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인들을 열광시킨, 가정에 충실한 형사

[장르소설의 작가들 16] '찰리 챈 시리즈'의 얼 데어 비거스

등록 2016.03.30 09:07수정 2016.03.30 09:07
0
원고료로 응원
장르소설, 그중에서도 범죄소설의 역사를 장식했던 수많은 작가들이 있습니다. 그 작가들을 대표작품 위주로 한 명씩 소개하는 기사입니다. 주로 영미권의 작가들을 다룰 예정입니다. - 기자 말

범죄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들, 그러니까 형사나 탐정들의 가족관계나 가정생활에 대해서도 한번 생각해보자. 독특하게도 이들 대부분은 나이 많은 독신이거나 결혼을 한 번 했더라도 이혼한 상태다.


쉽게 말해서 화목하거나 단란한 가정을 꾸리는 형사나 탐정은 보기 힘들다. 고전추리소설의 탐정이었던 셜록 홈즈, 파일로 반스, 앨러리 퀸, 필립 말로우, 네로 울프 모두 노총각이다.

그렇다고 이들이 노총각 냄새 풍기면서 궁상맞게 생활하는 것은 아니다. 사건 해결도 해결이지만, 이들은 모두 자신만의 취미생활이 있기 때문에 사건이 없을 때면 우아하게(?) 그런 생활을 즐긴다.

좀 더 현대로 와도 마찬가지다. 링컨 라임, 케이 스카페타, 피트 마리노, 잭 리처 모두 독신이다(케이 스카페타는 시리즈가 진행되면서 재혼에 성공한다). 물론 탐정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다. 가정 생활이라는 측면만 가지고 보았을 때, 위의 탐정들과 비교해서 상당히 독특한 대표적인 인물이 한 명 있다.

바로 얼 데어 비거스(1884 ~ 1933)가 창조한 형사 찰리 챈(Chalie Chan)이다. 이름에서 느껴지는 것 처럼 찰리 챈은 중국계 미국인 형사다. 하와이 호놀룰루 경찰청에 근무하는 그는 결혼해서 무려 11명의 자식을 두고 있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라고 하지만, 찰리 챈은 행복한 가정생활을 유지해 나가고 있다. 퇴근하면 텅빈 집에 혼자 들어와서 혼자 밥을 먹어야 하는 독신 탐정들과는 너무 다른 셈이다.


하와이에서 가정을 꾸린 중국계 형사

a <열쇠 없는 집> 겉표지

<열쇠 없는 집> 겉표지 ⓒ 국일미디어

작가 얼 데어 비거스는 미국 오하이오 주에서 태어나서 하버드 대학교를 졸업했다. 그 후에 언론사에서 일을 했지만, 자신이 속한 언론사의 소유주가 바뀌면서 비거스는 해고 당한다. 이것이 일종의 전화위복이었을까. 비거스는 해고된 김에 평소에 좋아하던 소설을 쓰기로 결심한다.


1913년에 출간된 그의 첫 소설은 비평적으로나 상업적으로 동시에 성공을 거두었고, 이 성공을 바탕으로 이후 몇 편의 소설을 더 발표한다. 그리고 1919년에는 부인과 함께 휴식을 위해 하와이 호놀룰루를 방문한다.

여기서 찰리 챈이 탄생한다. 1925년 비거스는 '찰리 챈 시리즈'의 첫 번째 편인 <열쇠 없는 집>을 발표한다. 찰리 챈도 약간 독특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그는 오래전에 캘리포니아에 있는 한 저택에서 사환으로 일을 했었다. 그 일을 그만두고 나서 경찰대에 들어갔고 좋은 실적을 계속 쌓아서 경감 자리까지 올라간 것이다

작가가 묘사하는 찰리 챈의 외모는 전형적인 명탐정의 이미지와는 좀 거리가 있다. 크지 않은 키에 살찐 체형을 가지고 있고 얼굴도 퉁퉁하고 둥그스름하다. 그가 사용하는 영어는 약간 어눌한 면이 있다.

