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소설 이야기 (3) 열쇠 없는 집

등록 2002.08.23 08:28수정 2002.10.08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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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쇠 없는 집(The House Without A Key)> 1925년작, 얼 데어 비거스 씀

고전적인 추리소설을 읽을 때 챙길 수 있는 재미중의 하나는 바로 탐정의 매력을 살피는 것이다. 여기서 고전적인 추리소설이라 함은 하드보일드 이전의 수수께끼 풀이형의 추리소설을 말한다. 이런 작품에서는 사건해결을 위해서 탐정의 두뇌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는데 따라서 독자들도 탐정의 언행과 스타일에 큰 관심을 갖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뛰어난 추리작가들은 거의 예외 없이 자신만의 탐정을 대단히 적절하게 형상화한다. 일반적으로 작가는 작품 속의 캐릭터에 자신의 모습을 어느 정도 투영하기 마련인데 아마도 추리소설에서는 탐정에게 작가의 모습을 적당히 새겨 넣지 않았을까.

탐정의 전형을 만들어낸 셜록 홈즈, 재기 발랄한 앨러리 퀸, 멋쟁이고 해박하지만 냉소적이고 잘난 척하는 파일로 반스, 냉정 침착한 에르큘 포아로, 커다란 덩치에 맥주를 좋아하는 기드온 펠 박사 등등...

여기에 한 명을 더 추가해보자. 바로 얼 데어 비거스가 만들어낸 중국인 탐정 찰리 찬.

찰리 찬은 몇 가지 면에서 의외인데 서양인 작가가 만들어낸 동양인 탐정이라는 점, 위에서 나열한 탐정들은 일종의 사립탐정인데 반해서 찰리 찬은 경찰에 몸을 담고 있는 형사라는 점이 그렇다.

찰리 찬은 작고 똥똥한 체격의 탐정으로 묘사된다. 통통한 볼과 짧은 검은 머리, 연한 갈색피부 그리고 담배. 이상하게도 난 찰리 찬의 묘사를 보면서 80년대, 내가 초등학교 중학교 시절에 유행했던 외화 '형사 콜롬보'의 그 콜롬보를 연상했다.


고수머리에 낡은 바바리 코트를 입고 시가를 입에 문 콜롬보 형사. 길을 걷다말고 돌아서면서 '하나만 더 물어볼께요' 라고 어눌하게 말하던 콜롬보.

찰리 찬은 중국인답게 도처에서 동양적인 철학이 담긴 말들을 뱉어내며 주변인물들과 대화한다. 그리고 찰리 찬이 사용하는 어법 자체에 상당히 연극적인 면이 많아서,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느끼하다' 싶을 정도의 닭살 돋는 말들을 자주 하고 있다.


그리고 이 작품에서 찰리 찬은 전면에 나서서 수사를 주도하지는 않는다. 하와이를 방문한 남자 주인공과 자신의 상관에게 많은 부분들을 양보하며 수사에 참여한다. 적어도 겉으로는 그렇게 보인다. 하지만 '중국인들에게는 뛰어난 직관이 있지요', '인내는 최고의 미덕입니다. 당신네 민족은 인내를 지나치게 냉대하는 것 같더군요' 라는 말들로 서양인들을 몰아 부치기도 한다.

'열쇠 없는 집'은 얼 데어 비거스의 처녀작이다. 작품의 무대는 특이하게도 하와이제도이다. 특이한 무대에 걸맞게 작품의 구성요소도 좀 예외성이 있다. 작가는 하와이의 풍물과 정경을 꽤나 많은 지면들을 할애해서 스케치하고 있다. 내가 읽어본 추리소설들 중에서 이 정도로 자세히, 마치 눈앞에서 보듯이 세부정경을 묘사했던 작품은 아마도 이것이 유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리고 내륙에서 하와이로 도착한 남자주인공의 여정도 꽤 섬세하게 묘사되는데 단지 외양 뿐만이 아니라 인물의 심리 또한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다. 범죄자나 탐정의 심리가 아니라 주인공의 부수적인 심리. 세 여자 가운데서 갈등하는 남자, 질투하고 절망하는 남자의 모습 등.

즉 이 작품에는 사건과 추리 외에 많은 면들이 양념으로 첨가되는데, 로맨스와 하와이의 정경은 이 작품의 읽을 거리를 상당부분 풍성하게 만들어주고 있다. 이런 면 때문에 찰리 찬이 등장했던 많은 작품들이 TV 시리즈로 제작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도 해본다.

반면에 정통추리라고 할만한 부분들이 약간 빈약하게 느껴지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위에서 말한 양념들이 이런 단점을 어느 정도 보충해줄 수 있지 않을까.

무더운 여름밤에 읽다보면 시원한 하와이의 모습이 머리 속에 떠오르는 것만 같다. 산꼭대기를 감싸는 흰 구름, 달빛에 빛나는 무궁화 생울타리, 그 너머의 진홍빛 방갈로에서 끝없이 펼쳐진 모래사장 너머의 태평양을 바라보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하는 것이다.

찰리 챈, 열쇠 없는 집

얼 데어 비거스 지음, 박영원 옮김, 정태원 해설,
국일미디어(국일출판사),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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