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산에서 맞는 새해

등록 2002.01.07 11:58수정 2002.01.07 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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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산 가는 길은 아름답습니다.

새로 개통한 서해안 고속도로를 달리는 재미가 우선 그만이지요. 우리 나라 고속도로 중에서는 드물게 곧은 길과 탁 트인 시야가 편안한 길입니다.


그 길을 세 시간 남짓 달리면 줄포 나들목이 나옵니다. 거기에서부터 변산은 시작됩니다. 나직한 햇살과 한겨울에도 포근한 바람, 눈이 시리게 푸르른 보리밭이 거기 변산에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투리도 정겨운 사람들이 그곳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변산 하면 제일 먼저 내소사를 떠올립니다. 부안군 진서면 석포리 능가산 자락에 자리잡고 있는 내소사 입구에서 우리를 반기는 것은 아름드리 전나무들입니다. 한겨울에도 싱그럽고 눈부신 전나무 숲길은 들어서면 어둑어둑한 분위기에 마음이 착 가라앉습니다. 그 길을 걸으며, 죽어 다시 태어나면 나무가 되고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전나무 숲길이 끝나면 왕벚나무 길이 나옵니다. 잎 다 떨군 겨울 벚나무들의 매끄러운 몸매와 그 끝에 자리잡은 내소사의 전경이 한 눈에 들어옵니다. 한여름에는 숲에 가려 보이지 않는 사찰의 전경을 겨울에는 싫도록 구경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겨울 내소사는 아름답습니다.

오랜 세월을 지켜온 대웅전은 낡고 빛이 바랜 기둥과 문살로 우리를 반깁니다. 억지로 꾸미고 새로 덧칠한 사찰들에 익숙해진 우리 눈에는 세월의 더께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내소사 대웅전이 인공 건축물이 아니라 자연의 하나로 느껴집니다. 그저 일 없이 경내를 걸어보고, 시원한 샘물로 목을 축여보는 일만으로도 겨울 변산 여행은 행복하기 그지없습니다.

절을 나오면 우리의 발길은 왼편 구룡저수지 쪽으로 향합니다. 그러나 굳이 저수지까지 가지 않아도 좋습니다. 가는 길의 처마 낮은 집들과 앙징맞은 돌담들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정겨우니까요. 길에는 어제 내린 눈이 질퍽하게 녹고 있고, 귓불을 스치는 바람도 맵기보다는 포근하게 느껴지는 곳, 변산은 그래서 더 넉넉한 곳이기도 합니다.
혹 시간이 남으면 곰소의 젓갈과 어시장 구경도 할 만 합니다. 웬만한 아이 몸뚱이만 한 한치도 있고, 온갖 횟감과 생물 생선들과 상인들의 목소리가 살아있는 곳이 바로 곰소니까요.

변산은 가는 곳마다 아무데나 발길을 멈춰도 아름답습니다. 궁항에서 바라보는 저녁 노을도 더할 나위 없이 고즈넉합니다. 활 궁(弓)자 모양으로 해변이 펼쳐져서 궁항이라고 부른다는 이곳의 노을은 서해 낙조를 감상할 만한 숨은 땅입니다. 새로운 해, 그러나 희망보다는 안타까움이 더 큰 사람들에게 궁항의 낙조는 내일에 대한 작은 그리움입니다.


매운 겨울 바람이 기승을 부리는 요즘이지만, 변산에서는 남 먼저 봄을 맛볼 수 있습니다. 쌓인 눈도 봄물처럼 녹아 흐르는 곳, 전나무 숲길따라 눈이 소복하지만 나무들 사이 봄기운이 슬쩍슬쩍 스쳐 지나는 곳, 보리 잎 파랗게 싱그러운 땅, 창 너머로 비쳐드는 햇살 따사로운 변산, 그래서 변산 여행은 지나버린 계절로 가는 여행이 아니라 우리 앞에 찾아올 시간을 향해 다가가는 여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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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장다리꽃같은 우리 아이들>, <작은 바람 하나로 시작된 우리 랑은>, <천년 전 같은 하루>, <꽃,꽃잎>, <물골, 그 집>, <람풍>등의 시집과 <비에 젖은 종이 비행기>, <꽃비> , <무지개 너머 1,230마일> 등의 소설, 여행기 <구름의 성, 운남>, <일생에 한 번은 몽골을 만나라> 등의 책을 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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