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권과 언론 "우리가 언제 싸웠던가?"

현정권, 세무조사 1년 만에 언론과 '밀월관계' 회복 노력

등록 2002.06.29 00:30수정 2002.06.30 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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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일 오후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세계신문협회(WAN) 회장 선출 기념 축하연에서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오른쪽에서 두번 째)이 박권상 방송협회장, 최학래 신문협회장 등과 함께 케이크를 자르고 있다. 밖에서는 중앙일보 인쇄노동자들의 복직 촉구 시위가 이어졌다. ⓒ 오마이뉴스 임경환

"언론계는 분열 반목하면서 국민의 분열과 반목을 나무랄 수 없습니다. 이 자리가 우리 언론계가 화합하는 출발점이 되길 바랍니다."

28일 세계신문협회(WAN) 회장 선출 기념 축하연의 주인공으로 참석한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의 목소리에는 자신감이 넘쳐 있었다.

이날 서울 무교동 프레스센터 20층 국제회의장에서 열린 축하연에 전해진 김대중 대통령의 축하메시지와 이한동 국무총리의 축사, 여기에 대한 홍 회장의 자신감에 찬 답사는 작년 언론사 세무조사를 감행한 정권과 '개혁의 대상'이었던 거대 언론이 1년만에 밀월 관계를 회복하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반면, 중앙일보 인쇄노조 소속 해직자들은 연회장 밖에서 복직 요구 시위를 벌여 장내의 화기애애한 분위기와 극명한 대조를 이뤘다.

이날 축하연은 홍 회장이 지난 5월29일 벨기에 브뤼헤에서 열린 WAN 총회에서 임기2년의 회장에 선출된 것을 축하하기 위해 한국신문협회가 마련한 것. 정부측 인사로는 이한동 국무총리, 박지원 청와대 비서실장, 전윤철 재경부총리, 남궁진 문화관광부 장관, 김명자 환경부 장관이, 정당에서는 노무현 민주당 대통령 후보, 김근태 상임고문, 이낙연 대변인, 강성구, 박병석, 정동채 의원(이상 민주당), 이회창 한나라당 대선 후보, 이규택 원내총무, 김무성 안택수 이원창 정병국 의원(이상 한나라당) 등이 축하연에 참석했다.

박 실장은 "오늘 대통령님께서 이 자리에 꼭 축하의 말씀을 하시려고 했는데, 마침 독일 대통령의 국빈 만찬을 주재하느라 제가 대신 왔다"며 축사를 대독했다.

"홍석현 세계신문협회 회장의 취임을 진심으로 축하해 마지않습니다...(중략)...이번에 홍 회장께서 세계 113개국 18,000여 신문과 통신사를 대표하는 중책을 맡게 된 것은 개인의 영예일 뿐만 아니라 한국 언론의 경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한국 언론의 위상이 그만큼 높아졌고, 그에 대한 세계의 기대 또한 그만큼 커지고 있는 것입니다.

54년만에 처음으로 세계 최대 언론단체의 대표를 배출한 아시아 언론계로서도 크게 축하하고 자랑할 만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홍 회장이 이러한 중책을 훌륭히 수행할 분이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중략)...이번 홍 회장의 취임이 한국 신문산업의 세계적인 발전과 교류 확대에도 좋은 계기가 될 것을 기대해 마지않습니다. 홍석현 회장께 다시 한번 마음으로부터 축하를 드리면서, 우리 언론의 발전과 언론인 여러분의 건승을 기원합니다."



이 총리도 축사에서 "홍 회장의 WAN 회장 선출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WAN은 세계 최대의 언론단체로, 그 동안 언론 자유의 수호를 위해 노력해왔다"며 홍 회장을 추켜세웠다.

▲답사를 하는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 ⓒ 오마이뉴스 임경환
홍 회장도 "이제는 화합할 때"라며 한껏 여유를 찾았다. 홍 회장은 답사에서 "분에 넘치는 축하와 격려에 대한 진정한 감사와 함께 막중한 사명감을 느낀다"며 이렇게 말했다.


"이 자리를 빌어 몇 가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 언론계는 지난 세무조사 이후 분열과 반목의 상처를 아직 완전히 치료하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그 원인이 어디에 있든 언론계는 큰 신문 대 작은 신문, 방송 대 신문, 보수신문 대 진보신문 등으로 나눠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라 전체적으로도 지역간, 세대간, 이념간 갈등이 여전합니다. 이번 월드컵이 국민 통합에 큰 기여를 했듯이 언론계도 이제는 화합할 때입니다. 언론계 자신은 분열 반목하면서 국민의 분열과 반목을 나무랄 수 없습니다. 이 자리를 통해 우리 언론계가 화합할 수 있는 출발점이 되길 바랍니다. 제가 먼저 겸손히 마음을 열겠습니다."


그러나 '작은 진보신문'을 경영하고 있는 최학래 한국신문협회장(한겨레 사장)은 이날 연설에서 홍 회장의 WAN 회장 선출을 축하하면서도 따끔한 지적을 빠뜨리지 않았다.

