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손 잡고 찾아간 '어머니 고향집'

길이 물 위로 떠내려가는 곳, '어머니의 고향'

등록 2002.08.01 16:16수정 2002.08.02 0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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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학을 하자마자 내려온 고향집은 온통 잡초 투성입니다. 손바닥만한 화단에는 바랭이가 우거져 꽃보다 풀이 더 무성하고, 텃밭에는 쇠비름과 피가 가득합니다.


농약을 치지 않아서 더 잡초가 극성인 것 같습니다. 잡초를 뽑다가, 잡초의 무성한 생명력에 감탄을 하며, 그것을 뽑아 버리는 일이 생명을 죽이는 일이 아닌가 하는 군더더기 걱정을 하기도 했습니다.

고추를 따고, 오이 덩굴을 뒤져 막 연초록으로 자라는 싱싱한 놈을 골라 덥석 베어 무는데 후두둑 비가 내리기 시작합니다. 마당에서 흙장난을 하던 늦둥이 진형이 녀석이 내게 소리를 지릅니다.

"아빠, 비 와. 얼른 들어오세요."

어느새 녀석은 처마 밑으로 들어서 있습니다. 엄마를 떨어져 있으니 말이나 행동이 더 의젓해 보입니다.

큰 아이가 고등학교 2학년이라 보충수업 때문에 방학도 없습니다. 제 어미는 그런 큰아들 뒷바라지하느라 함께 오지 못했고, 이제 여섯 살인 늦둥이만 데리고 내려오면서 걱정이 되기도 했습니다.


엄마와 떨어져 있어 보지 않았던 아이라 며칠 못 견디고 가자고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우려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녀석은 의외로 잘 적응을 합니다.

저녁 때, 밥을 먹이다가 "엄마 보고 싶니?" 하고 물으면 도리질을 하며 대답을 하곤 합니다.
"아니, 안 보고 싶어."


그러나 보고 싶다는 표정이 역력합니다. 태어나서 처음 엄마와 떨어져 있게 되었는데 보고 싶지 않을 리가 있겠습니까? 그래도 참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모습이 대견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합니다.

한번 시작한 빗줄기는 밤이 새도록 그치지 않습니다. 아침에도 비는 추적추적 내려 온 골짜기를 적십니다. 제법 불어난 개울물이 빗소리에 맞춰 콸콸 소리를 내며 흘러갑니다.

"아빠, 우리 물 구경 가자."

비 때문에 마당에 나가 놀지 못하게 되자 늦둥이 녀석이 답답한지 졸라댑니다. 물 구경보다는 엄마 생각이 나는 눈치지만, 나는 짐짓 모른 체하고 녀석의 말에 맞장구를 칩니다.

"그래, 물이 많이 불었겠다. 우리 구경 가자."

왼쪽 바위가 어머니가 오르셨다는 치마바위
왼쪽 바위가 어머니가 오르셨다는 치마바위최성수
어차피 비가 내려 할 일도 없던 터라 나는 녀석을 태운 채 차를 몰고 문재를 넘습니다. 실은 녀석의 투정을 보면서 나도 어머니 생각이 나서입니다.

차가 계촌을 지나 십여 분 달리자 오른쪽에 있던 강이 왼쪽으로 자리를 바꾸고 이내 금당계곡이라는 표지판이 나타납니다. 금당계곡? 그러나 내 기억 속에는 금당계곡이 아니라 개수(介水)입니다. 열두 골짜기에서 물이 흘러내려 열두 개수라고 부른다는 곳, 바로 어머니의 고향입니다.

비는 억수같이 쏟아지고, 개수로 향한 길은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처럼, 젖어 있습니다. 나는 잠시 아무 말도 없이 빗줄기 속으로 차를 몹니다. 뒷자리의 늦둥이도 그런 내 마음을 눈치챘는지 말이 없습니다.

빗줄기 속으로 옥수수밭과 음식점들이 스쳐가고, 거대한 물줄기를 이루며 흘러내리는 강물만 보입니다. 강물은 온통 흙빛입니다. 이름대로 열두 골짜기에서 쏟아져 내린 물이 한군데 합수하여 우당탕탕 흘러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 열두 골짜기의 한 곳이 바로 어머니의 고향입니다. 열 아홉에 시집오기 전까지, 어머니의 어린 기억들이 남아 있는 곳, 강원도 평창군 대화면 개수가 바로 여기입니다.

"그날은 왜 그리도 눈이 많이 내렸는지. 가마꾼들이 미끄러져 발을 헛딛기 일쑤였고, 가마 멀미 때문에 온 몸이 다 가라앉을 지경이었지."
돌아가시기 몇 해 전, 어머니를 모시고 아버지와 함께 찾아왔던 이곳에서 어머니는 회한에 젖은 눈빛으로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 저기가 벼랑모루야. 저 바위벼랑을 껴안다시피 지나야 대화 장에 갈 수 있었단다."
"저 바위는 치마바위네. 내가 어릴 때 미역 감으며 올라갔던 바윈데."
"저 산을 넘어 내가 여기 처가에 왔었지. 참 깊고 깊은 산중이었는데…. "

아버지와 어머니는 보이는 것마다 추억에 젖어 한 마디씩 하셨습니다. 그리곤 두 분의 감탄은 어머니가 사셨던 옛 집에 이르러 최고조에 달했습니다.

