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명하고 슬픈 크리스마스

방민호의 <문화칼럼>

등록 2001.12.26 09:11수정 2001.12.26 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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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아주 어렸을 적 공주 살던 때 아버지는 유년의 자식들을 위해 동네 뒷산 봉황산에서 어린 소나무를 베어내 크리스마스 트리를 만드셨다.

일곱 살의 나와 다섯 살의 동생은 파란 소나무에 흰 솜뭉치를 드문드문 얹어 눈맞은 나무 시늉을 냈다. 색색 빛깔 다른 꼬마전구를 주렁주렁 매달고 색종이로 만든 종이며 별이며를 달았다.


그리고는 머리맡에 양말을 놓고 잠이 들면, 어느새, 아침, 양말 속에는 바람을 넣을 때마다 펄쩍펄쩍 뛰는 고무 얼룩말이 담겨 있고 '유명한' 칠성제과에서 만든 화과자가 담겨 있고…….

생각해 보니 그때 나는 종교적 감정도 없이 산타클로스의 전설을 믿고 있었다. 어린 나는 말 없는, 그러나 따사로운 부정(父情) 아래 자라나고 있었다.

그리고 예년처럼 올해도 크리스마스가 찾아왔다. 나는 아내와 아이에게 등산화와 티셔츠를 남겨놓고 양친이 계시는 대전으로 내려갔다. 아버지는 어느새 69세, 어머니는 64세. 이제는 역할을 바꿔야 할 때이건만 모든 것이 불안정한 나는 산타클로스가 될 채비를 갖추지 못했다. 집을 떠나 길 위에 나를 얹어 놓은 것일 뿐. 그러면서 생각했다.

'크리스마스가 되면 모든 일이 투명해진다.'

이 때가 되면 가난한 사람은 더욱 가난해지고 부자는 훨씬 더 큰 부자가 된다. 부자 아빠와 가난한 아빠는 서로 다른 고민을 한다. 세상은 신의 축복을 받은 나라와 저주를 받은 나라로 양분된다. YTN 월드뉴스는 자비를 배분해주지 않는 초월자의 깊고 무서운 뜻을 화상으로 전해준다.


이때가 되면 애인이 없는 젊은이는 더 외로워지고 세상의 통념이 허용치 않는 연인은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는 고통을 맛보고 사랑이 없는 집에서는 위선의 축포가 터진다. 그리하여 일부일처제 소가족제도는 한 켜 더 단단해지고 일상은 더 힘센 동아줄이 되어 사람들을 포박해버린다.

그러나 크리스마스로 인해 모든 일이 투명해지고 그래서 더욱 슬픔을 느끼게 하는 것은 정작 내 영혼의 메마름.


언젠가, 사람에 대한 사랑은 사라지고 사람을 사랑했다는 기억만 남아, 왜 타인이 자기를 미워하는지 영문 모르게 된 이를 본 적이 있다. 지금도 그는 열심히 자기는 사람을 사랑하노라고 믿고 있는지 모른다. 그리하여 자기를 따뜻하게 대해주지 않는 모든 사람의 심성을 의심하는 아집에 아직도 단단히 사로잡혀 있는지도.

나는 일반명사로서의 사람에 대한 사랑은 버렸다. 나는 막연한 휴머니즘을 믿지 않기로 했다. 내게 필요한 것은 사람 일반이 아니라 어떤 이름을 가진 누군가를 사랑해주는 일일 뿐.

어떤 누군가를 위해 나를 바치고 희생하는 것. 그것은 아이를 위해 크리스마스 트리를 만들어주는 아버지가 되는 것……같은 것. 이것이 내게는 필요한데 언제 어느 곳에서부터 나는 다른 길을 걷고 있단 말인가. 왜 어떻게 나는 물기 없이 바싹 마른 겨울 나뭇가지가 되어버렸단 말인가.

아내와 아이를 어깨 위에서 내려놓고 양친마저 등에서 내려놓고도 더 무엇이 무거워 마냥 어리광이나 부리고 있는 나는 도대체 무슨 인생을 살고 싶은가. 꽁꽁 언 길 위에서 긴 크리스마스를 보내면서 나는 이타성을 잃어버린 나 자신을 슬프게 자각해야 했다. 내게는 또 다른 진로의 수정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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