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중·동의 '수호천사'들

국세심판원, 무가지 비과세 결정 이어 법원 맞장구

등록 2002.06.27 10:43수정 2002.06.28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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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세심판원의 심판 결정으로 신문사들에 대한 무가지 관련 과세를 철회한 국세청.
ⓒ 오마이뉴스 자료사진
어느 중소기업이 오랜 연구 끝에 새로운 맛의 음료수를 개발하였다. 이 음료수가 소비자로부터 인기를 끌기 시작하자 한 대기업이 비슷한 맛의 음료수를 만들어 시장공략에 나섰다. 제품이 특별히 우월하지 않는 한, 후발주자로서 시장을 공략하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대기업이 중소기업보다 나은 건 돈이 많다는 사실 뿐. 이러한 상황에서 대기업이 쉽게 취할 수 있는 방법은 덤핑판매로 중소기업이 선점한 시장을 뺏는 일이다.

그러나 공정거래법 때문에 편하게 취할 수 있는 방법이 못된다. '부당하게 상품 또는 용역을 통상거래가격에 비하여 낮은 대가로 공급하거나 높은 대가로 구입하여 경쟁사업자를 배제시킬 우려가 있는 경우 (공정거래법 시행령 제5조 제5항 1호)' 제재를 받기 때문이다.

간이 작은 대기업 사장은 쉽게 덤핑판매를 결정하지 못했다. "그러면, 어떻게 한다? 아, 견본품을 뿌리자. 100개중 50개만 돈 받고 나머지는 판촉용 견본품이라고 하면 되지." 그런데 이것도 쉽지가 않다. 판매가능한 정품 견본품을 도가 지나치게 많이 뿌릴 경우, 국세청에서 이를 접대비로 보아 결국 세금을 추징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고….

그러나 앞으로 대기업은 이러한 걱정을 안해도 된다. 견본품을 접대비로 볼 수 없다는 결정과 판결이 연속적으로 나왔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1년전 국세청이 신문사에 대하여 세무조사한 결과 거액의 세금을 추징한 사건을 기억할 것이다. 이 사건에서 가장 논란이 많았던 부분은 무가지에 대한 과세였다. 당시 국세청은 유가지의 20%를 초과하는 무가지를 접대비로 보아 세금을 추징하였으나, 국세심판원은 무가지는 접대비가 아니라 판매촉진비 등 정상적인 비용으로써 인정되어야 한다며, 지난 5월 28일 국세청에 대해 패소 결정을 내렸다. 이로써 돈많은 신문사들은 무가지를 부담없이 무한대로 뿌릴 수 있게 되었다. 신문사의 무가지는 다른 업종의 견본품과 같은 것이다.

그로부터 20일이 지난 6월 19일, 행정법원은 견본품 화장지를 접대비로 볼 수 없다는 판결을 내렸다. 쌍용제지(주)가 대리점 등에 견본품 명목으로 판매 가능한 정품 화장지를 공짜로 준 사실에 대하여 국세청이 접대비로 보아 세금을 추징하였으나, 견본품은 판매촉진비이지 접대비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로써 어떤 업종이든 돈 많은 대기업은 견본품을 이용하여 사실상 덤핑판매를 할 수가 있게 되었다.

(쌍용제지 사건이 행정법원까지 갔다는 것은 국세심판원이 국세청의 손을 들어주었음을 의미한다. 만약 국세심판원이 국세청 패소 결정을 내릴 경우, 국세청은 이에 불복을 할 수 없으며 무조건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국세심판원이 무가지와 견본품 화장지에 대하여 상반된 결정을 내렸음을 알 수 있다.)


좀 더 깊이 있는 이야기를 진행하기 위해, 이쯤에서 접대비와 판매촉진비를 둘러싼 논쟁의 의미를 한번 정리해보고 넘어가야겠다.

