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면도 성당의 성탄절 자선 헌금

등록 2002.01.05 17:46수정 2002.01.05 1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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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오후에 잠시 안면도 성당에 갔다 왔습니다. 제가 살고 있는 태안읍에서 안면성당이 있는 승언리 초입까지는 약 30분 거리. 길 사정이 좋아진 덕이지요. 어제 안면도에 갔다 온 사정을 기록해 보고 싶군요.

안면도 승언리 안면초등학교 근처 야산 기슭에 작은 성당이 지어지고, 그 안면천주교회의 초대 주임 신부님으로 윤종관 신부님이 부임을 하신 때는 지난해 2월.

대전 도마동성당 주임 신부로 3년 동안의 일을 마치시고 안면성당 초대 주임 신부로 부임하신 윤종관 신부님과의 16,7년 전의 각별한 인연 때문에 저는 지난해 2월 신부님이 부임을 하실 때도 집에 가만히 있을 수가 없더군요.

십수 년 전에 해미천주교회의 주임 신부로 계시면서 '해미무명순교자성지'를 오늘의 모습으로 만드시기 위해 무척이나 고생을 하신 분인데, 도시 성당에서 좀 위안을 받으시는가 했더니 다시 고생문이 훤한 신설 본당인 안면성당으로 오셨으니 위로의 말씀이라도 한마디 드려야 할 것 같았고….

제가 어제 다시 안면성당을 간 까닭은 이렇습니다. 지난해 12월 24일 잠시 안면성당에 갔을 때 신부님께서 지나가듯 한마디 하신 것이 내 머리에 단단히 입력이 된 탓이었습니다. 식복사도 없이 자취를 하시는 신부님께 김치는 어떻게 마련해서 잡숫느냐고 여쭈었더니, 지난해 2월 부임하실 때 김치냉장고 하나 장만하고 집안 제수씨들이 담가준 김치를 많이 담아와서 김치 걱정은 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시절 탓인지 동치미 생각이 간절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날 집에 와서 어머니께 그 얘기를 했습니다. 지난해 가을 대장암 수술을 받으신 몸으로도 팔순이 다 되신 제 노모님께서 동치미를 담가서 성당 수녀원에도 한 동이 보내 드리고, 집 앞 화단의 땅에다 묻은 독에 넣은 동치미를 아직 개봉도 하지 않고 있는 까닭이었습니다.

그 얘기를 들은 어머니께서 동치미 독을 열고 무 하나 꺼내다가 손수 썰어서 맛을 보시더군요. 우선 우리 가족 모두가 아침 식사 자리에서 동치미 맛을 보았습니다. 아무런 잡맛과 군맛이 없고, 상큼 깔끔 시원한 우리 집 동치미 맛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역시 조금도 변함없고 깔축없는 우리 어머니의 동치미였습니다.

독신으로 사시는 성직자와 수도자 공양을 제일 중요한 일로 치고 하느님으로부터 크게 점수 따는 일로 생각하시며 살아오신 어머니이신지라, 내게 안면도에 갔다 올 날을 잡으라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어제 동치미 독에서 무 여러 개를 꺼내어 썰어 가지고 어지간한 플라스틱 통에 담아서 차에 싣고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안면도에 갔던 거지요. 어머니께서 동치미 독 뚜껑을 여신 덕분에 이웃 세 집이나 겨울 한철의 별미인 동치미 맛을 보게 되었고….

우리가 갔을 때 윤 신부님은 성당에서 파이프 오르간으로 성가 곡을 연주하고 있었고, 안면성당 신자들은 아닌 것 같은 분들이 여럿 모여 성가를 부르고 있더군요. 그들이 누군인지 곧 알게 되었는데, 윤 신부님이 전에 계셨던 대전 도마동성당의 신자 분들과 서울에서 오신 가톨릭대학교 음악대학 홍민자 교수님 일행이었습니다.