"홍 회장이 한국 언론 발전을 위해 할 일이 참으로 많아졌습니다. 우리 신문인들이 언론의 정도를 걷도록 더욱 분발합시다. 이 자리에서 우리 신문인들이 안고 있는 문제를 일일이 열거하지 않겠습니다. 우리 모두 무엇이 문제인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정확하고 공정한 보도'라는 신문제작의 제1원칙에 충실하고, 아울러 혼탁한 신문시장을 정상화하는 데도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이날 정권이 거대 언론에 보여준 유화적인 제스처는 중앙일보가 국세청으로부터 탈세 혐의로 법인고발을 당한 1년 전 상황을 생각하면 납득하기 어려운 것이다. 1년 전 오늘(29일) 국세청은 조선, 중앙, 동아, 한국, 국민, 대한매일 등 탈세 규모나 수법이 심각한 6개 언론사를 검찰에 고발했다. 이미 99년 세무조사의 철퇴를 맞았던 홍 회장은 구속을 면했으나 방상훈(조선일보 사장), 김병관(동아일보 명예회장), 조희준(국민일보 회장) 등 3개 신문사 사주가 구속됐고, 정권과 거대언론의 긴장 관계는 최악의 국면으로 치달았다.

그러나 지난달 하순 국세심판원이 무가지에 대한 비과세 방침을 결정하고, 국세청이 신문사들에 부과된 세금의 상당부분을 덜어주면서 양자간의 관계에 이상 기류가 감지되기 시작했다. 언론사 세무조사 당시 '정부의 언론 탄압'을 부각시켰던 거대 신문사들도 국세심판원의 결정을 대서특필하며 승리를 자축하지 않았다. 정부가 거대 신문사들에 사실상 백기를 든 상황에서 언론사들의 조심스러운 보도 태도를 통해 "정부와 언론이 서로의 신경을 건드리지 않고 사실상 밀월 관계에 들어간 것이다"는 해석이 설득력을 얻게 됐다.

축하연에 참석한 청와대의 고위관계자는 "김 대통령의 축하 메시지가 정부와 거대 언론의 밀월관계 회복을 의미하는 게 아니냐"는 <오마이뉴스> 기자의 질문에 "노코멘트다. 아니, 이 자리에서 나를 만났다는 사실조차 언급하지 말아달라"며 답을 피했다.

▲김진현 바른사회를 위한 시민회의 공동대표(전 문화일보 회장)의 건배 제의에 따라 잔을 든 참석자들. 좌로부터 이한동 국무총리, 홍 회장, 노무현 민주당 대통령후보 ⓒ 오마이뉴스 임경환
이날 축하연이 시작될 무렵 연회장에서 조우한 노무현 후보와 이회창 후보는 악수를 나누고 29일 대구에서 열리는 한국과 터키의 월드컵 3-4위전을 화제로 짧은 대화를 나눴다. 노 후보가 "이제 평상시로 돌아가야죠"라고 말하자 이 후보는 "큰 고비는 지났다. 나는 (경기장에) 가보려고 한다"고 답한 뒤 악수 없이 어색하게 헤어졌다.

한편, 회의장 밖에서는 '초대받지 못한 손님들'의 시위가 1시간 가량 계속됐다. 이들은 조광출판인쇄와 A프린팅(전 중앙기획) 해직 노동자들로, 이날 축하연에 참석할 양사 사주들과의 면담을 시도했으나 경호원들의 제지로 피케팅에 만족해야 했다. 조광 노동자들은 "홍 회장과 방상훈 사장이 친하다고 들었는데, 친구의 WAN 회장 취임 축하연에도 참석하지 않냐?"며 방 사장의 불참을 은근히 비꼬았다.

2000년 6월 중앙기획 인쇄노동자들이 노조를 결성한 것에 대해 중앙일보의 인쇄자회사인 A프린팅(대표이사 박두원)은 '노조원 집단 해고'라는 초강수로 대응했으나 같은 해 9월22일 조합원 13명의 퇴사를 조건으로 사태를 일단 봉합했다. 그러나 회사측은 나중에 복직을 약속한 해직 조합원 7명을 받아들이지 않아 이날의 시위로 이어지게 됐다.

7명의 해직자들 가운데 3명은 복직의사가 없으나 4명은 복직을 절실히 원하고 있다. 28일 시위를 주도한 언론노조 중앙신문인쇄지부 조남영 전 위원장은 다음달이면 복직 투쟁이 1년10개월에 접어들게 된다. 조 씨는 "홍 회장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복직을 시킬 수 있는 상황이다. 2000년 9월 송필호 부사장이 조합원 전원의 고용 승계를 약속했는데, 이를 일방적으로 파기했다. 단 하루라도 근무를 한 후에 사표를 쓰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라며 약속 이행을 촉구했다.

해직 노동자들에 따르면, 중앙일보 자회사 직원들이 7월1일부터 연말까지 중앙일보 사옥 앞에서의 집회 신고를 선점해버리는 바람에 일체의 단체 시위가 불법이 되어버린 상황이다. 그러나 해직 노동자들은 '1인 시위'를 멈추지 않겠다고 결의를 굽히지 않았다.

전국언론노동조합 탁종열 조직부장은 "5월29일 홍 회장의 WAN 회장 당선을 축하하는 난(蘭)을 회장실에 보냈는데, 회장실에서 '해고자 복직 약속'이라는 리본이 달려있다는 이유로 접수를 거부했다"며 "자기가 데리고 있던 식구들조차 끝까지 책임지지 않으려는 사람에게 세계신문협회 회장 자리가 합당한 지 의문이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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