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순간 나도 테러범이 될지 모른다

국정원 '테러방지법' 입법예고 인권침해 논란

등록 2001.11.16 07:34수정 2001.11.17 0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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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학생 단체가 정치적 항의를 목적으로 공공기관을 점거했다. 어떤 공공노조가 본사 건물을 점거하고 농성을 한다. 또 위 단체의 학생이나 노조원이 점거 사실을 알고도 신고하지 않았다면….

지난 12일 국가정보원에 의해 입법 예고된 '테러방지법'에 따르면 위의 사항은 모두 '테러' 행위로 규정될 수 있다. 즉 앞으로는 별로 위험하지 않은 소수그룹들의 시위 등 저항 행동도 테러로 규정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이를 알고 있지만 신고하지 않은 당신도 '테러방지법' 불고지죄에 해당돼 테러범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관련 국정원측은 "월드컵과 아시안게임에서 혹시라도 있을 테러를 방지하기 위해 서둘러 준비하고 있다"고 하지만 시민사회단체들은 '제2의 국보법'이라면서 강하게 비난하고 있어 귀추가 주목된다.

또한 이 법안은 허위사실 신고죄, 참고인 구인·유치, 구속기간 연장 등 인권침해 소지가 다분한 조항을 내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청회를 통한 의견수렴 없이 한 달 안에 법안을 처리할 예정이어서 논란이 되고 있다.

무엇보다도 입법예고된 테러방지법은 그간 인권침해 시비의 핵심에 있어온 국가정보원의 권한을 대폭 강화하고 있다. 테러방지법에 따르면, 국무총리를 의장으로 하는 대테러대책회의를 구성하게 되어 있는데, 이 대책회의의 상임위원회 위원장을 국정원장이 맡도록 했다. 또 국가정보원 내에 대테러센터를 설치하고, 대테러센터의 장은 국정원장의 제청으로 대통령이 임명하게 되어 있다. 대테러활동의 주요 요직은 사실상 국정원이 독점하는 셈이다.

또한 대테러센터 공무원과 대테러 활동 담당 경찰관이 외국인에 대한 불심검문 및 체류동향을 확인할 수 있게 하고, 테러를 범할 우려가 있다고 판단될 경우 법무부장관에게 해당외국인에 대한 출국권고 또는 명령을 요청할 수 있게 했다.

지난 10월 31일 한통계약직 문제를 해결하라며 국회에서 농성을 벌인 한국통신 계약직 노조원들. 이들도 국정원이 내놓은 테러방지법이 원안 그대로 통과했을 경우 테러범이 될 수 있다. 또한 이들의 테러사실을 알면서도 신고하지 않은 한국통신 노조는 테러집단으로 매도될 수도 있다. ⓒ <노동일보> 제공



'테러방지법'으로 부활하는 '불고지죄'

게다가 국가보안법에서나 볼 수 있었던 불고지죄도 '테러방지법 제정안'에 포함되어 있다.


테러방지법 24조 불고지죄를 보면 '테러를 범한 자 또는 범할 계획을 가진 자라는 것을 알면서 관계기관에 지체없이 고지하지 아니한 자는 3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고 되어 있다. 따라서 불고지죄의 적용 범위가 너무 광범위해 인권침해가 우려된다.

또 25조에 보면 허위신고에 대해서도 엄격한 법률이 적용되는데, '전화·서신 기타의 방법으로 테러관련 허위사실을 공공기관 또는 시설·장비 관리자 등에게 신고·제보하거나 이를 통해 협박 또는 협박을 가장한 자는 2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고 되어 있다.

하지만 인권운동사랑방에 이 법안의 검토의견을 낸 배재대학교 김종서 교수는 "허위사실의 범위가 어느 정도까지 적용될지 의문"이라며 "가령 테러를 계획하고 있다는 생각으로 신고를 했으나 신고를 받은 수사기관에서 수사를 해본 결과 테러와 무관함이 밝혀진 경우 허위사실 신고라고 할 수 있는지 분명치 않다"고 지적했다.

