 북으로 길쭉한 나라이다 보니, 지역간에 온도차가 크다. 내가 머물고 있는 키리앗 시모나(Kysiat Shemona)는 이제 겨울로 접어들었다. 그래도 낮에는 꽤 따뜻한 편이다.

영국 친구들은 부츠라고 하지만, 한국에서는 워커로 통하는 신발에 칠부바지, 티셔츠 위에 스웨터, 지금 이스라엘을 여행하기에는 가장 좋은 복장이다.


4번 정도 히치를 하고 하이파에 도착했으나, 우리가 내려선 곳은 교통이 혼잡한 도심중앙. 어디선가 바다의 지릿한 냄새가 느껴진다. 도저히 방향감각을 찾을 수 없었다. 어리둥절한 나와 신디는 마지막 히치에 도전했는데, 다행히 우리 앞에 끽... 하고 서주는 차가 있었다. 우리는 카멜산에 위치한 '바하이 신전'으로 가고 싶다고 했고, 히치를 해준 가족들은 친절하게도 바하이신전 앞까지 데려다 주었다. 그 곳에서 바하이 세계 정의원 본관을 올려다 보니, 계단식으로 조형된 모습이 꼭 만화에 나오는 모습같다. 웅장하고 화려하고 아름다운...

바하이? 아는 사람은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조금은 생소한 종교임이 틀림없다. 도대체 어떤 종교일까?


하이파는 무역으로 유명한 항구도시답게 여러 나라의 사람들이 들렀다 가는 곳이며, 그만큼 다른 문화와 종교에 관대하다. 때문에 하이파에 사는 이스라엘사람들에게 하이파 항구의 전경이 환히 내다 보이는 곳에 유대교가 아닌 타종교, 즉 바하이 신앙의 세계 본부가 있다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니다.

바하이 신앙이란?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1992년판 연감과 세계 기독교 백과사전에 따르면, 바하이 신앙은 세계에서 두 번째로 가장 널리 퍼져 있는 종교이다. 1997년 현재 190개의 국가와 45개의 자치령에 바하이 행정기구가 설립되어 있으며, 전세계 12만 6000여개의 바하이 회관에서 그 신자들을 만날 수 있다.

가장 규모가 큰 공동체 중의 하나는 여전히 바하이 신앙의 산실인 이란에 있다. 이곳에서는 1844년 이후 2만명 이상의 바하이들이 순교로써 자신의 믿음을 증거하지 않으면 안되었고, 한동안 잠잠했던 그곳의 바하이들에 대한 박해는 지난 1979년 이래 다시 고개를 쳐들고 있어 세계 여론과 국제적인 인권단체의 관심을 끌고 있다.

바하이 신앙은 어떤 기성 종교의 한 분파가 아니라 독자적인 종교이다. 바하올라(바하이 신앙의 창시자로, 바하올라가 악코로 유배를 온 것은 1868년, 이후 바하이 신전은 매년 수많은 바하이들이 순례를 다녀가는 바하이 세계의 중심지가 되었다)의 가르침에 따르면, 종교적 진리는 점진적으로 계시되었다.

즉 하느님은 자유의지와 이성적인 능력을 부여받은 피조물인 인류를 인도하기 위해 일련의 역사적인 인물들을 선택, 그들로 하여금 사람들에게 자신의 가르침을 전하게 했다는 것이다. 우리도 익히 들어온 아브라함, 모세, 부처, 예수, 모하메드, 바압 등이 바로 그들이다. 하느님께서 자신의 현시자를 통해 인류를 인도하는 불가사의한 역사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며, 하느님이 가장 최근에 인류에게 보낸 이가 곧 바하올라가 되는 것이다.

하느님의 벗, 하느님의 아들, 하느님의 사도 혹은 예언자, 또는 궁극적인 진리를 깨달은 각자(覺者) 등으로 불리는 이들 하느님의 현시자들은 자신이 출현한 시대의 사회적 상황과 지적 수준에 맞는 율법과 가르침을 사람들에게 가르쳐 주었다. 비록 피상적으로는 이들 위대한 인류의 스승들이 우리에게 준 가르침의 내용에 차이가 있으나, 그 근원은 하나라는 것이다.

바하이 신앙의 수호자인 쇼기 에펜디는 "바하이 신앙이 추구하는 것은 하느님의 유일성을 받들고, 하느님의 현시자들의 일체성을 믿으며, 인류가 전체로서 하나라는 원칙을 고취시키는 것"에 있다고 말한다.

바하이 신전

바하이 신전을 들어서자마자 느껴지는 것은 정말 '신전'답다는 것이다. 발 아래로는 고운 돌들이 자잘한 소리를 내고, 곧 이어 눈에 들어오는 것은 붉고 탐스러운 꽃들이다. 어쩜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정원은 성역을 위해 조성된 정원으로서의 평온함과 아름다움을 유지하도록 설계되었으며, 그 형태에 있어서 유례가 없다고 한다. 독특한 형태의 등과 대형 장식용 화병, 독수리나 공작 모양의 주조물 등 여러 가지 형태의 아름다운 장식들은 모두 정원의 품위와 아름다움을 더하기 위해 설치된 것일 뿐, 특별히 종교적인 의미는 없다고 한다. 앞으로 정원이 확장될 예정이어서 그런지, 여기저기에서 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대형 포크레인이 고불고불한 정원을 만들고 있었다.

