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볕아 반갑다. 햇볕아 놀자

<귀농일기> 효소도 만들고 우물가 수세미 넝쿨도 올리고 .....

등록 2002.08.25 01:27수정 2002.08.25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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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종일 햇볕이 났다. 오랜만에 날이 들어서 하루 내내 바쁘게 지냈다. 새벽에 일어나면 버릇처럼 하늘을 쳐다본다. 하루가 맑을 것인지 새벽하늘을 보면 대충 알 수 있다. 새벽하늘은 내가 그날 하루를 어떻게 지내야 할지를 예시해 준다. 내가 날씨와 기후에 민감하게 살아간다는 게 행복하다. 그건 자연스럽게 살아간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오늘도 역시 여러 가지 일을 했다.
이불 빨아 널기에서부터 밤늦게야 끝난 매실효소 걸러내 땅속에 묻기까지.

매실효소 걸러내는 일은 새날이와 새들이가 서로 찌그덕 빠그덕 하면서도 일을 거들어 주어 한결 편했다. 새날이가 채반지를 잡고 새들이는 플래시를 비추고 나는 원액을 걸러내서 땅 속 독에 부어 넣고 하는 일을 했다. 마당 우물가에서 행주를 빨아 오는 일이라든가 바가지에 물을 담아 오는 일. 독을 씻을 때 마른 행주로 물기를 없애는 일 등은 그때그때 아이들이 잘 해 내었다.

날마다 새날인 것을....

매실효소 원액이 팔뚝이랑 얼굴에 튀어서 끈적끈적 해지기도 했다. 지난 6월에 담았으니까 꼬박 두 달이 좀 넘었다. 아주 적당한 기간이었다. 독의 위치나 온도도 아주 주효했나보다. 잘 발효가 되어 너무 기뻤다. 향도 진하고 맛도 아주 정확했다. 뭔가 설익은 듯한 맛. 효소 거를 때의 바로 그 맛 이었다. 아주 좋다.

지난 주엔가 서울서 손님이 와서 잊고 지냈는데 작년에 걸러 묻어 둔 고구마효소 독을 1년 만에 열고 꺼내서 한 병 싸 주면서 맛을 보았더니 얼마나 잘 숙성이 되었던지 한마디로 감격했는데 이 매실 효소도 내년 이맘 때 땅속에서 꺼내면 기가 막힐 것이라고 마음속으로 기대 해 본다.


이 매실은 저 멀리 순창까지 가서 농민회 회원 댁에서 사 온 것이다. 이 농민회원은 작년에 평양공연도 다녀왔다. ‘청보리사랑’이라는 여성농민 노래패 활동을 한다. 지난번 우리쌀지키기 행진단이 이곳에 도착 했을 때도 그 노래패가 축하공연을 펼쳤는데 자작곡 신곡을 하나 발표했었다. ‘멈출 수 없다’라는 우리쌀 지키기를 위해 지은 노래를 불렀는데 지금도 그 감격을 잊을 수 없다. 아픈 농촌현실과 버릴 수 없는 꿈과 끈기. 희망의 메시지가 노래에 담겨 있었다.

실상사 작은학교에서 채마밭 가꾸기를 해 본 새날이가 아무래도 궁금증도 많고 질문도 많았다. 함께 일을 하면서 일거리를 얘기거리 삼는 것은 훌륭한 명상이다. 몸 자리와 마음자리가 일치하기 때문인데 마음이 몸과 그 몸이 하는 일에 잘 머무르게 되면 영혼에 평화와 안정 깃든다. 번뇌망상에서 벗어나 자유자재 해 진다.

새날이의 첫 번째 질문은 왜 낮에 종일 효소 독 뚜껑을 열어 놨다가 저녁 늦게야 작업을 하냐는 것이었다. 산채효소나 고구마 효소하고는 이 매실효소가 어떻게 다른 것이냐고도 물었다.


일 할 때는 그 일 이야기를 하는 게 좋다.

나는 새들이에게 사실 너는 내 아들이 아니고 우리 큰 아버지였었다고 실토를 했다. 내가 젊어지는 묘약을 천신만고 끝에 개발하였는데 정작 실험을 할 대상을 찾지 못해 안타까워하자 이를 본 큰 아버지가 자기를 실험하라고 했는데 약효가 너무 강력하여 갓난 애기가 되어 버렸고 내가 참회하는 마음으로 그 아이를 거두어 기르기로 했는데 그게 바로 새들이 너라고 했다. 그럼 친아들은 어떻게 했냐고 새들이가 물어서 네가 더 자라서 충격을 받지 않을만큼 되면 다 말해 주겠다고 했다.