홍민자 교수님은 방학중에 안면도 성당에서 파이프 오르간을 이용하여 자신이 작곡한 성가 곡들을 발표하는 음악회를 열고 싶은 의향이신 것 같았습니다. 사전 답사를 할 겸 윤 신부님과 의논을 하시려고 오신 눈치였습니다.

도마동성당 신자님들은 돌아가실 때 한 자매님이 윤 신부님의 주머니에 돈 봉투 하나를 넣어주시더군요. 참으로 고마운 장면이었습니다. 1년 예산이 1200만 원밖에 되지 않는 작고 가난한 본당에서 사목을 하시려면 이런저런 외부 원조가 반드시 필요하리라는 것은 신부님이 말하지 않아도 훤히 알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주일 헌금이 평균 10만 원대인 안면성당에서도 지난해 성탄 전야 미사 때는 '구유 헌금'이 무려 90만 원이나 되었다더군요. 신부님이 처음으로 강론 시간에 '자선 헌금'에 관한 말씀을 하신 결과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쓰고 남는 돈으로, 즉 여유 돈으로 자선 헌금을 해서는 무의미합니다. 특히 자선 헌금의 경우에는 내가 당장 먹고 입어야 할 돈을 줄여서, 다시 말해 내 희생을 감수하며 헌금을 해야 진정으로 하느님께 기쁨을 드리는 참된 사랑의 헌금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 오늘 아기 예수님께 그런 헌금 한번 바쳐봅시다."

구유 헌금 90만원을 확보한 신부님은 신자들로 하여금 주변의 불우한 사람들, 신자들은 제외하고, 10만 원씩이나마 꼭 도와 드려야 할 집들을 알아보도록 했답니다. 그랬더니 26가정이 보고되더랍니다. 윤 신부님은 허리띠를 더 조이기로 하고 본당 예산에서 170만원을 떼어 자선 헌금으로 돌리자고 했답니다. 신자 회장들은 본당의 1년 예산 1200만 원에서 170만 원을 떼면 어떻게 본당 살림을 하느냐고 처음에는 입이 부었었으나, 스물 여섯 집을 돌아다니며 10만 원씩을 나누어 드리고 돌아와서는 아주 기쁜 표정이더랍니다.

그런 얘기를 들려 주신 윤 신부님은, "거봐, 그러고 났더니 또 이렇게 돈이 생기잖남. 봉투 속에 얼마가 들었는지는 물르겄지먼…"하며 껄껄 웃는 것이었습니다.

대전과 서울에서 오신 손님들이 먼저 돌아가고 우리 가족이 맨 나중에 오게 되었는데, 성당 마당에 서서 우리를 배웅해 주시는 신부님의 모습이 왠지 쓸쓸하게 보였습니다. 수녀님도, 식복사도, 사무장도, 미사복사도, 오르간 반주자도 없는 성당의 신부님이었습니다. 미사를 드리실 때는 제대와 파이프 오르간 사이를 왔다갔다하시면서, 성가 시간에는 오르간 반주도 겸하며 미사를 지내시는 신부님이었습니다.

신부님의 모습이 왠지 쓸쓸하게 보인다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아내는 적이 가슴 아파하는 표정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잠시 1986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윤종관 신부님과의 추억담 하나를 소개하고 싶군요.

그때는 5공 군사정권의 서슬이 아직 시퍼렇던 시절이었지요.
서산군 음암면의 음암중학교에 이아무개라는 처녀 교사가 있었지요. 간간이 시도 쓰며 국어를 가르치는 교사였지요. 1년 전 홍성의 갈산고등학교에 근무할 때 터진 이른바 '민중교육'사건에 연루되어 서산의 음암중학교로 좌천 성격의 발령을 받아 온 교사였고….

이 교사의 아이들에 대한 사랑은 참으로 남달랐습니다. 아이들에 대한 그 사랑 때문에 우리 나라의 교육이, 그리고 교단이 안고 있는 심각한 문제들을 좀더 폭넓게, 또 깊이 꿰뚫어볼 수가 있었지요.