(1) 수익 - 비용 = 이익


(2) 이익 X 세율 = 세금


위의 식은 회사가 내야 할 법인세의 계산공식을 간단히 표현한 것이다(실제 법인세 계산공식은 이 보다 훨씬 복잡하다). (1)의 식에서 수익이라 함은 매출 등과 같이 회사의 자산을 불어나게 하는 거래를 말하고, 비용은 수익을 올리기 위해 필수적으로 들어가는 지출(예를 들면, 인건비, 임차료, 광고선전비 등등)을 말한다. 수익에서 비용을 빼면 순이익이 남는데, 여기에 정해진 세율을 적용하여 세금을 계산한다. 여기서 우리는 수익이 적거나 비용이 많을수록 이익이 작아지고 따라서 세금도 작아짐을 알 수 있다.

접대비와 판매촉진비는 위 (1)식에서 비용에 포함되는 항목이다. 접대비는 사업상 거래관계가 있는 자에게 거래관계를 원활히 하기 위하여 지출하는 비용으로서, 그 대표적인 예가 음주가무(飮酒歌舞)에 들어간 돈이다. 판매촉진비는 광고선전의 목적으로 들어간 비용으로서 그 지출대상은 불특정다수인이다('불특정다수인'이란 '사업상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는, 그냥 지나가는 사람들'이라고 이해해도 무방하다).

흔히 '접대비'는 사회적 낭비요소이며, 바람직하지 않은 비용으로 여겨진다. 그래서 미국 같은 나라는 세법상 접대비를 인정하는데 매우 엄격하고, 일본은 접대비를 아예 인정하지 않는다. 우리나라의 경우, 2001년에 뿌려진 기업의 접대비가 무려 1조원에 달한다. 그야말로 '접대천국'이라고 할 지경이다.

접대문화에 찌든 우리나라의 기업환경에 비추어 볼 때, 현실적으로 접대비를 전혀 인정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래서 우리나라 세법은 기업의 매출액에 따라 일정한도까지만 접대비를 비용으로 인정하고, 이를 초과하는 부분은 비용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반면 판매촉진비는 전액 비용으로 인정하고 있다.

(주)갑 : 매출 100 - 비용 60 = 이익 40. 이익 40 X 세율 30% = 세금 12.

(주)을 : 매출 100 - 비용 60(비용으로 인정되지 않는 접대비 10 포함됨) = 이익 40. 세법상 이익 50 X 세율 30% = 세금 15.


위의 두 회사를 비교해 보면, 사실상 이익은 '40'으로 똑같다. 그러나, 을의 비용 60중에는 세법상 비용으로 인정되지 않는 접대비가 10 포함되어 있어, 세법상 이익은 50이 된다. 그 결과, 사실상 이익은 같으면서도 세금은 을이 더 많이 내야 한다. 이처럼 지출한 비용이 접대비로 분류되느나 판매촉진비로 분류되느냐에 따라 세금계산에 차이가 나게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 기업의 대부분은 세법상 비용으로 인정받는 접대비 한도액이 턱없이 부족하다고 말한다. 그래서 접대비를 여러 가지 변형된 형태로 지출하고 있다. 회의비, 사례비, 복리후생비, 판매장려금 등등…. 판매가능한 정품을 견본품의 명목으로 거래처에 공짜로 주는 것도 변형된 접대비로 여겨져 왔다. 사실 견본품을 공짜로 주는데에는 여러 가지 의도가 있을 수 있다. 광고선전의 목적일 수도 있고, 거래처에 접대의 효과를 노리는 것일 수도 있고, 또 덤핑판매를 노리는 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 판매가능한 정품을 거래처에 공짜로 준 경우, 사전약정에 의한 것이거나 사회통념상 인정되는 정도의 것이라면 정상적인 비용으로 인정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는 접대비로 보는 것이 그동안의 관행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세무행정이 위의 두 판결에서 다 부정되었다. 그 결과 신문시장에서는 무가지에 의한 조·중·동의 지배, 다른 시장에서는 견본품을 이용한 대기업의 시장지배가 탄력을 받게 되었다.

