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랙터로 마늘밭 갈아엎던 날

마늘 재배 농민들, "우리는 두 번 속았다"

등록 2001.05.11 10:54수정 2001.05.21 2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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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애지중지 키워온 마늘밭을 갈아엎을 때 그 농민의 마음은 어떠하랴. 올해로 농사를 6년째 짓는다는 늦깎이 농민 김진현(38. 경상북도 영천시 신녕면) 씨. 그는 3500평 땅에 마늘과 양파를 경작하고 있었다. 그런 김씨가 오는 5월 말에 수확을 앞둔 '알이 꽉 찬' 마늘 경작지 400평 땅을 갈아엎을 때 역시 왜 고민이 없었을까.

"내 땅을 갈아엎어서라도 뭔가 해결이 된다면"

"작년에도 중국에서 마늘을 수입하는 바람에 결국 생산 단가도 맞추지 못했습니다. 올해라고 별반 다르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결국 중국산 마늘이 추가로 수입된다고 하니깐 답답합니다. 이곳에선 딴 농사도 못 지어먹어요. 마늘이랑, 양파 그게 전부인데... 하여튼 400평 땅 갈아엎어서 이 문제가 해결됐으면 그나마 좋겠어요. 그런 마음에 아깝지만 이 땅을 선선히 내놨죠."

하지만 김씨와 함께 농사를 지었다던 아버지는 결국 이날 이곳을 찾지는 못했다. 자신이 키운 마늘을 트랙터로 뿌리째 갈아엎는 모습을 차마 볼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이승욱

지난 10일 오전 11시 영천시 농민들은 이곳 신령면 김씨의 마늘밭으로 모여들었다. 김씨의 밭에는 작년 10월에 파종한 마늘이 파릇파릇한 잎이 웃자란 채 땅 속에 박혀 있다. 김씨가 마늘 줄기를 잡고서 마늘을 뽑아내자, '부우욱 부우욱' 소리를 내며 마늘은 쉽게 고운 흙을 헤치고 알이 굵은 속살을 내비쳤다. 제 값을 받지는 못할지라도 농사를 지어본 농민이라면 아쉬움이 남을 법한 작황이다.

하지만 김씨는 짓고 있던 마늘 농사 경작지 일부분을 이날 트랙터로 갈아엎을 작정이다. 그리고 그런 김씨의 소식을 듣고 인근 농민들이 모이기 시작한 것이다. 붉은 띠를 묶은 채 밭고랑으로, 시멘트로 만든 농도로 모여든 사람들이 100여 명을 헤아린다. 그리고 이날 모인 농민들의 모습엔 어느 집회와는 사뭇 달라 보였다.

화형식 장면ⓒ이승욱
이날 집회는 여느 농민 집회에서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었던 웃음이 묻어 있지 않았다. 허탈한 '웃음'도 감춰야만 하는 엄숙함이 그들의 현실이었다.


'두 번 째 속은 것이다' 지난해 1차 한·중 마늘협정에 이어서 두 번 속은 꼴이 돼 버렸다. 농민들은 수입을 줄이기는커녕 늘려버린 채 예정된 중국산 마늘 수입. 그래서 그들은 진지했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는 절박함이 막걸리 한잔에 취해 웃음지으며 여유로울 수 있었던 '농심'마저 빼앗았다.

마늘 재배 농민들, "우리는 두 번 속았다"


지난해 중국과의 1차 마늘 협상에서 한국 정부는 중국산 마늘 물량 3만2천톤을 수입하기로 결정했다. 한국산 폴리에틸렌과 휴대폰에 대한 중국으로의 수출길이 막힌다는 우려가 그 이유였다. 하지만 그 고통은 고스란히 생산비도 미치지 못하는 가격을 받는 마늘 경작 농민들에게 지워졌다. 그리고 1년 후, 농민들은 또 다시 중국산 마늘 수입으로 그 고통에서 벗어나기 어려워 보인다.

'휴대폰:마늘'? - 경제논리에 농업은 항상 뒷전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이승욱
지난 4월 21일 베이징, 한·중 회담에서 2차 마늘 수입이 결정됐다. 그 물량은 지난해 1차 마늘 협상에서 결정된 올해분 기존 수입 물량 3만3천 톤. 게다가 이번엔 지난해 민간차원에서 수입하기로 했다가 아직 수입되지 못하고 있던 1만3천톤을 정부가 직접 8월 말 이전에 수입하기로 약속했다. 이때도 정부는 중국간의 무역마찰을 우려하고 있었다.