공자를 신봉하는 그는 누구에게나 항상 겸손하고 예의바른 태도로 대한다. 그리고 '인내가 최고의 미덕이지요'라고 말하는가 하면, 미국인들에게 낯설게 느껴지는 동양속담을 종종 들려준다. 대충 이런 식이다.

'풀이 자라야 우유를 짤 수 있다.'
'사람은 돌멩이에 발이 걸려 넘어지지, 산에 채여 넘어지는 법은 없다.'

어눌하면서도 날카로운 직관을 가진 찰리 챈

a <중국 앵무새> 겉표지

<중국 앵무새> 겉표지 ⓒ 국일미디어

동시에 뛰어난 판단력과 추리력, 날카로운 눈매도 함께 가지고 있다. <열쇠 없는 집>에서는 특유의 직관으로 하와이 호놀룰루를 배경으로 한 살인사건을 해결해낸다.

이 작품은 폭발적인 반응을 얻으며 팔려나간다. 그때까지의 서양인 탐정과는 어딘가 다른, 외모도 사고 방식도 이질적이지만 동양적 매력을 가진 찰리 챈에게 미국인들이 흥미를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열쇠 없는 집>의 성공에 힘입어 비거스는 <중국 앵무새>(1926), <커튼 뒤의 비밀>(1928) 등을 계속해서 발표해 나가고 이 작품들은 모두 상업적으로 커다란 성공을 거둔다. 찰리 챈이 다루는 사건도 다양하다.

<중국 앵무새>에서는 농장의 앵무새가 "사람 살려! 살인이야! 총을 치워!"라고 갑자기 외치고 이후에 실제로 사람이 죽어나간다. <커튼 뒤의 비밀>에서는 15년 전에 인도의 페샤와르 지방에서 실종된 한 여인의 행방을 추적하기도 한다.

이렇게 시작된 찰리 챈 시리즈는 총 6편까지 발표되었고 그 중 5편이 영화로 제작된다. 그 5편은 모두 두 차례씩 영화화 될 정도로 반응이 좋았다. 이 시리즈는 라디오 드라마와 만화로 제작되기도 했다. 조금 과장해서 표현하자면, 1920년대와 1930년대는 찰리 챈의 무대였던 셈이다.

이렇게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독특한 명탐정 찰리 챈을 창조해낸 얼 데어 비거스는 1933년에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채 50세가 되기 전에 사망했으니 오래 살았다고는 볼 수 없을 것이다. 작가가 좀 더 오래 살면서 집필을 계속했다면 더 많은 찰리 챈의 활약을 볼 수 있었을 텐데. 시리즈를 읽다보면 유일하게 아쉬운 점도 그부분이다.

찰리 챈, 열쇠 없는 집

얼 데어 비거스 지음, 박영원 옮김, 정태원 해설,
국일미디어(국일출판사), 2003


#얼 데어 비거스 #찰리 챈 #열쇠 없는 집 #중국 앵무새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일타 강사처럼 학교 수업 했더니... 뜻밖의 결과 일타 강사처럼 학교 수업 했더니... 뜻밖의 결과
  2. 2 유럽인들의 인증샷 "한국의 '금지된 라면' 우리가 먹어봤다" 유럽인들의 인증샷 "한국의 '금지된 라면' 우리가 먹어봤다"
  3. 3 얼굴 창백한 계산원을 보고 손님이 한 행동 얼굴 창백한 계산원을 보고 손님이 한 행동
  4. 4 꼭 이렇게 주차해야겠어요? 꼭 이렇게 주차해야겠어요?
  5. 5 쿠데타 막다 옥살이, 63년 만에 무죄 받아든 아들의 한탄 쿠데타 막다 옥살이, 63년 만에 무죄 받아든 아들의 한탄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