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한 살 사일구 씨가
당신께 말을 걸어올지 모릅니다"

봄날, 그 외로운 중년은 당신에게 누구입니까

등록 2001.04.18 03:51수정 2001.04.18 1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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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우리에게 4.19는 무엇인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 오마이뉴스 노순택

4월 17일 저녁 10시 30분...

말 그대로 '느닷없는 전화' 두 통을 걸었습니다.
대학 선후배와의 통화였지요.

먼저 대학후배...

이 친구는 얼굴도 모르는 후배입니다. 공일(01)학번, 이제 막 대학에 입학한 스무 살 짜리 앳된 처녀입니다. 밤 늦도록 동아리방에서 중간고사 공부를 하다가 이 막 돼먹은 선배로부터 전화를 받고는 곤란한 지경에 빠졌습니다. 인사를 나눈 부분은 생략하고, 본론만 '말투'를 그대로 살려서 전해드리지요.

"4.19 알아?" "예? 뭐라고요?"
"4.19혁명말야..." "아, 4.19혁명 그거 알아요."
"그게 뭐지? 어떻게 아는데?"
▲ 마산 앞바다에서 떠로른 김주열 열사의 시신(위)과 묘소
ⓒ 4.19혁명기념사업협의회
"그거 이승만 독재를 무너뜨리기 위한 시민혁명 아닌가요? 촉발된 계기가 뭐냐고요? 글쎄요. 잘 모르겠는데..."
"왜 있잖아. 마산 앞 바다에서..."
"아 맞다. 학생... 김주열 학생 맞죠? 그 학생의 죽음 때문에 일어난 거잖아요."
"갑자기 이런 질문해서 정말 미안한데, 4.19와 우리 후배와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관계라니요?"
"가령, 4.19가 자네에게 주는 교훈이라고 해야 할까, 뭐 그런 거 말이지."
"그 당시 저와 같은 또래의 사람들이 자신의 삶만을 위하지 않고, 국가를 위해서 독재타도를 위해 운동했기 때문에.... .... 제게는 시야를 좀 넓게 가져야 할 필요를 준 것 같아요."
"4.19묘역 가봤어?"
"안 가봤는데요."
"어디에 있는지는 알아?"
"예? 어, 알았는데... 어디에 있는 거죠? 어쩜 좋아, 분명히 알고 있었는데... 선배님, 어딘지 말씀해 주세요."
"수유리잖아."
"아, 맞다 수유리... 맞아요 수유리."
"내일이 4.19인데..."
"가봐야지요. 꼭 가봐야지요."
"학교에서 4.19기념 마라톤대회 같은 것 안해? 예전엔 해마다 했는데..."
"요즘은 다들 투쟁에 바빠서... 등록금 투쟁도 그렇고, 교수충원문제도 그렇고..."
"그래 고맙다."
"선배님, 죄송해요. 제가 말을 너무 못한 것 같아서..."
"아냐, 고마워."

ⓒ 오마이뉴스 노순택
그렇게 통화는 끝났습니다.(물론 동아리 활동에 대한 얘기며, 새내기 신고식이 있으니 꼭 참석해 달라는 등의 부탁도 받았지요.)
통화내용 어떻습니까? 좀 횡설수설한 면이 없잖죠. 갑작스런 전화탓에 당황했던 탓이 클겁니다. 중간고사 공부하다가 이런 전화를 받았으니 황당했겠지요. 이 친구 전공이 정치학이라는군요. 좀 씁쓸합니다.

다음은 선배와의 통화.


이 선배는 올해 서른일곱 살. 80년대 중반에 대학을 다니다가 미대사관저 점거농성을 주도한 죄로 감방살이도 몇 년 했지요. 그 탓에 저와 함께 대학을 다녔습니다. 제 주위에서는 드물게 성공(?)하고 있는 사업가입니다. 이 선배와는 인사말도 없이 바로 얘기를 시작했습니다. '말투'를 살려 소개하지요.

"형! 저예요."
"응, 알아."
"형, 5분 정도 통화할 수 있을까요?"
"그래, 말해봐."
"형에게 4.19는 뭐죠?"
"나에게 4.19는 뭐냐고? 글쎄, 야 그런 막연한 질문이 어딨냐?"


하는 수 없이 주절주절 왜 이런 전화를 걸게 됐는지 설명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술술 얘기가 나옵니다. 운동권 교과서 같은 얘기지요. 틀에 박힌 얘기라고 나무라지 마시고 들어보세요.

ⓒ 4.19혁명기념사업협의회
"4.19가 1960년대에 일어났잖아. 1950년대 이승만 정권의 친일, 반공, 보수적 행보가 결국 3.15부정선거로 극한에 이르면서 민중들의 저항에 부딪친 거지. 4.19는 민중들의 정치적 역량을 전면에서 보여줬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해. 비록 그 세력이 집권에 성공하지 못하고, 박정희의 5.16쿠데타때문에 미완의 혁명으로 끝났지만, 그 경험이 없었더라면 1980년 광주항쟁이나, 1987년 민주화대투쟁의 경험도 쉽지는 않았을 거야. 또한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라는 요구를 전면에 내걸음으로써 통일에 대한 인식을 대중적으로 확산시키는 단초가 되기도 했지."