정원을 쭉 걷다보니, 바하이 신전이 나온다. 신전 앞에는 반갑게도 한글 안내서가 있었다. 신전 앞에 서 있는 사람은 사람들에게 신전내부를 돌아볼 때는 조용히 관람할 것을 부탁했다.

바하이 신전에는 바하이의 창시자인 바하올라의 영묘가 있는 것이 아니라, 바압을 비롯한 몇몇의 영묘가 있다. 바압은 바하올라의 출현을 예고하고 순교한 사람으로, 바압이 자신의 소명을 밝힌 것은 1844년이다.

그로부터 6년 후인 1850년, 바압은 31세의 젊은 나이로 페르시아의 타브리즈에서 순교했다. 새로운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바압의 가르침에 위협을 느낀 기성종교지도자들 때문이었다. 바압의 유해는 바하올라의 장자이자 계승자였던 압돌바하에 의해 1909년 지금의 영묘인 황금색 돔형 지부의 건물에 안장되었다. 영묘는 바하올라의 지시에 따라 압돌바하가 건립한 것으로써, 압돌바하 자신 또한 서거 후 이곳에 안장되었다.

바하이 영묘를 감싸고 있는 상부 외곽 구조물은 1948년에 시작되어 1953년에 완성된 것이다. 동양적인 영감을 받은 디자인과 유럽의 건축구조가 함께 어우러져 조화를 이룬 이 건물은 이태리에서 조각된 치암포석(Chiampo石)과 로즈 바베노(Rose Baveno) 화강암으로 만든 원주기둥으로 이루어져있다.

황금색 돔형 지붕은 12000개에 달하는 비늘형태의 타일로 이루어져 있다. 네덜란드에서 주문 생산한 이 타일은 순금가루를 입힌 표면에 투명한 유약을 발라 구워낸 것인데 그 뛰어난 장식효과에도 불구하고 1장당 불과 1달러 정도의 비용밖에 들지 않았다고 한다. 이 영묘를 비롯하여 모든 바하이 건물의 관리 유지는 전세계 바하이들의 헌금과 자원봉사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한다.

그럼, 창시자인 바하올라의 영묘는 어디에?

창시자인 바하올라의 영묘는 악코로부터 북쪽으로 약 2킬로미터 떨어진 바지(Bahji)에 위치하고 있으며, 바하이들에게 있어서 이곳은 지상에서 가장 성스러운 곳이다. 페르시아 황제의 칙령으로 테헤란에서 바그다드로 귀양을 당한 이후 바하올라는 다시 터어키의 황제에 의해 콘스탄티노플, 아드리아노플, 그리고 마침내 감옥도시 악카로 유배를 당할 때가지 거의 40년간을 귀양살이와 감옥살이로 보내야 했다.

명목상으로는 여전히 오스만제국의 죄인 신분으로 바하올라는 1892년 바지에서, 이승을 하직했다. 바하올라의 유해가 안장된 곳은 붉은색 기와 저택에 접해 있는 별채의 내부로서 이곳은 그가 생애의 마지막 몇 해를 지낸 곳이라고 한다.

신전이라고 해서 달랑 영묘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 곳에는 세계 정의원 본관과 바하이 국제사료관이 함께 위치해 있다.

세계 정의원 본관은 바하이 신앙의 최고 입법행정기구인 세계 정의원과 부속기구들이 위치한 건물로서 1983년 완공되었다고 한다. 설계는 이란출신 건축가인 호세인 아마나크가 했다.

세계 정의원은 범국가적인 차원에서 바하이 공동체를 이끌고 있는 기구로서 카멜산 정상으로 오르는 길목 상단에 위치한 넓은 정원 한 가운데 우뚝 서있는 석조건물에 자리잡고 있다. 코린트 양식의 백색 펜텔리콘대리석 기둥 58개가 긴 회랑을 이루는 웅장한 건물이 바로 그것이다.

몇몇 바하올라 직계 가족의 유해가 안장된 지점에 세워진 정자형의 대리석 구조물을 그 가슴에 품고 있는 평온한 정원을 내려다보고 있는 정의원 건물은 다시 카멜산 아래 펼쳐진 넓은 하이파 만을 가로질러 바지(Bahji)에 있는 바하올라의 영묘를 마주하고 있다고 한다.

바하이 국제사료관은 다양한 종류의 바하이 사료와 유물들이 보관된 박물관으로서 1957년에 완공되었으며 미국 출신 건축가 챨스 M 레미가 설계했다고 한다. 구석구석을 둘러본 우리는 실외에 위치한 화장실을 둘러본 후 점심을 해결하기 위해 바하이 신전을 뒤로하고 카멜산을 내려갔다.

덧붙이는 글 | <바하이 신전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바하이 신전에 놓여있는 한글판flyer에서 참조했습니다>

덧붙이는 글 <바하이 신전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바하이 신전에 놓여있는 한글판flyer에서 참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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