이 교사는 '열린 교육'을 생각했습니다. '참교육'으로서의 '열린 교육'의 실체들을 하나씩 자신의 수업 시간에 도입하고 실습을 해나갔습니다.

그것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오늘의 관점으로 보면 참 우스운 일이지요. 왜냐 하면 오늘날 교육 현장에서 채택되고 있는 이른바 '열린 교육'의 효시와도 같은 것이었으니까요.

그런데 그것이 문제가 되어 이 교사는 학교 운영자들은 물론이고 서산군교육청, 충남도교육청의 교육 관료들과 마찰을 빚게 되었습니다. 결국에는 이 교사가 교단에서 축출될 위기에까지 몰리게 되고 말았지요.

오늘날 교육 현장에서 활용되고 있는 '열린 교육'의 실체들을 생각하면, 한발 앞서 나아가는 사람―먼저 생각하고 앞서 행동하는 창조적이고 개척자적인 사람들의 삶이란 얼마나 고단한 것인가를 다시 깨닫게 됩니다.

아무튼 이 교사의 외로운 싸움은 서산의 사회운동가 윤철수 씨를 통해 나에게까지 알려졌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이 교사가 60리 밖에서 살고 있는 나에게 찾아와 사건의 전말을 얘기하며 도움을 청하더군요.

나와 윤철수 씨는 음암 지역의 관할 성당인 운산성당 정지풍 신부님과 이웃 동네인 해미 성당 윤종관 신부님, 그리고 음암의 한 감리교회 목사님께 사실을 알리고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5공 치하에서 후미진 지역에서나마 민주화 투쟁에 여러 가지 형태로 관여하면서 농민운동이며 교육민주화 부분에도 큰 관심을 갖고 있던 두 분 신부님과 감리교회 목사님은 적극적으로 힘을 보태 주었지요. 모든 계획과 방안이 좀더 원활히 마련될 수가 있었고, 나는 신부님 목사님과 함께 며칠 동안 음암중학교의 수많은 학부모들을 찾아다니면서 이 교사가 시행한 '열린 교육'의 참 취지와 본질을 상세히 설명하고 이 교사 지지 서명을 받는 일을 벌였지요. 120여 명 학부모들이 연서명한 문서를 교육청에 전달할 수가 있었고….

결국 이 교사는 교단에서 축출되지는 않았지만, 다른 학교로 옮겨가게 되었답니다. 교사 신분을 잃지 않으면서 어느 정도 처벌을 감수하는 선으로, 말하자면 절충을 본 것이지요.

그후 이 교사는 1989년 전교조 교사들에 대한 대대적인 해직 탄압 때 교직을 떠나는 비운을 겪고 택시 운전기사로 생활하다가 1994년 복직되어 지금은 천안에서 중학교사로 일하고 있다고 합니다.

윤종관 신부님은 해미순교성지 조성 사업을 시행하는 그 바쁜 와중에서도, 경찰의 고문에 의해 목숨을 잃은 서울대생 고 박종철 열사의 추도 미사를 1987년 2월 해미 성당에서 거행할 정도로 당찬 분이었습니다. 내가 그해 태안성당에서 '80년 광주의 비극'을 소상히 알려 주는 비디오 테이프를 수많은 신자들에게 보여 줄 수 있었던 것도 윤 신부님으로부터 테이프를 입수한 덕이었지요. 물론 그런 저런 일로 경찰서 정보과 형사들과의 실랑이가 참으로 자심했었고….

그런 윤종관 신부님이 다시 도시 성당을 떠나 교구청이 있는 대전에서 가장 먼 안면도의 신설 성당으로 오시게 된 것입니다.

