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병을 앓으며

명동성당의 변질된 모습

등록 2002.03.18 17:29수정 2002.03.18 1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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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과 귀를 열고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 치고 천주교 '명동성당'을 모르는 이는 아마도 없을 것이다. 어둡고 험난했던 시절 '시대의 아픔'을 절절히 체감하며 살아온 사람들은 물론이고, 시대의 곡절들을 어느 정도 제대로 듣기만이라도 하며 살아온 사람들이라면 명동성당이라는 그 이름만으로도 가슴 찡한 공명(共鳴) 같은 것을 느낄 것이다.


그만큼 명동성당이 안고 있는 상징적 실체적 의미는 참으로 크고도 장중하다. '민주화 운동의 성지'라는 이 상징적 실체에 대해 천주교 신자들 중에는 자부심을 갖는 이들이 많고, 비신자들 중에도 선망이나 호의적인 눈으로 보는 이들이 많다. 나는 알고 있다. 명동성당이 암울한 현실 속에서 발산하는 진실과 정의와 희망의 빛으로 말미암아 80년대에는 전국적으로 천주교 신자가 급증했다는 사실을!

나는 명동성당이 하느님을 모르고 천주교를 모르는 세속의 권력자들에게도 알게 모르게 외경심 같은 것을 안겨 주어온 사실을 특히 주목한다. 사실은 그들의 그런 외경심 때문에 명동성당은 성역이 되고 민주화의 성지가 될 수 있었다. 공권력이 참으로 무자비하고 무지막지하게 폭력을 자행하던 시절에도 명동성당만큼은 치외법권 지역으로 스스로 선을 그려놓고 끝내 그 선을 넘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억하면 나는 과거 군사독재정권의 권력자들이 고마워지기까지 한다. 그렇다. 조금은 아이러니도 있지만, 나는 지금 그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다.

그러나 소위 문민정권 시절의 최고 권력자였던 김영삼 씨를 생각하면 지금도 실소를 머금지 않을 수 없다. 그는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씨 등 군사 정권 시절의 전임자들이 감히 생각도 못했던 폭거를 자행했다. 1995년 5월 한국통신노조간부 농성을 진압하기 위해 성당 구내로 경찰 병력을 투입한 일이 바로 그것이다. 명당성당 초유의 공권력 투입으로 명명되고 있는 그 사건은 전체 천주교 신자들은 물론이고 이 나라의 깨어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경악케 하고 큰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물론 그후에도 김영삼 씨는 기고만장했다. 문민정권의 이름과 위엄으로 학원·교회·사찰의 모든 '성역'을 없애고 개혁과 통치를 '학실히' 하겠다고 기염을 토했다. 당시 세상에는 그가 개신교의 장로이기 때문에 명동성당을 침탈했다는 말도 강하게 회자되었다.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권력자들의 명동성당 '성역 존중'과 하나님을 믿는 김영삼 씨의 명동성당 침탈 사이에는 뭐라고 형언할 수 없는 아이러니가 존재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런데 더욱 의미로운 것은 김영삼 씨가 그토록 성역 타파를 외치며 명동성당 침탈이라는 초유의 폭거를 자행했음에도 명동성당은 성역의 위상을 잃지도 않았고, 민권운동 성지로서의 이미지를 더욱 올곧게 유지해왔다는 점이다. 따라서 김영삼 씨가 자행한 명동성당 침탈은 '폭거'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문민정권의 대단히 불명예스러운 사건으로 남게 되었다.


저 20세기 여명기의 명례방(明禮坊)시절부터 종마루(鍾峴)에서 이 땅에 선각의 빛을 뿌려온 명동성당, 독재 시대 어둡고 긴 터널 속을 살아오는 동안에도 한 번도 굴절의 자세를 보이지 않고 민중에게 희망을 주고 의지가 되어 주었던 명동성당이 '국민의 정부' 말기에 이르러 마침내 새로운 위기를 맞게 되었다. 명동성당 신자들 스스로 성역 허물기, 성지 훼손 행위를 자행하기 시작한 것이다.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의 군사정권 시절에는 성역으로 온전히 존재했었던 명동성당이 김영삼의 '문민정권' 시절에는 사상 초유의 침탈 사건을 겪더니, 김대중의 '국민의 정부' 시절에 이르러서 그것도 말기에 신자들에 의한 자해 행위가 감행되려는 순간에 와 있는 것이다. 이 또한 기막힌 아이러니가 아닐 것인가.


발전(發電)노조 지도부가 21일째 농성 중인 명동성당에서 17일 오후 신도들이 노조원의 철수를 요구하며 농성 텐트의 강제 철거를 시도하는 이례적 사건이 발생했다는 보도를 접했다. 신도들의 집단적 실력 행사는 명동성당이 1970년대 이후 민주화 운동 세력의 단골 농성장으로 이용된 이래 사실상 처음 있는 일이다.

사목협의회 소속 4백여 명은 이날 낮 노조원들의 농성 텐트 앞에 모여 "민주화운동 시절과 달리 이익 단체들이 자기 주장을 위해 성당을 이용하는 것을 더 이상 허용할 수 없다"며 철수를 요구했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철거를 반대하는 천주교정의구현전국연합 등 천주교 인권 관련 단체 회원 2백여 명과 한때 고성을 주고받는 사태까지 벌어졌다고 한다.

신도들과 성당 측의 강경한 태도에 60여 명의 농성자들은 마리아상 앞 공터에 친 네 개의 텐트 중 두 개를 자진 철거했고, 신도들은 특히 노조 측에 대한 이날의 철거 요구가 '최후통첩'임을 밝혀 공권력 투입 등 향후 예상되는 상황에 어떤 태도를 취할지 주목된다는 것이다.