"집이 아직도 그대로 있다니? 뒷마당 나무도 그대로네."
"저 집 마당에서 결혼식을 올렸었는데."

보이는 집이 어머니의 고향 집.
보이는 집이 어머니의 고향 집.최성수
육십 년 가까운 세월을 살아온 두 분의 마음 속에 한창 청춘의 시절, 그 아스라한 날들에 대한 그리움이 가득 피어오르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고향 마을을 다녀오신 몇 해 뒤 어머니는 세상을 뜨셨습니다. 그리고 그 후 세상의 일에 쫒겨 나는 어머니 고향을 다시 찾지 못했습니다. 언젠가 다시 한 번 어머니와 아버지를 모시고 이곳을 찾겠다고 마음 속에 다짐을 두었지만, 어머니는 내 다짐을 기다리지 못하고 저 세상을 향해 떠나신 것입니다.

나는 어머니의 고향집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차를 세우고 오래도록 강 건너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런 내 모습이 이상한 지 아들녀석이 묻습니다.

"아빠, 저 집은 또 뭐야?"
나는 녀석들 돌아보며 설명을 해줍니다.
"응, 저기가 할머니 고향집이란다."
"할머니? 진형이 할머니?"
"그래, 진형이 할머니."
"보리소골 산소에 계신 할머니 말야?"
"그렇지."

진형이가 태어나고 꼭 한 달만에 할머니는 세상을 뜨셨습니다. 그러니 아이의 기억에 할머니가 있지도 않을텐데, 그래도 녀석은 할머니 이야기를 잘 알아 듣습니다. 내 대답 뒤에 녀석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묻습니다.

"그런데 고향이 뭐야?"
"태어난 곳이 고향이지."
"할머니 태어난 곳이 여기야? 그럼 진형이 고향은 어디야?"
"진형이 고향은 서울이지. 엄마가 있는 서울."

엄마 얘기가 나오자 녀석의 눈망울이 반짝 빛납니다. 엄마가 더 보고싶은가 봅니다. 내가 이곳에 와서 돌아가신 어머니를 그리워하듯 말입니다.

녀석도 한참동안 개울을 건너다보더니 느닷없이 묻습니다.
"그런데 아빠, 물에 돌멩이도 떠내려 가네."
불어난 물에 작은 돌들이 함께 쓸려내려 가는 것을 본 것입니다.
"물살이 세서 돌들이 떠내려 가는구나."

내 대답에 녀석이 걱정 어린 표정으로 말합니다.
"할머니 고향은 안 떠내려갈 거야."
다시 차에 오르고, 차 창 밖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녀석이 불쑥 입을 엽니다.
"길이 물 위에 떠내려 가. 우리 차도 물에 떠내려 가."

어머니 고향 집 앞을 흘러가는 물
어머니 고향 집 앞을 흘러가는 물최성수
불어난 물을 한참 바라보다 시선을 길로 옮기니 마치 길이 떠내려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나봅니다. 어쩌면 우리가 걸어가고 있는 세상의 길들이 저처럼 물 위에 떠내려가는 길 같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나는 아이의 말을 들으며 잠시 했습니다. 그리고는 갈 때보다 더 젖은 마음으로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이미 어머니의 고향인 개수는 옛날의 그 개수가 아니었습니다. 음식점과 민박집들이 들어서고, 회사의 연수원도 몇 군데 생겨났습니다. 물 맑고 경치 좋은 곳마다 어김없이 유원지가 만들어지고 사람들로 북적대는 세상이니, 열두 골 개수를 그냥 두고 볼 리가 없겠지요.

아직 비포장인 도로 몇 군데도 머지 않아 반듯한 포장 도로로 바뀔 것입니다. 그러나 내 마음 속에는 여전히 몇 해 전 어머니를 모시고 갔던 그 개수, 아이 녀석이 말대로 물 위에 길이 떠가는 마음의 고향으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고향 길 초입에 들어서자 늦둥이 녀석이 갑자기 산 허리께를 바라보며 소리를 지릅니다.
"할머니, 할머니 고향에 갔다 왔어요."
그런 녀석의 말을 우리 어머니께서는 듣기나 하셨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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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장다리꽃같은 우리 아이들>, <작은 바람 하나로 시작된 우리 랑은>, <천년 전 같은 하루>, <꽃,꽃잎>, <물골, 그 집>, <람풍>등의 시집과 <비에 젖은 종이 비행기>, <꽃비> , <무지개 너머 1,230마일> 등의 소설, 여행기 <구름의 성, 운남>, <일생에 한 번은 몽골을 만나라> 등의 책을 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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