또한 지방법원판사가 검사의 청구에 의하여 테러 관련 수사를 계속할 상당한 이유가 있다고 인정한 때에는 구속 기간의 연장을 2차에 한하여 허가할 수 있고, 구속 기간 또한 각 10일 이내로 할 수 있게 했다. 일반 수사의 경우 '무죄추성의 원칙'에 따라 구속 기간이 48시간을 넘길 수 없게 되어 있는 것에 비춰볼 때 수사권의 남용이 우려된다.

이에 대해 민주노총 권두섭 변호사는 "우리나라에서 테러행위는 현행법으로 충분히 규율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테러방지법을 제정하려는 것은 국정원의 업무 영역을 확대하기 위한 목적 아니냐"면서 "국가보안법과 같이 무리한 수사가 예상된다"고 우려했다.

반면 이번 법안을 담당하고 있는 국정원 김대정 서기관은 "시민사회 단체들이 우려하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나 이번 법안은 지난 9.11 사태 이후 여러 차례 관계부처 장관 회의를 거쳐 만든 법안이므로 인권 침해 의도가 전혀 없다"면서 "12월 8일 정기국회가 끝나기 전에 국회를 통과시켜야 하지만 필요하다면 의견수렴을 위해서 공청회를 열 수도 있다"고 밝혔다.

김 서기관은 또한 "월드컵과 아시안게임에서 혹시라도 있을 테러를 방지하기 위해 서둘러 준비하고 있는 테러 방지법에 대한 의심을 버리고 국민 모두가 테러 방지에 힘을 쏟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시민사회 단체 반발, "국정원이 테러 국면을 발판으로 활로를 찾아보겠다는 몸부림"

그러나 테러방지법안에 대한 시민사회 각계의 우려에 찬 목소리는 줄지 않고 있다.

민주주의법학연구회 회장 김종서 교수(배재대)는 '테러'의 개념부터 문제삼았다. "국가중요시설 등에 대한 '점거'를 포함하는 테러의 개념은 지나치게 확대될 위험이 있다"며, "과거 미문화원 점거농성 등 정치적 항의를 목적으로 한 행위가 설사 방화나 폭파 등 행위가 없더라도 '테러'로 규정될 수 있는 게 아니냐"고 지적했다.

서울지방변호사회 인권위원장 박영립 변호사는 "변호인 접견을 방해하는 등 인권침해를 당연한 것으로 여겨온 국정원이 또 다시 권한을 대폭 강화하게 될 것이 걱정"이라면서 "인권과 관련해 이렇게 중요한 법안을 공청회 한 번 하지 않고 졸속으로 처리하는 것이 말이 되느냐"고 강하게 비판했다. 입법예고기간은 통상 20일 이상이다. 그런데 이번에 국정원이 정한 입법예고기간은 10일로 돼 있다.

시민사회단체들의 반발 또한 거세다. 참여연대 양영미 간사는 "법을 만드는 이유도 불분명한데 인권침해의 소지가 많은 법을 왜 국정원이 주도해서 그렇게 서둘러야 하는지 알다가도 모르겠다"고 말했다.

인권실천시민연대 오창익 사무국장도 "국정원이 이런 문제를 지금 갑자기 제기하는 것은 남북화해 시대에 할 일이 없어져 가는 국정원이 테러 국면을 발판으로 활로를 찾아보겠다는 몸부림이 아니겠느냐"고 반문했다.

테러방지법안은 앞으로 입법예고기간이 끝나면 법제처의 기술적인 검토를 거쳐 차관회의, 국무회의의 의결, 대통령의 재가를 거치고 국회로 상정된다. 국회에서는 정보위원회 심사를 거친 뒤 본회의를 통과해야 법률로 제정되는데 국정원은 이 모든 과정을 12월 8일 정기국회 폐회 전까지 끝마칠 계획이다.

덧붙이는 글 | 인권하루소식 11월 16일자

덧붙이는 글 인권하루소식 11월 1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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