지금 현재 상황은 몹시 긴박한 것 같다. 신도들은 17일 정오께 성당 입구에서 한 시간여 동안 출입자들을 통제한 뒤 발전노조 농성자들에게 퇴거를 요청했으며, 노조원이 안전하게 제3의 장소로 떠날 수 있도록 신부 한 명을 동승시킨 버스 한대를 대기시켰다고 한다.

또 사목협의회는 이에 앞서 지난 14일 성당 진입로에 '시위 농성은 이제 노사협상 사업장에서'라는 대형 현수막을 걸었다고 한다. "노사문제는 사업장에서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 신도들의 주장이고, 명동성당의 백남용 주임신부도 "노조 스스로 물러나는 게 노조, 경찰, 성당 3자가 모두 승리하는 방법"이라며 "지금이 바로 물러날 때"라고 발전노조에 대해 조속히 떠날 것을 촉구하고 나섰다는 것이다.

그러나 발전노조 이호동 위원장은 "물러갈 장소가 없다"며 농성을 계속할 뜻을 밝히므로써 이 긴박한 상황이 앞으로 어떤 양상으로 전개될 지, 특히 천주교 신자들에게는 초미의 관심사가 되어 있는 것이다.

자신들은 결코 노조의 이익을 위해서 농성을 하는 것이 아님을 목 아프게 절규하고 있는 발전노조원들은 농성 사태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명동성당 사목협의회가 참으로 원망스러울 것이다.

나 역시 같은 생각이다. 발전노조원들의 농성 투쟁은 단순한 노사 갈등 차원이 아니다. 나라의 기간 산업 중에서도 최대 기간 산업인 발전 산업을 외국 자본에 매각하려는 정부의 처사에 대항하여 투쟁하고 있는 것이 이번 발전노조 농성의 핵심적 본질이다.

나는 김대중 정부가 참으로 무모한 정부임을 확인한다. 그처럼 중차대한 일을 왜 조급하게 서두르려는 것일까? 국민의 광범위한 의견 수렴이 꼭 필요한 일인데 왜 자신의 임기 안에 꼭 해치워야만 할 일인 듯이 강압적으로 밀어붙이기를 감행하는 것일까?

또 김대중 대통령이 아무래도 미국에게 빚을 진 게 많은가보다는 엉뚱한 생각도 하게 된다. 김 대통령은 이미 우리나라를 미국의 언어 속국으로 만드는 일의 기틀을 마련했다. 그의 영어 숭배의식을 보면 도저히 자존심을 지닌 자주 국가의 대통령 같지가 않다. 일단 언어 속국의 길을 터놓은 다음 우리나라의 주요 기간 산업들을 미국의 자본에 하나하나 팔아 넘겨 마침내 대한민국을 온통 미국의 한 주(州)같은 꼴로 만들려는 속셈은 아닐까?

발전 산업을 미국 자본에 팔아 넘긴다면 그날로 발전 산업이 더욱 발전하고 우리나라 경제 전체가 크게 회생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일까? 그렇다면 그것의 근거는 도대체 뭔가? 만약 반대의 현상이 발생한다면 그 책임은 누가 질 것인가? 엄청난 국민적 피해로 돌아오기라도 한다면 그 책임은 누가 지는 것인가?

천주교 서울대교구청 웹사이트 '굿 뉴스'에서 본 전홍구라는 이는 "시장경제 논리에 따라서 우리 집 전기요금이 40만 원이 나온다면 당연히 납부할 것"이라고 말했는데, 한달 전기요금 40만 원도 문제없이 낼 그런 부자들의 허세를 위해서 이 정부가 발전 산업을 매각하려고 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발전노조원들의 농성, 그들을 성역 밖으로 몰아내려는 명동성당 사목협의회의 행동을 둘러싸고 지금 '굿 뉴스' 자유게시판에는 뜨거운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논쟁'이라는 표현은 부적합할 지도 모른다. 발전노조의 농성을 지지하고 '벼랑' 앞에 서 있는 그들의 처지를 동정하는 사람들은 대개 성당 측에 대해 눈물어린 '호소'를 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 호소에 대해 성당의 사목협의회 측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자기합리화를 위해서 예수님까지 팔아먹는 작자"들이라고 일갈한다. 함부로 예수님을 끌어들이지 말라는 뜻이다. 그들의 말에서는 매우 과격한 언사도 쉽사리 동원되곤 한다. 글의 제목부터 「염병하고 있는 작자들을 보며」,「진짜 염병하고 있네」라는 등의 원색적인 표현을 불사한다.

같은 천주교 신자로서 참으로 민망하다. 나는 그런 글들을 접하면서 나 또한 '염병 환자'가 될 수밖에 없음을 자각한다. 미치광이로까지 몰렸던 예수님을 따라 나도 기꺼이 미치광이 아니면 염병 환자가 되어야 함을 통감한다.

그렇다. 나 또한 십자가에 못 박히는 예수님처럼 미치광이가 아니면 염병 환자다. 그러나 나는 조금도 부끄럽지 않다. 다만 슬퍼할 뿐 절망하지도 않는다. 예수님 같은 미치광이, 염병 환자들이 있어 이 나라의 민주화가 이룩되어 왔고, 이 세상이 진정으로 발전할 수 있음을 알기에….

그리고 김영삼의 문민정권 시절에 명동성당 침탈이라는 초유의 사건을 겪고서도 명동성당이 민주 민권운동의 성지로 계속 우뚝 설 수 있었듯이, 오늘 비록 명동성당 신자들에 의해 초유의 자해 행위가 빚어진다고 하더라도, 명동성당의 그 고고한 상징적 생명력은 계속 불변할 것임을 굳게 믿기에….

오늘 죽으면 내일 다시 더욱 강하게 부활할 것을 믿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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