신자가 통틀어 2백 명밖에 되지 않고 다수가 노인들인, 모든 것이 부족하고 미비한 성당이기 때문에, 다시 말해 인건비 해결이 난망하기 때문에 신부님이 사무장 역할도 해야 하고, 식복사도 둘 수 없으니 자취 생활을 해야 하고…. 물론 그런 것들을 다 각오하고 자원을 해서 오셨지만, 신부님의 고생이 너무 크신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내가 신부님을 도와 드릴 형편도 못 되고….

나로서는 안면도의 신설 본당에 웬만큼 나이도 드신 (재작년에 은경축을 지낸) 중견 신부님께서 오신 것이 다행스럽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신설 본당을 꼴 잡히고 틀 잡힌 본당으로 키워야 할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지만 윤종관 신부님은 사목 활동을 하시는 틈틈이 안면도 지역사회의 현안들―가령 환경 보존 문제들 따위에도 지대한 관심을 기울이실 것으로 믿어집니다.

'환경 문제'라는 말이 나왔으니 한마디 더하죠.
안면도는 최근까지 완전히 소외된 지역이었지요. 무대접·푸대접의 표본 같은 고장이라고 한다면 재대로 표현이 된 걸까요? 전국의 모든 읍단위 고장들 중에서 가장 늦게서야(1997년에서야) 도로 포장이 완결되었을 정도로 푸대접이 심했지요. 전국 읍단위 고장들 중에서 가장 늦게(작년에서야) 신부가 상주하는 천주교회가 생겼다는 것도 하나의 시사점이 될 것 같군요.

그런데 오랫동안 지속되었던 그런 푸대접과 소외가 뜻밖의 '과실(果實)을 가져왔습니다. 그것은 '개발귀신'의 침노를 모면한 일이지요. 그로 말미암아 자연 환경이 그대로 유지 보존된 것이지요. 그러니 푸대접과 소외가 얼마나 다행한 일이겠습니까.

그런데 최근 들어 개발귀신이 안면도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답니다. 충남도에서 안면도를 개발한다는 미명 아래 골프장 건설을 계획하고 있어 환경단체와의 마찰을 빚고 있고, 2002년 '세계꽃박람회' 개최지가 된 바람에 사구(砂丘)를 절단 내는 해안도로가 건설되는 등 환경 파괴 현상이 심화되고 있는 거지요.

지난해 1월 18일 밤 KBS 1 텔레비전의 '환경 스페셜'이 안면도를 비롯한 태안반도의 최고 명물인 천혜의 사구들이 무분별한 개발로 사라지고 있는 현실과 그것의 참담한 폐해들을 보여 준 이후 내 홈페이지의 방명록에는 "사구에 대해서 아시나요? 태안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생각 있는 지식인이라면 앞장서 주시길 바랍니다"라는 한 방문자의 질책성 주문이 기록되었는데, 이 메일을 통해서도 비슷한 주문들을 많이 받았지요.

생각하면 안타까움이 큽니다. '세계꽃박람회'가 아무리 큰 행사라 하더라도 그것은 단지 일회적인 행사일 뿐이지요. 안면도의 사구를 비롯한 환경은 영원한 것이고…. 그런데도 그 일회적인 행사를 위해서 영원히 보존해야 할 안면도의 천혜의 환경을 파괴하고 절단 낸다면 그게 과연 온당한 일일까요?

이제부터라도 안면도의 자연 환경을 지켜 내는 쪽으로 좀더 많은 노력이 집중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계제에 안면도를 아시거나 동경 같은 것을 가지고 계신 독자님들께 안면도에 좀더 많은 관심 가져 주시기를 부탁 드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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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태안 출생. 198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추상의 늪」이, <소설문학>지 신인상에 단편 「정려문」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옴. 지금까지 120여 편의 중.단편소설을 발표했고, 주요 작품집으로 장편 『신화 잠들다』,『인간의 늪』,『회색정글』, 『검은 미로의 하얀 날개』(전3권), 『죄와 사랑』, 『향수』가 있고, 2012년 목적시집 『불씨』를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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