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동이말고 공기그릇에 잡아가세요"

도시 사람의 무분별 남획에 다슬기 씨가 마른다

등록 2001.05.23 14:15수정 2001.05.23 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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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슬기 씨가 마릅니다. 작은 놈은 잡지 마시고 양동이 말고 공기그릇에 잡아가세요. 이대로 가면 내년에는 우리 (다슬기)를 못 봅니다."

속곡리 다슬기(골뱅이) 일동 이름으로 붙은 대자보 호소문 내용의 일부이다. 이 대자보는 동네 입구부터 첫 마을까지 모두 4장이 붙어 있다. 지금은 이번 비에 씻겨 간신히 글씨를 알아 볼 수 있는 것뿐이다. 아예 못 알아보는 것도 있다.

내가 사는 속곡리는 경북 영덕군에 있는 산골 마을이다. 동네 전체 길이는 9km이고 냇가 양쪽으로 4, 5가구씩 모여 사는데 전체 가구는 30 가구가 조금 넘는다.


우리 동네 안에서는 어디서나 흐르는 냇물을 바로 마셔도 되는 1급수가 흐르고 산이 깊고 공기가 아주 맑은 곳이다. 우리 동네를 흐르는 냇가에는 다슬기가 아주 많았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몸에 좋다고 도시 사람들이 다슬기를 무분별하게 잡아가는 바람에 요즘은 씨가 마를 지경이다. 다슬기는 사람 몸에만 좋은 것이 아니라 반딧불이 애벌레의 먹이가 된다.

반딧불이가 사는 곳은 공기와 땅과 물이 좋은 청정 환경이라는 것은 많이 알려져 있다. 전에는 우리 동네에도 반딧불이가 많았다고 한다. 그런데 요 몇 년 반딧불이를 보기 힘들다. 먹이인 다슬기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우리 동네엔 요즘 주말에는 말할 것도 없고 평일에도 양동이를 들고와서 다슬기를 어린 놈까지 싹쓸이하듯 잡아가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이 우리 동네 사람이 아닌 것은, 동네 사람들은 한참 농번기로 냇가에 발 담글 시간도 없다는 것이고 자동차 번호가 영덕군 번호가 아니라는 것이다.

하도 잡아 가니까 지금은 아주 작은 놈들뿐이다. 한 번은 세 양동이이나 가득 잡아가는 두 명의 아주머니와 한 명의 아저씨에게 다가가 다슬기 좀 잡았냐고 하니까 순 작은 놈뿐이더라고 했다. 그래서 작은 것까지 잡아가면 되겠냐고 하니 그래도 이 것밖에 없더라고 한다.

그렇게 양동이씩이나 잡아가서 어디에다 쓰느냐고 물으니 국 끓이고, 뭐해 먹고, 없어서 못 먹는다고 한다. 기가 막힐 노릇이다. 돌아가는 차를 보니 대구 차다. 여기 왔다 가는 차 기름 값이면, 장에 가서 사다 먹으면 될 것을 굳이 저렇게 싹쓸이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


도시 사람들은 물론 좋을 것이다. 공기 좋은 촌에 와서 바람도 쐬고 냇가에 발 담그고 다슬기까지 잡으니 그야말로 스트레스가 확 풀릴 것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아주 어린 다슬기까지 잡아가면 정말로 씨가 마를 수 있다는 것을 왜 생각을 못하는지.

도시 사람들은 한 번 들렀다 가면 될 곳이지만 촌에 사는 우리 같은 사람은 늘 사는 곳이니, 자연 생태계가 파괴되면 큰 문제를 안게 된다.


다슬기뿐만이 아니다. 우리 동네는 산골이라서 봄에는 나물이 많이 나고 지금부터 8월 초까지는 동네 입구부터 가장 윗 마을까지 산딸기가 종류를 세 번 바꾸어 가며 흐드러지게 핀다. 그래도 늘 따가는 사람은 도시사람들이다. 촌에 와서 좋은 것을 보았으면 그것으로 만족하고 돌아가서 계속 보존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 아닐까?

그래도 나물이나 산딸기는 뿌리째 따가지는 않으니까 내년에도, 그 다음 해에도 또 흐드러지게 필 것이다. 그런데 몸이 느려서 사람 손만 닿으면 잡히고 마는 다슬기는 도망도 못 가고 작으면 작은 대로, 크면 큰 대로 잡히고 만다. 결국 씨가 마른다.

이것은 촌 사람들의 각박한 인심 문제가 아니라, 다슬기의 생존 문제이자 자연환경을 보존하는 문제이다. 그리고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우리들의 부끄러운 양심의 문제이다.

다음은 속곡리 다슬기 일동 명의로 붙은 호소문 전문이다.

호소합니다.

다슬기(골뱅이) 씨가 마릅니다.
작은 놈은 잡지 마시고 양동이 말고 공기그릇에 잡아가세요.
이대로 가면 내년에는 우리를 못 봅니다.

-속곡리 다슬기(골뱅이)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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