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화 선생.
어제 <조선일보>에 등장한 당신의 시론 「소설가는 질문한다」를 잘 읽었소. 읽고 보니 별것도 아닌 얘기가 사람을 참 허탈케 하는구려.
당신은 '토마스 만'을 끌어들이는 등 제법 현학의 거탈을 뒤집어쓰려고 애를 썼지만, 그 바람에 더욱 글이 완전히 '요설(饒舌)'이 되고 말았소. 나는 당신이 왜 하필이면 독일의 한 시절의 풍경과 토마스 만을 처음부터 끌어들였을까 생각했소. 그 이유가 쉽게 느껴지더군요.
당신의 스승이나 다름없는 이문열 씨가 며칠 전 <조선일보>에 쓴 시론 「신문 없는 정부 원하나」에서 나치에 관한 얘기를 끌어들였지요. 그 글에 고스란히 투영된 이문열의 막힌 무지와 동반하는 럭비공 같은 발상법과 놀라운 상상력의 발휘 중에서도 사실 그 부분이 압권이었지요.
국세청의 언론기관 탈세 사실 발표 현장을 방송사들이 일제히 중계하는 것을 보고 유대인 학살을 정당화하는 나치의 대국민 선전 선동을 연상했다는 말! 말살에쇠살 같은 그런 조악하기 짝이 없는 표현 때문에 이문열은 더 더욱 여론의 '십자포화'를 받았지요.
모르면 몰라도, 이인화 씨 당신도 그 부분이 영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요. 어떻게든지 조금이라도 이문열 씨를 효과적(?)으로 변호하려다 보니 독일에서 나치 시대에 활동했던 토마스 만의 일화를 끌어들일 생각까지 다하게 되었고!
토마스 만과 관련해서는 긴 말 하지 않겠소. 지극히 일부분적인 토마스 만의 예화 소개에서도 당신의 자의적이고 어설픈 지식이 느껴지지만, 그리고 당신의 그런 변설에 귀가 솔깃할 사람들도 없지는 않겠지만, 그게 그렇게 중요한 문제는 아니기 때문이요.
이인화 씨.
"소설은 모든 권위를 부정하는 '웃음'의 언어이며, 질문하면서 동시에 설명하는‘아이러니'의 언어이기 때문"이라는 말이 참 알쏭달쏭하면서도 그럴 듯하긴 하오만, 그것이 당신의 주장대로 소설 언어일 수는 있어도 우리네 삶에서의 실제 언어일 수는 없을 것 같소. 그 사실을 우선은 당신네들의 삶의 태도가 극명하게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이오.
"소설가는 다른 사람들이 당연하게 여기는 것을 다시 생각해서 그 고정 관념의 카테고리 밖에서 보다 근원적인 문제를 질문한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를 막론하고 이런 소수의 질문자가 존재할 때 그곳은 보다 새롭고 바람직한 비전을 간직할 수 있다."
참으로 멋있는 말이고 옳은 말이요. 그런데 그런 말의 내용과 당신네의 삶의 태도는 완전히 겉돌고 있지 않은가요?
사람은, 작가라면 더 더욱 자신이 애용하는 말과 자신의 삶을 일치시키려고 늘 노력해야 하는 법이요. 그런 말을 하나의 신념처럼 내세울라치면 그 말로 우선은 나 자신을 비추어보아야 하는 거요. 말이란 남에게 들려 주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오.
이인화 씨 당신은 과연 "어느 하나의 정치적 입장이 전제화되는 것을 무조건 반대"하며, "고정 관념의 카테고리 밖에서 보다 근원적인 문제를 질문"하는 그런 작가의 위치에 있었나요?
보수라는 이름의 고정 관념에 철저히 얽매여서 개혁과 진보를 방해하는 수구 논리의 전도사로 살아오지 않았나요?
사실 나는 젊은 나이와 어울리지 않게 대단히 완강한 보수 관념의 틀거지를 확보하고 있는 당신에게서 찬탄 비슷한 경이감도 가져왔었소. 그리고 장기알이 골고루 갖추어져야 장기판이 이루어지듯이 우리 사회에 당신 같은 사람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었소. 약간의 연민과 너그러운 웃음을 머금은 채 말이오.
그런데 당신의 이번 시론을 보니, 당신은 너무 위선적이고 가식이 많소. 과연 당신은 작가로서 "광활한 말의 대지를 자유롭게 걷는 산책자가 아니라 지뢰밭 속을 조심조심 통과하는 병사"처럼 살아왔고, 살고 있나요? 과연 그런가요?
이상한 엄살이고, 그런 이상한 엄살을 멋대로 행위할 수 있는 방만한 자유가 지금 당신에게 어설픈 현학의 거탈을 현란하게 꽃피워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엄살을 피우면서도 당신은 지금 얼마나 용감한가요?
당신이 지금 발휘하고 있는 그 용감성의 배경도 나는 잘 알고 있소. 당신은 보수 논리에 대한 사명감으로 똘똘 뭉쳐 있소. 오늘의 현실 상황 정도에 압도되어서 수구 논리의 전도사 역을 포기할 마음은 추호도 없는 거요.