혹시 외운 건 아닐까 싶게 청산유수입니다. 중간에 말을 끊고 재차 질문을 던졌습니다.

▲ 4.19묘역을 찾은 대학생들
ⓒ 오마이뉴스 노순택
"형, 그럼 형에게 4.19는 뭐죠?"
"글쎄다. 너도 그렇겠지만, 우리 세대에게 4.19는 직접적이지는 않아. 우리 세대에겐 80년 광주가 큰 '빚'이었지. 광주에 대한 채무의식이 있었어. 4.19는 조금 간접적이랄까. 아무래도 4.19는 유신반대 투쟁을 벌였던 세대에게 좀 더 직접적인 전환점이 아니었을까?"
"요즘 대학생들에겐 어떨까요?"
"걔네들에게 4.19는 인생의 어떤 전환점이나 계기라기보다는 '역사'가 아닐까. 교과서에서 배우는..."

한 밤의 통화는 11시 무렵에야 끝났습니다.

예의라곤 없는 짓인줄 뻔히 알면서 이렇게 선후배에게 느닷없이 전화를 걸어 몰상식을 드러낸 까닭은 그날 오후에 수유리 4.19 묘역을 다녀 온 탓이 큽니다.

성균관대학을 비롯한 서울지역 북부총련 대학생들이 참배를 왔더군요. 간혹 동아리나 청년단체 등의 소규모 참배객들도 눈에 띄었습니다. 묘역관리소 측에선 4.19당시의 현장이 담긴 사진을 전시해 참배객들의 이해를 도왔지요.

묘역 한 쪽에서는 선배 한 명이 이런 저런 설명을 해주고 후배들이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떡이는 (보지 않아도 알만한) 예의 그 전형적인 광경도 눈에 띄었습니다.(아직까지는 변하지 않은 정겨운 모습이 아닐까 싶군요.)

ⓒ 오마이뉴스 노순택
4.19는 올해로 마흔한 돌을 맞습니다.

그 때 태어난 아기가 마흔을 넘긴 중년이라는 얘기지요.

우리는 간혹 유신독재에 항거했던 4.19 세대들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4.19 정신을 정치판에서 실현해 보겠다던 분들도 보았지요. 또 가끔(?)은 '피로 얻은' 4.19의 열매를 무참히 짓밟았던 장본인이 "서쪽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싶다"며 노년의 야심을 불태우고 있는 모습을 보아야 하는 곤혹스러움과 맞닥뜨리기도 합니다.

그렇담, 이번엔 돌아서서 나 자신에게 물어볼까요?

"4.19 정신의 빛이 바래가고 있다"는 21세기의 들머리 한국에서 '나에게 4.19는 무엇인가'를 놓고 잠깐 먼 곳을 바라보며 멍한 기분이 되어봅니다. (이 글을 마치고 있는 지금 시간이 새벽 4시가 넘었으니, 멍한 건 당연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화창한 봄날,
여러분도 중년의 사일구씨와 데이트를 한번 해보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교정에서 수유리에서 직장에서 혹은 집에서... 장소야 어디든 어떻습니까? 아마도 외로움 부쩍타고 있을 그는 당신을 반길 것입니다.

내일은 그 외로운 중년의 생일입니다.

▲ 어느새 우리에게 4.19는 역사책 속에서나 볼 수 있는 '사건'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렇담 그 정신은요? 우리에게 4.19는 뭘까요?
ⓒ 오마이뉴스 노순택


* 1960년 4.19 당시의 현장 사진을 다시 보여드립니다. 4.19묘역관리소에서 전시한 사진을 복사촬영한 것입니다.

▲ '돈과 고무신으로 얼룩진'(?) 3.15부정선거는 이승만 정권의 정권연장 음모를 그대로 보여주었습니다.
ⓒ 4.19혁명기념사업협의회

▲ "3.1 정신으로 돌아가자"는 현수막을 내걸고 거리로 나선 학생들
ⓒ 4.19혁명기념사업협의회

▲ 국민을 외면하고 정권연장의 도구로 전락한 경찰과 깡패집단은 학생과 시민들에게 무차별 폭력을 가함으로써 끓는 기름에 불을 붙였습니다.
ⓒ 4.19혁명기념사업협의회

▲ 국민의 생존권을 보호해야할 경찰이 정권의 연장도구로 전락했을 때 어떤 모습이 되는가를 보여준 4.19는 오늘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 4.19혁명기념사업협의회

ⓒ 4.19혁명기념사업협의회

ⓒ 4.19혁명기념사업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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