전국농민회총연맹(의장 정광훈)은 지난달 27일 성명서를 통해 "지난해 한·중 마늘협상에서 굴욕적인 협상을 하더니 이제는 그 협상내용마저 부정하면서 횡포로 일관하는 중국에 대해 굴복했다는 사실에 정부가 누구를 위한 정부인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고 주장하고, 또 "현재 1만3천 톤의 마늘 재고가 창고에 쌓여 있는 상태에서 마늘이 수입된다면 다음달(5월) 햇마늘이 출하되기 시작하면 가격 폭락이 불을 보듯 뻔하다"고 우려의 목소리를 낸 바 있다.

'또 다시 생산비도 건지지 못하는 가격'

"지난해 중국산 마늘이 수입되면서 마늘을 경작했던 농민들은 제대로 된 가격을 받지도 못한 채 마늘을 팔아야만 했습니다. 당시 정부에서는 kg(킬로그램)당 1200원으로 마늘을 수매한다고 했는데 사실 마늘 생산비용을 따진다면 kg당 1560원을 넘습니다. 결국 농민들은 밑진 장사를 한 것밖에 없는데 또 다시 마늘을 대량 수입하겠다면 농민들은 어쩌란 말입니까." 직접 마늘 농사를 짓고 있는 영천시농민회 이중기 회장의 말이다.

이회장은 또 "이런 상황에서 마늘을 수입하겠다는 김대중 정부가 도대체 주권을 가진 국가의 정부입니까. 그 옛날 조선시대에 명나라, 청나라에 굴복하면서 사대외교를 폈던 그 당시보다도 자주성이 없는 정부가 이 정부입니다"면서 울분을 토했다.

이런 농민들의 절박함은 이곳 영천지역만이 아니라 한지형 마늘의 최대 집산지인 의성 지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미 이 지역 농민들도 지난 2일 지역 일대에서 트랙터를 앞세우고 마늘밭 1200여 평을 갈아엎었고 성난 농민들은 중국 '오성기'에 불을 붙이기도 했다. 또 한나라당 지역구 사무실을 점거하기도 하면서 쉽게 분노를 가라앉히지 못하고 있다.

"자식을 죽이는 것 같은 심정 누가 아나"

'애써 키운 자식 죽인 것만 같제' - 트랙터가 갈아엎은 마늘 밭을 보고 일흔 살 노인은 눈물을 흘렸다ⓒ이승욱

이날 김씨의 마늘밭에서도 농민단체 대표들은 오성기를 단 허수아비에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당겼다.
"삼천만 잠들었을 때... 춤추며 싸우는 형제들 있다."
노래 가사에 '횡포를 부리는 중국과 대책 없는 정부'에 대한 분노가 고스란히 담겨 있어 힘이 있었다.

하지만 곱게 자란 마늘밭에 트랙터가 들어서면서 농민들의 얼굴엔 '아까워서 어쩌나'하는 안타까움이 묻어나왔다. 물끄러미 이 광경을 지켜보던 한 농민은 눈물마저 흘렸다.

"내 나이가 70인데 기도 안 차제. 맘이 아픈 것을 도회지 사람이야 어떻게 알겠노. 농사꾼이 무신 돈이 있어? 빚 얻어서 한 해 농사짓고 그나마 그 이자나 갚지. 이렇게 지켜보고 있으이, 왜 이렇게 눈물이 나노. 그저 자식이 죽는 것 같은 심정이제." 연신 흘러내리는 눈물을 애써 닦으며 허영(70) 옹이 하소연하듯 말했다.

마늘을 손질하는 부부 - 흙만 보고 살아온 농민들은 항상 속아왔지만 농사를 포기할 수도 없다. ⓒ이승욱
농민들이 외치는 '마늘협상 전면 백지화하고 재협상 하라', '정부는 마늘 생산비 보장하고 수입으로 인한 피해 전량 수매하라'는 구호를 마지막으로 한 시간 동안의 '영천시 마늘시위'는 오후 12시쯤 끝을 맺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트랙터는 농민들의 '가슴'을 갈아엎듯이 마늘밭을 이리저리 갈아엎고 있었다.

매년 되풀이되는 농산물 수입과 가격폭락, 농촌과 농업의 붕괴. 이를 지켜보면서도 '휴대폰'을 팔기 위해 희생만을 강요했던 정부의 개방농정. 농민들의 '가슴'을 갈아엎는 것은 오로지 '트랙터'만은 아닌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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