왜냐, 당신이 생각하기에 오늘의 이런 상황은 일시적인 것일 테니까요. 국민들에게 완벽한 '혐오상품'인 오늘의 국내 정치로 말미암아 현 정권은 명운이 다하였다고 당신은 판단하고 있으니까요. 그리하여 1년 6개월만 지나면 다시 보수 정권이 이 나라를 장악할 수 있다고 당신은 확신하고 있는 거요.
그리하여 그런 상황으로 차질없이 몰아갈 수 있는 고삐를 놓지 않기 위해 족벌 신문권력의 잔등에 올라탄 이문열이 용감히 장검을 휘두르고, 당신은 이문열의 망발과 폭언을 변호하며 "우리 사회가 소설가의 질문을 존중하는 최소한의 이성을 발휘해주기 바란다"고 허깨비 같은 염불을 외고 있는 거요.
얼마나 속보이는 정치적인 술수입니까? 당신은 그토록 우리 사회가 이성이 없는 사회로 보입니까? 이성이라는 게 그렇게 일방적인 것이어야 합니까? 그런 요구와 주문이 당신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보십니까?
이문열 씨는 어제 <동아일보>의 시론 중에서, '신문 개혁'을 열망하는 사람들을 중국 문화혁명 당시의 '홍위병'으로 비유하고 가정하면서 이런 말을 했소.
"우리가 중국 문화혁명을 주도했던 홍위병을 섬뜩하게 떠올리는 이유 중의 하나는 그들이 형식논리만 갖춰지면 못할 짓이 없었다는 점이다. 극히 추상적이고 초보적인 원칙만 갖춘 구호 아래 저질러진 숱한 문화적 파괴와 억압의 사례를 보라.
그들은 거기에 따라 공자묘(孔子廟)를 돌 하나 성하지 않게 파괴했으며, 늙은 작가 바진(巴金)을 하방(下放)시켜 강제노역에 종사시키고, 대작 ‘낙타상자’의 작가 라오쓰(老四)를 끌고 나가 사흘 뒤에 시체로 발견되게 했다."
정말이지 말살에쇠살 같은 서푼어치 지식을 늘어놓아 순진한 독자들을 현혹시키려는 수작임이 훤히 보여서 참으로 슬프고도 곤혹스러웠소.
내 분명히 말하겠소. 우리는 공자님을 포함한 우리네 삶의 진정한 가치 규범들을 왜곡과 분식과 탈취와 파괴의 위험으로부터 알뜰히 보호 보존하기 위해 오늘의 '신문 개혁'을 소망하고 사회의 암적인 것들을 타파하려는 거요. 참으로 우리 사회를 좋은 세상으로 만들기 위해, 그것의 기초를 잘 닦기 위해 이렇게 애를 쓰는 거요.
우리는 참으로 오래도록 먼길을 힘들게 달려와 오늘에 이르렀소. 현대사의 어두운 굴곡을 헤쳐오느라 참으로 많은 희생을 치르고 고통을 겪었소. 그리하여 선거에 의한 정권교체라는 우리 역사 초유의 경험도 하고, 이만큼 '자유로운' 세상을 만들었소.
어둡던 시절 내내 우리를 괴롭혔던 언론 권력들이, 애써 죽을 쑤어놓으니 강아지가 먼저 부뚜막에 올라와 포식을 하는 식으로 최대한의 언론 자유를 누리는 것을 보면서도 우리는 무어라 탓하지 않았소.
그런데 민주화 시대에 스스로 권력이 비대해진 신문 권력들은 저희를 그렇게 만들어준 주인(국민)을 몰라보고 제멋대로 아무 일에나 마구 짖어대고 물어대고 설쳐대는 지경이 되어버렸소. 어느새 개들이 지배하는 세상이 되어서, 무엇 하나도 제대로 할 수 없는 형편까지 왔던 거요.
그래서 '언론개혁'이라는 화두가 우리 사회에 등장하게 되었고, 마침내는 그것이 우리 시대의 최대의 사회적 명제가 된 것이오.
소설가이고 대학교수라는 사람한테 내가 이렇게 힘들여서 새삼스럽게 설명을 해 주어야만 하겠소?
나도 힘이 드니 이쯤에서 논설을 접으며 이인화 씨 당신들에게 한마디만 당부하겠소.
당신의 사부 이문열씨가 우리를 '홍위병'으로 비유하며 과대망상적으로 '공자묘'의 파괴까지 우려하였지만, 제발이지 그런 걱정일랑 접어 두시오.
그리고 제발이지 참 민주화의 도정(道程)을 파괴하려 들지 마시오. '신문 개혁'의 기초로부터 우리가 차근차근 이루어 나갈―진정한 삶의 가치관, 참다운 사회공동선, 올바른 국민정신―을 세워나가려는 이 성스러운 민중적 에너지를 파괴하려 들지 말란 말이오.
어렵고도 힘든 길을 여기까지 헤쳐오는 동안 당신들이 동참을 하기는커녕 방해를 하였대서 그것을 마냥 탓하지는 않을 테니, 제발 시샘을 하지 말고, 오늘의 이상한 역정과 투정으로 당신들의 과거를 억지로 분식하고 만회하려 들지 말란 말이오. 나는 당신들의 궤변이 너무도 지겹소! 내 말 알아듣겠소? 손에다가 담뿍 쥐어주기까지 했으니, 이제 제발 정신 좀 차리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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