새들이가 ‘우리 누나 새날이’를 두 글자로 하면 뭐냐고 해 놓고는 다른 사람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바.보’라고 했다. 매실 효소 독에 침이 튄다고 새날이가 소리를 질렀다. 새들이는 들은 척 만 척 하면서 세 글자로 하면 ‘멍.청.이’라고 했다. 나는 어제 들은 마스크 쓴 중을 뭐라 하는지 아느냐고 퀴즈를 냈는데 ‘중구난방’이라고 답을 말해줘도 두 녀석이 뭔 말인지를 몰라 웃지 않아서 썰렁했다.
‘중의 입에 한 난방장치’ 쯤으로 의역을 해 주었다.

점심 때가 되었을 때 일이다.
내가 두 가지 제안을 했다. 토요일이고 하니 부루스타랑 냄비랑 라면이랑 싸 가지고 위봉사 계곡 위봉폭포에 갈 것인지 어제 전야제 가서 신나게 놀고 왔던 전주소리축제에 가서 놀 것인지 정하자고 했다. 둘이가 이구동성으로 집에 있겠다고 했다. 밖에 나가기 귀찮다고 했다. 새날이는 새들이가 컴퓨터 게임 하려고 저런다고 했고 새들이는 누나가 TV 보려고 저런다고 했다.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

싱크대에 쌓여있는 그릇들이 산더미 같았다. 새날이를 설거지를 시키고 새들이를 방 청소를 시켰다. 새들이가 빈둥대고 핑계를 대면서 딴전만 피웠다. 아빠랑 밖에 나가서 일하자며 장갑 끼고 나오라고 했더니 청소하라매요? 하면서 새들이가 서둘러 청소를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 꼴을 보고 싱크대 앞에서 부지런히 설거지를 하던 새날이가 나를 돌아보고는 배꼽을 잡고 웃었다.

바구미가 나는 쌀을 방앗간에 가져가서 떡가래를 뽑아 둔 것으로 애들이랑 떡볶기를 해서 점심을 맛있게 먹었다. 나는 참이슬 두 잔을 반주로 마셨다. 바깥 날씨가 지글지글 끓고 있어서 마루에 걸쳐 누워서 늘어지게 낮잠을 잤다. 마당 한가운데서 빨간 고추가 말라가는 소리가 버쩍버쩍 나는 것 같았다. 이틀 동안 마루 그늘에서 초벌 말리기를 한 고추가 마침 오늘 처음 햇볕을 보게 된 것이다. 이른 아침에 가위를 들고 고추를 다듬어 널면서 고추가 왜 이리도 이쁠까 싶었다. 딸 때도 그랬지만 우리 고추는 유난히 싱싱하고 이뻤다.

고추따기가 시작되었다

올해는 위험한 시도를 했었다. 고추대를 묶어주지 않았던 것이다. 붙들어 묶어 가면서 까지 고추를 많이 열리게 한다는 게 왠지 자연스럽지 않아 보였다. 그래서 풀을 매면서 고추가 자기 무게를 못이게 기울어지거나 하면 다시 흙을 끌어 올려 고추대가 지탱할 수 있도록 해 주었었다. 결과는 상당히 만족스러웠다. 네 번이나 풀을 매어 고추 두둑에 쌓아 놓았는지라 땅이 얼마나 부드럽고 걸은지 땅을 갈지 않고 김장배추랑 가을 감자를 심을 예정이다. 이제 첫물을 땄으니까 앞으로 네 다섯 번까지 고추를 따게 될 것이다.

오늘 한 일은 더 있다.
마당 구석 거름자리를 4발 쇠스랑으로 한번 뒤집어 주었고 지난주에 초벌 감물염색을 했었는데 그것을 다시 빨랫줄에 널었다. 마당 우물위로 수세미를 올렸는데 줄기가 더 뻗어 나갈 수 있도록 낡은 전깃줄과 가는 나뭇가지를 이용해 우물위로 거물망을 더 달아 내기도 했다.

감물염색은 다른 천연염색과 다른 점이 있어 재미있다. 햇볕을 받을수록 감물염색은 아주 천천히 눈부신 갈옷으로 되어간다. 한 열흘 볕을 쬐어야 한다는데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햇살을 먹고 천이 물들어 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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