무가지는 접대비가 아니라는 국세심판원의 결정을 둘러싸고 크게 3가지의 비판과 요구가 나오고 있다.

첫째, 국세심판원의 이번 결정이 언론개혁을 후퇴시켰으며 불공정거래를 더욱 더 조장할 것이라는 비판이다. 이러한 비판의 반대편에는 '언론개혁? 불공정거래? 우리는 그런 거 알지도 못하고 신경쓸 이유도 없다. 단지 법률적 관점에서 판단하면 된다'라는 가치판단 배제론이 있다.

이 가치판단 배제론은 사회경제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는 사건에 있어서 대중의 관심을 차단하는데 매우 효과적이다. '너희들이 법에 대해 뭐 알아? 전문가인 우리가 다 알아서 판단하니까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어!'라는 훈계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법에 무식한 대중들은 '법은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라는 상식만 알면 되는 것이다.

둘째, '화장지나 화장품 견본품에 대하여는 접대비로 보았으면서 무가지는 왜 예외냐?'는 비판이다. 이에 대하여는 '대법원 판결도 바뀌는 판에 국세심판원 결정이라고 못 바뀔 이유가 뭐냐?'라는 변화무쌍론이 맞서고 있다. 이렇게 까지 나오면 사실상 딱히 할 말이 없다.

셋째는 '물론 바뀔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경우 합리적 근거가 있어야 한다. 국민을 납득시키기 위해서도 결정문을 공개하라'는 요구이다. 이러한 요구에 대하여는 '우리는 납세자의 기밀을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눈물겨운 납세자 보호론으로 묵살한다.

사실 국세심판원이 일단 국세청에 패소결정을 내리면 국세청은 군소리 없이 이를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에 이미 엎질러진 결정에 대하여 왈가왈부해 보았자 실익이 없다. 지금의 상황에서는 오히려 위와 같은 결정이나 판결이 더 이상 나오지 않도록 근본적인 대책을 세우는 것이 더 필요하다.

무가지와 견본품을 접대비로 볼 수 없다는 주된 논리의 근거는 '조세법률주의'이다. 세법에서는 접대비를 "접대비 및 교제비·기밀비·사례금 기타 명목 여하에 불구하고 이와 유사한 성질의 비용으로서 법인이 업무와 관련하여 지출한 금액을 말한다"고 규정하고 있을 뿐이므로, 무가지와 견본품을 접대비로 보아야 할 법적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현대 자본주의사회에서의 거래형태는 무수히 많고 복잡하며 빛과 같은 속도로 변한다. 이러한 현실에서 과세대상이 되는 모든 거래형태를 법에 기술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런데도 상상속에서나 가능한 조세법률주의는 '납세자 보호'라는 탈을 쓰고 여전히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상상속에서나 가능한 조세법률주의에 의해 보호받는 납세자는 대개 부자들이다. 그들이 보호됨으로 인해 구멍나는 세수는 결국 서민들이 메꾸어야 한다. 현재 이 상상속에서나 가능한 조세법률주의는 조·중·동의 수호천사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지금은 조세법률주의에 대한 논쟁을 벌일 만큼 여유있는 상황이 아니니, 이쯤에서 끝내고 결론을 내자. 현재로서는 상상속에서나 가능한 조세법률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상상의 일부를 현실화시키는 수밖에 없다. 그것은 세법에 '일정한도를 초과하는 판매가능한 정품 견본품과 무가지는 접대비로 보아야 한다'는 조항을 신설하는 것이다. 약간은 우스꽝스러운 법이 될지 모르지만 어쩌겠는가? 상상속에서나 가능한 조세법률주의 신봉자들의 비위를 맞추면서, 조세정의와 공정거래질서를 세우자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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